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납백천心納百川
진나라의 원굉袁宏이 자신의 저서 삼국명신서찬三國名臣序贊에서 형기불존形器不存 방촌해납方寸海納이란 말을 했다.
사람의 마음은 모양이 없는 그릇이어서 커다란 바다도 담을 수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형!"
갑자기 들린 뜻밖의 부름에 구후영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시선이 닿은 곳엔 커다란 덩치의 소년과 마찬가지로 보통 덩치가 아닌 붉은 말이 있었다.
"형!"
말과 사람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말은 혀로 머리를 거칠게 핥고, 사람은 뼈를 으스러뜨릴 기세로 꽉 안았다.
"여길 어떻게 왔냐니까?"
구후영의 질문에 자룡이 양팔을 풀고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형. 이 편지는 뭐야?"
자룡이 꺼낸 편지는 다름이 아니고, 구후영이 무당에서 급히 작성한 서신 중 하나였다.
"이건 만일에 대비한 거야."
구후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만일?"
구후영은 자신이 황제의 치료에 실패할 경우, 어쩌면 자룡에게도 화가 미칠지 모름을 자세히 설명했다.
"혹시 너한테까지 죄를 물을 걸 대비해 우리가 더는 형제가 아님을 증명하는 서신이야."
"형, 이건 아니야."
구후영의 설명을 들은 자룡이 눈물을 뚝뚝 떨궜다.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라도 이러면 안 돼. 우린 형제잖아. 위험한 일이 있으면 나더러 도우라고 해야지. 이러는 법이 어딨어."
뜻밖의 질타에 구후영은 정신이 멍해졌다.
'내가 생각이 짧았다.'
구후영의 행동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자룡의 말 역시 옳다.
'모든 일을 혼자 감당하려 했던 난 어쩌면 교만했던 게 아닐까?'
짧게 반성한 구후영은 진솔한 마음으로 자룡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형이 그때 너무 놀라서 실수한 거야."
구후영의 사과에 자룡이 눈물을 닦고 웃음을 지었다.
"이건 옥 장문의 편지야."
구후영이 말 안장에서 전대모검을 끌러 등에 메는 사이, 자룡이 또 다른 서신을 꺼내 건넸다.
구후영은 바로 서신을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네가 성지를 받고 출발한 날, 현영자가 회의를 열어 널 어떻게든 지키기로 했고, 나와 장로 네 명이 순천부에 왔다.
치료가 실패할 경우, 넌 어떻게든 빼내기로 얘기가 됐다. 공현이란 환관을 통해 황후와 황태자한테 뇌물을 꽤 뿌렸다.
구후영은 그제야 왜 황후가 치료에 실패해도 죄를 안 물을 거라고 일찍 천명했는지 진실을 알게 됐다.
'황제의 목숨이 걸린 일도 돈이 먹히는구나.'
기가 막혔지만, 놀랍진 않았다.
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으나 무당을 오래 비울 수 없구나. 자룡은 고집이 너보다 더 세서 남겨두고 떠난다.
내용을 모두 확인한 구후영은 태자와 황후한테 뇌물을 공여한 사실을 공공연히 적은 서신을 손바닥으로 비벼 없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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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쭉 걸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에, 구후영이 갑자기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할머니 허락은 어떻게 구했어?"
"할머니가 먼저 옥 장문이랑 같이 가라고 그러던데?"
자룡의 대답에 구후영은 느끼는 바가 컸다.
'만에 하나 홍엽산장에 화가 떨어지더라도 자룡만큼은 살리려는 생각이셨구나.'
구후영의 편지를 읽고 옥무영한테 자룡을 부탁한 게 분명했다.
'할머니는 나보다 한 발 더 생각하셨어.'
구후영은 자신의 오만과 무지를 한 번 더 자책했다.
'난 편지 몇 장 쓰고 일이 다 해결된 거라고 여겼어. 순진하게도.'
오문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구후영은 기분이 더없이 좋았다.
성지를 받고 바로 최악의 경우를 떠올리며 즉각 대처했던 일, 신한천의 생각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치료법을 고집해 완치를 이뤄낸 일, 위험에 빠진 단아를 도운 일, 인사불성에서 깬 황제한테서 철혈방과 낙화문과 홍엽산장 모두를 지킬 포상을 받아낸 일.
게다가 유근을 죽이는 일 역시 공현의 부탁을 들어주는 거여서 뒤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하나 어려운 선택이었는데, 모두 최상의 결과를 얻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더없이 무거웠다.
'우물에서 나와 못에 이르렀다고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했어.'
강도 있고 호수도 있고 바다도 있는데, 겨우 우물을 벗어났다고 자신이 뭔가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다.
'사제들한테 이기도인 어쩌고 해놓고, 정작 난 늘 타인에게 날 대입했다.'
예전에 사제들한테도 말한 적 있지만, 이기도인은 다른 사람의 결정을 대신하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의 사정을 알고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이해하라는 거지, 자신을 그 자리에 놓고 대신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라는 뜻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옳음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구나. 세상이 이 꼴인 것도 성현의 말씀을 외우기만 하고 누구도 실천할 생각은 안 해서 그런 건데.'
구후영은 생각할수록 아까의 자신이, 어제의 자신이, 지난달의 자신이, 작년의 자신이 부끄러웠다.
'바다는 모든 강물을 받아들인다. 나 역시 넓은 흉금으로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품어야 한다. 그래야 높은 경지를 이루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무인이 절정에 이르면 몸이 알아서 단전을 키운다. 구후영 역시 강호보다 훨씬 치열한 황궁에서 의도치 않게 보고 듣고 느낀 덕분에 마음을 키우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형, 어디 가는 거냐고 묻잖아."
깊은 고민에 빠졌던 구후영은 그제야 자룡의 부름이 들렸다.
"조만간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해친 흉수를 죽이러 갈 거야."
예전이라면 구후영은 자룡을 잘 구슬려서 돌려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숨기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넌 어때? 같이 가고 싶어?"
구후영의 말에 자룡은 고민도 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런데 그게 누군데?"
"그건 천천히 알려줄게. 네가 명심해야 하는 건, 복수는 죽은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살아갈 사람을 위한 거다. 그러니 복수 때문에 자기 안위를 무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자룡한테 하는 당부지만, 동시에 자신한테 하는 경고기도 했다.
"나 실력 괜찮아. 그리고 보의도 입었어."
걱정하는 구후영에게 자룡이 소매를 올려 칠사보의를 자랑했다.
"형 거도 갖고 왔는데."
"난 됐다."
경공이 뛰어난 구후영에겐 칠사보의가 오히려 짐이 된다.
"응. 옥 장문이 형은 필요 없다고 말하며 가져갔어."
옥무영은 이번에도 구후영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어딜 가는데?"
달리고 싶어 안달인 혈총의 고삐를 꽉 당기며 자룡이 질문했다.
"단 소저가 서쪽 성문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어."
"누나가 여기 있어? 그럼 빨리 가자."
형제는 보폭을 크게 해서 서쪽 성문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
"오셨군요."
순천부 서쪽의 성문을 벗어나자마자 단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아는 황궁에 있을 때와 달리 눈마저 가린 면사를 썼는데, 구후영은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누나, 잘 지냈어요?"
단아를 본 자룡이 꾸벅 인사했다.
"소장주도 잘 지냈나요?"
홍엽산장에선 구후영을 대장주, 자룡을 소장주로 불렀다. 단아는 자룡의 인사를 받아준 후, 고개를 돌려 구후영에게 질문했다.
"소장주도 함께 갑니까?"
"네. 그러기로 했습니다. 자룡도 복수할 자격이 충분하니까요."
"잘 부탁해요. 누나."
자룡의 넉살에 단아가 픽 소리 내 웃었다.
"친형제가 분명한데, 같은 구석보다 다른 구석이 많네요."
그때.
"교주. 구후 대협. 우호법을 살려주세요."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울먹이며 달려왔다.
"좌호법. 진정하고 무슨 일인지 차근차근 말해."
단아의 말에 구후영도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날 화산 제자로 오해했던 그 여인이다.'
"우호법의 상세가 발작했습니다."
좌호법의 말에 단아가 경공을 펼쳐 달렸다.
"내 동생의 안내를 부탁하오."
좌호법에게 자룡을 부탁한 구후영이 바로 경공을 펼쳐 단아의 뒤를 쫓았다.
'저긴가?'
경공을 최대한으로 펼친 덕분에 둘은 반 각도 안 걸려 순천부 근교의 야트막한 야산에 도착했다.
거기엔 갓 지은 작은 모옥이 세 개 있었다.
"부탁해요."
오른쪽 모옥 안에 기절한 채 얕은 숨을 가쁘게 쉬는 우호법이 있었다.
"괜찮을 겁니다."
구후영은 경지가 깊어 굳이 진맥하지 않아도 웬만한 사람의 몸에서 기운이 어떻게 흐르는지 느낄 수 있다. 황궁에 있을 때 우호법이 한사코 치료를 거부하자 걱정하는 마음에 기감으로 살핀 적 있는데, 외상이 심할 뿐이지 내상을 입은 흔적은 없었다.
"외공을 익혀 정말 튼튼한데, 이렇게 기절한 거면 작은 일이 아닙니다."
단아의 말에 구후영은 오른손을 우호법의 손목에 대고 왼손으로 목을 잡은 채 자세히 진맥했다.
'난맥亂脈이다.'
사람의 맥은 빠를 수도 있고 느릴 수도 있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뛴다. 그런데 우호법의 맥은 몹시 어지러웠다.
"침진을 해야겠습니다."
기감으론 여전히 문제가 느껴지지 않고, 진맥으로도 딱히 발견한 게 없었다. 구후영은 신한천한테서 배운 침진을 하기로 했다.
"여기 술이 있습니다."
구후영은 침들을 술에 담근 다음, 술통을 잡고 운기했다. 곧 술이 펄펄 끓으며 향긋한 냄새를 풍겼다.
구후영은 끓는 술에서 일곱 개의 침을 꺼내 흔들어 식힌 다음, 우호법의 몸에 꽂고 자세히 진맥했다.
"이상하군요."
침진을 마친 구후영이 말했다.
"혹시 잡혔을 때 폐혈침에 당한 일이 있습니까?"
"그런 얘긴 듣지 못했습니다."
단아가 바로 대답했다.
"몇 개 혈도가 폐혈침에 당한 것처럼 살짝 망가졌습니다."
"혈도가 다쳤다면 그거일 가능성이 있겠군요."
구후영의 말에 단아가 우호법을 가로 눕히고 목덜미 부분을 자세히 살폈다.
"여기 보이죠?"
구후영도 시력을 집중해야 알 정도로 희미한 점 몇 개가 우호법의 목에 있었다.
"날카로운 침 같은 데 찔린 상처로 보입니다."
"우모침牛毛針입니다."
"처음 듣습니다."
"굉장히 만들기 힘든 암기고, 펼치는 건 더 어려우니깐요. 저도 이건 익히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암기입니까?"
"이름처럼 소털 정도로 가늘고 가볍습니다. 이 암기는 너무 얇아 독을 묻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독을 바른 암기보다 악독합니다."
단아가 우호법의 목덜미에 난 상처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모침이 굵은 혈관에 꽂힐 경우, 혈관 속을 파고듭니다."
"그렇군요. 무거운 쪽이 꽂혔을 테니, 혈류에 따라 혈관 속으로 빨려가겠네요."
우모침의 무서운 점이다.
"우모침은 혈관을 따라 돌다가 가는 혈관을 막거나 심장에 머물며 통증을 유발한다고 들었습니다."
"치료법을 압니까?"
"우모침을 뽑아내야 함은 아는데, 치료법은 모릅니다."
단아의 말에 구후영이 눈을 감고 깊이 고민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구후영의 고민은 좌호법과 자룡이 도착한 후에 끝났다.
"뭡니까?"
단아가 간절한 말투로 물었다.
"그러나 몹시 위험한 방법입니다. 솔직히 저도 별 자신이 없습니다."
구후영이 말하기를 주저했다.
"대협, 제발 제 부군을 살려주세요."
좌호법이 구후영에게 무릎을 꿇었다. 너무나 간절해 보이는 모습에 구후영은 망설임을 거두고 자신이 떠올린 치료법을 입 밖으로 뱉었다.
"심장을 잠시 멈춰 혈류를 세운 다음, 공심침으로 우모침을 제거해야 합니다."
- 작가의말
대大장주 - 큰 장주.
소小장주 - 작은 장주.
소少장주 - 장주 후계자.
여기선 2번이지만, 보통 소장주라고 하면 3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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