어약용문魚躍龍門
황하삼척리黃河三尺鯉
황하에 있는 석 자 크기의 잉어는,
본재맹진거本在孟津居
본래는 맹진에 살았는데,
점액불성룡點額不成龍
이마를 찧어 용이 되지 못한 바람에,
귀래반범어歸來伴凡魚
돌아와서 물고기들과 어울리누나.
맹진(낙양 근처를 흐르는 황하의 한 단락)에 사는 잉어들은 낙수와 이수를 거슬러 이궐용문伊闕龍門에 도착하면 혼신의 힘을 다해 용문을 넘으려 하는데.
이때 성공한 잉어는 용이 되어 승천하고, 바위에 머리를 찧고 실패한 잉어는 이마에 검은 상처 하나만 얻은 채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
이 이야기 때문에 신분이 한순간 바뀌는 기회를 등용문이라고 칭하는데, 선비에게 있어서 등용문은 과거科擧고.
무인에게 있어선 소림의 백팔나한진이 최고의 등용문이다.
다재수사로 불리던 천마도 백팔나한진을 깨면서 천강구절이란 대단한 별호를 얻고 만인의 숭앙을 받았다.
'누구지?'
언뜻 머리를 스친 생각을 멀리 던진 구후영은 자신의 모든 내공을 용천혈湧泉穴을 통해 땅으로 쏟았다.
덕분에 아래로 향하는 강한 흐름이 형성된 순간, 경천동지하고 귀신도 곡할 어마어마한 공격이 구후영을 덮쳤다.
아름드리나무를 뿌리 뽑고 만근 거암도 조약돌처럼 굴릴 거대한 흐름에 구후영이 가랑잎처럼 쓸려갈 것만 같았으나.
대성약결大成若缺 기용불폐其用不弊.
완전한 것은 흠 있어 보이나 쓰임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대영약충大盈若沖 기용불궁其用不窮.
꽉 찬 것은 비어 보이나 쓰임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비움으로써 채우고, 채움으로써 완전해지고, 완전해지며 흠이 생기고, 흠으로 비우고.
산사태처럼 무겁고 해일처럼 끊임없고 홍수처럼 저돌적인 공격을 구후영은 자신을 물길로 삼아 비우고 채움을 반복하며 바닥으로 흘렸다.
한 번, 열 번, 백 번.
비우기 무섭게 채워지고, 차기 바쁘게 비웠다.
전신의 경맥이 봄을 맞은 개울처럼 붓자 곳곳에 단전을 닮은 저수지를 만들어 넘침을 억제했고, 저수지마저 넘치자 개울을 넓혀 더 많은 기운이 흐르게 했다.
쩌적.
구후영의 몸을 타고 흐른 막대한 기운을 버티지 못하고 연무장에 깐 단단한 청석들이 부서졌다.
그에 구후영은 머리의 백회혈百會穴과 풍부혈風府穴과 풍지혈風池穴을 열어 기운을 배출하는 경로를 늘렸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구후영의 몸이 허공에 둥실 떴다.
커져라.
촛불은 꺼지기 전에 가장 밝고, 사람도 죽기 전에 회광반조回光返照로 건강해진다. 나찰진의 공격 역시 그랬는데, 구후영은 끝을 앞두고 갑자기 강해진 흐름에 대항해 단전을 감싼 세 개의 구궁을 키웠다.
덕분에 작은 내상조차 입지 않은 몸으로 훨씬 강해진 흐름을 제압하고 깃털처럼 느리게 바닥에 내려섰다.
"하하!"
구후영을 도우려다가 원병의 기습에 당한 옥무영이 입에 고인 피를 뱉고 시원하게 웃었다.
#
"그만 들어가지."
채 반 각이 안 되었는데 최종필이 채근했다.
"원경 스님은 반 각 뒤에 들어오라고 했소."
딱히 이유는 없었지만, 최종필은 왠지 동굴에 한시라도 빨리 들어가고 싶었다. 이런 오묘한 느낌은 자주 오는 게 아니기에 최종필은 형제를 강하게 설득했다.
"검이 죽개방 왕거지 손에 들어간 것부터 음모의 일환이오."
형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을 소림까지 데려온 스님들이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으나, 강호에서 구를 대로 구른 둘은 자신들이 어마어마한 음모에 빠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십여 년 동안 존경해온 총타주가 음모의 주모자 혹은 가담자일지도 모른다는 가설도 떠올렸다.
"이대로 구후 대협의 얼굴을 볼 자신이 있소? 지금 들어가서 혹시 곤경에 처한 원경 스님을 도우면 좋고, 아니어도 부탁받은 일을 빨리 해결하면 구후 대협한테 면이 서지 않겠소?"
다소 억지스러웠지만, 형제는 마음이 움직였다.
"옳은 얘기요. 늦어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는 있어도 빨라서 낭패 보는 경우는 없으니까."
셋은 나무껍질을 벗겨 가지에 감싸는 거로 간단한 횃불을 만들곤 곧장 동굴에 들어갔다.
#
한바탕 휘몰아친 폭풍이 사라지며 고요해진 연무장.
바닥에 쓰러져 힘없이 꿈틀대는 수십의 나한. 중태에 빠져 가는 숨을 겨우 이어가는 몇몇. 입가에 피 칠갑을 한 채 위태하게 버티고 있는 나머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허공에서 천천히 하강하는 구후영.
그리고 알몸의 젊은 스님.
구후영이 갖은 수단을 부려 어렵게 흘린 공격을 스님은 기마자세를 한 채 정면에서 맞섰고, 비록 승복이 모두 찢겨 사라졌으나 사람은 멀쩡해 보였다.
"원경?"
방장은 가끔 감정이 표정으로 드러나긴 했으나 구후영에게 살기를 한 번도 안 들킬 정도로 속내가 깊은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놀란 나머지 연무장 사람들에게 다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형님?"
거대한 힘이 쓸고 지나가며 구후영은 자신마저 잊은 무념무상의 상태에 빠져 영원과 같은 찰나의 황홀에 젖어있었다. 그러나 방장이 원경을 외치자 화들짝 놀라며 깊은 여운에서 빠르게 깼다.
쿨럭!
구후영을 도와 남은 공격 하나를 막아낸 원경이 피를 한 움큼 토하고 기절했다.
"형님!"
구후영은 바로 원경의 목과 손목에 손가락을 대고 진맥했다.
그때,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린 방장이 몸을 날려 구후영을 기습했다.
그에 구후영은 목을 짚은 왼손은 그대로 두고 오른손만 움직여 등에 멘 검을 뽑은 다음, 뒤돌아보지도 않고 허공을 찔렀다.
슉.
점点이 모여 선線이 되고, 선이 모여 면面이 되고, 면이 모여 공간空間이 된다.
그러나 고수는 다르다.
신창은 점 하나에 힘을 집중해 공간 전체를 제압한다.
구후영의 찌르기는 비록 신창의 것에 한참 못 미치나 찌르는 선 하나로 주변 공간을 모두 차지해 방장에게 일말의 틈도 주지 않았다.
그 탓에 흉흉한 기세로 덮치던 방장이 손가락으로 구후영의 검 끝을 톡 짚은 다음 오던 길로 고스란히 돌아갔다.
'제길.'
기습당하는 과정에 구후영은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 자존심이 한참 상한 방장은 얼굴이 지지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구후영은 원경을 진맥하는 데 집중했다.
'내상이 깊지 않다.'
심마는 알 수 없지만, 기운의 흐름이 자연스러운 것이 주화입마는 아니었다. 숨이 고른 게 굳이 자세히 살피지 않아도 크게 상한 곳이 없고, 몇 개 혈도를 다치긴 했으나 정도가 심하지 않았다.
그에 구후영은 감탄하는 마음이 거세게 일었다.
'형님은 참으로 대단한 무인이구나.'
나찰진의 어마어마한 공격을 상대할 땐 찰나라고 여겨도 될 짧은 순간에 수많은 일을 하느라 아무 생각도 없었고, 눈과 귀는 멀쩡했으나 뭘 보고 뭘 들었는지 머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 끝난 지금은 원경이 뭘 했는지 더없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저 어마어마한 공격을 맨몸으로 맞서다니.'
극한으로 집중해 온갖 재주를 부렸던 구후영과 달리, 원경은 그저 기마자세를 취한 채 몸으로 경천동지할 흐름에 맞섰다.
구후영의 방식이 기술의 극한에 가깝다면, 원경은 인간이 품을 수 있는 힘의 한계를 벗어난 모습이었다. 너무나도 다른 방식이어서 비교가 어렵지만, 굳이 따지면 원경이 더 놀랍다.
'어서 깨워서 뭘 어떻게 했는지 캐묻고 싶은데.'
궁금증이 강하게 치밀었지만, 구후영은 참기로 하고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봤다.
백팔나한진을 구성한 나한의 태반이 쓰러져 있었고, 아닌 자들도 겨우 서 있는 게 다였다.
굳이 묻지 않아도 승패는 명약관화明若觀火였다.
'해냈다.'
두 갈래 힘이 합쳐졌으면 구후영과 원경이 열이어도 막지 못했다. 어쩌면 나찰진으로 전환하면서 힘이 나뉜 탓에 구후영과 원경에게 각개격파 당한 게 패착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힘을 둘로 나누면서 약해진 사실을 알았어도 이립도 안 된 두 청년이 백팔나한진을 깬 사실을 폄하할 사람은 없다.
'대이변이다.'
백팔나한진을 깬 구후영과 원경. 소림을 대표하는 고수인 원병한테 기습당하고도 멀쩡한 옥무영.
이 과정을 지켜본 모든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똑같은 생각을 떠올랐다.
천마와 사대신협의 뒤를 이을 용들이 나타났구나.
#
"너무 서둘렀어."
급조한 횃불은 툭하면 꺼졌다. 그때마다 멈춰서 다시 밝히는 바람에 다급했던 마음과 달리 셋의 행보는 느렸다.
그러나 그게 꼭 나쁜 일은 아니었다.
"잠깐."
바닥에 떨군 부싯돌 때문에 엎드려서 더듬거리던 중, 최종필이 갑자기 속삭였다.
"기척을 들었소. 일단 숨는 게 좋겠소."
형제는 부싯돌을 찾다 말고 최종필을 따라 귀퉁이에 몸을 숨겼다.
저벅저벅.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두 개의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진짜 대단한 놈이다.'
횃불로 생긴 두 개의 그림자를 확인한 형제가 속으로 감탄했다.
최종필은 기척이 하나가 아닌 두 개임을 확인하고 짧은 순간 원경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고, 즉각 몸을 숨기기로 했다.
이는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형제도 놀랄 수밖에 없는 판단력과 순발력이었다.
"어허."
횃불을 들고 나타난 둘이 동시에 감탄을 뱉었다.
"사형, 여기가 진짜 십팔동인진이 맞는 거요?"
둘은 사형제로 보였다.
"당연하지."
"십팔동인은 어떤 대단한 병장기도 흠 하나 못 낸다고 들었는데."
사제로 보이는 자가 말했다. 그에 최종필과 형제는 무슨 상황인지 확인하고 싶어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 대단한 천강구절도 동인에 흠은 못 냈지."
십팔동인진은 누굴 죽이려고 만든 진법이 아니다. 통과는 당연히 어렵지만, 물러나는 건 쉽다. 덕분에 소림은 동인의 상태를 정기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사형, 여기 동인의 가슴에 이상한 게 있소."
사제의 말을 끝으로 한동안 대화가 단절됐다.
"사형, 이거 설마 말로만 듣던 그거요?"
한참 이어진 침묵을 깬 건 역시 사제였다.
"내가 보기에도 금강인이 맞는 거 같다."
법여대사가 만든 칠십이절기는 크게 삼십육경공三十六硬功과 삼십육연공三十六軟功으로 나뉜다.
경공은 말 그대로 몸을 단단히 단련하는 무공이고, 연공은 몸을 부드럽게 단련하는 무공이다.
이중 경공의 최고봉은 금강인이고, 연공의 최고봉은 연화인蓮花印인데.
연화인을 얻는 방법은 유실된 지 오래서 금강인이 명실상부한 소림 무공의 정점이라고 여겨도 된다.
"빨리 방장 사형께 알려야겠소."
대화를 끝낸 둘이 곧바로 사라졌다.
"진법이 망가진 거 같은데?"
기척이 사라지자 셋은 다시 바닥을 더듬으며 부싯돌을 찾았다.
"십팔동인진이 부술 수 있는 거였소?"
길잡이 형제는 한때 소림의 속가제자가 되려고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 개중엔 십팔동인진에 관한 것도 있었는데, 세상의 어떤 병장기도 흠집 하나 못 낸다고 들었다.
탁탁.
겨우 부싯돌을 찾은 셋은 다급히 횃불을 밝힌 다음 반쯤 달리다시피 십팔동인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장소에 갔다.
"어허!"
원래 형체를 유추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서진 동인이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잔해가 보였고, 그나마 온전한 것들도 최소 팔다리 하나는 사라졌다.
"저기 가슴에 뭐지?"
그나마 온전한 몸통에 횃불을 갖다 대니 이상한 기호 하나가 양각으로 새겨 있었다.
- 작가의말
대영약충大盈若沖 기용불궁其用不窮.
구후영盈 영호충沖.
주인공 이름의 유래입니다.
안타까운 소식 하나 전합니다. 제가 중이염이 발작했습니다. 매년 있던 일이라 여기까진 괜찮은데, 중이염 치료에 쓰는 전신 항생제가 부작용이 있습니다. 심한 경우 연재를 잠시 중단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잠시 쉬더라도 일단 소림 파트는 마무리할 생각인데, 마음대로 될지 모르겠습니다. 약을 먹고 상황을 보며 결정하겠습니다.
덧으로, 물약만 넣으면서 어떻게든 약 안 먹고 버티려 했던 미련한 저 자신에게 전합니다.
병은 초반에 잡아라.
Comment '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