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검강호刀劍江湖
강호는 무엇인가.
범려는 월왕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멸하고 월나라를 부흥한 후 배를 띄워 강과 호수를 떠다니며 살았다. 이로써 강호는 세상과 동떨어진 숨기 적합한 곳이라는 의미를 얻었다. 세월이 흐르며 조정과 관의 간섭을 덜 받거나 아예 안 받는 곳을 이르는 말이 되기도 했고, 서민들이 사는 세상을 가리키기도 했다. 또한 사람끼리 열심히 부딪치며 치열하게 사는 곳을 강호라 부르기도 하고, 법보다 주먹이 우선인 곳을 뜻하기도 했다.
당금에 이르러서 강호의 구체적인 의미를 누구도 명확히 말하지 못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있었다.
강호는 황실이 정한 법규나 세간의 도덕에 얽매이기보단 특별한 정서에 따라 자기들 나름으로 질서를 만들어 지키는 곳이다.
예를 들어 힘에 따른 질서라든가.
"시원하게 대결로 매듭짓는 게 어떻소?"
장선이 제안했다.
"그전에 철혈방이 우리 측에서 제출한 증인과 증거에 대해 반박을 해야지 않겠습니까?"
배월교주가 답했다.
"내 제자들을 봤다는 건 흑호채주의 일방적인 주장이오. 서신도 필체를 흉내 내어 꾸밀 수 있소. 이 일 자체가 당신들이 꾸며냈을 수 있고, 누군가가 철혈방인 척 행세하여 일부러 사단을 만든 걸지도 모르오."
장선은 잠깐 말을 멈춰 사람들의 주의를 끈 다음 연설을 이어갔다.
"그대들이 준비한 증인과 증거가 이게 다라면 이 일은 오늘 당장 해결 보긴 어렵소. 아무래도 서로 대화하며 사건의 자초지종을 자세히 파야 할 거요. 그런데 이대로 끝내기엔 수많은 강호의 친구들을 불러모은 게 미안하지 않소? 이참에 대결을 펼쳐 원한과 오해를 풀고 힘을 합치는 게 어떻소? 사건의 조사는 이긴 쪽이 주도하는 거로 하고."
장선의 말에 수많은 사람이 호응했다.
"손님 된 도리로 주인의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군요. 장 당주의 제안을 수락합니다."
배월교주의 시원한 대답에 양측 사람들이 동시에 갈채를 보냈다.
"동생. 이게 무슨 짓이지? 왜 갑자기 싸우는 거로 결론이 나는데?"
예상 밖의 진행에 청빈이 뒷머리를 긁었다.
"형님. 이들은 시비를 가리려는 게 아닙니다."
구후영도 처음엔 이들의 행태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머리를 조금 굴리니 개중의 연유를 어렵지 않게 추측했다.
"무슨 소리야? 시비를 가리려는 게 아니면 왜 증인과 증거를 모은 건데? 그리고 이리 많은 사람을 부른 저의는 또 뭐야?"
"잘 생각해보세요. 복장표국과 배월교가 원하는 게 뭘까요?"
"글쎄다."
청빈의 강호는 별로 복잡하지 않았다.
"복장표국과 배월교는 시월 말에 시작하는 표행을 순조롭게 마치는 게 급선무입니다. 철혈방이 진짜 주모자든 아니면 누군가가 철혈방에 누명을 씌우는 거든, 이렇게 한 번 난리를 피우면 올해 표행은 많이 안전해집니다."
"옳구나. 철혈방이 꾸민 일이면 제 발이 저려 자중할 거고, 다른 자가 누명을 씌우려 했던 거면 철혈방도 어떻게든 찾아내서 응징하려 하겠구나."
청빈은 글을 많이 익히지 못했고 사부와 사형제 그리고 의뢰 대상만 있는 작은 세상에 살았지만, 머리는 둔하지 않다. 철혈방과 복장표국 등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해 처음엔 오리무중이었지만, 구후영이 물꼬를 틀어주자 사건의 경위를 쉽게 이해했다.
"게다가 복장표국 입장에선 철혈방의 제안을 절대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건 또 왜 그렇지?"
"얕보이면 안 되니깐요. 강호에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웃어야 삽니다. 무릎 꿇고 목숨을 구걸하면 살아도 산 게 아니게 됩니다."
대결을 피하면 비겁자로 낙인찍힌다.
그걸 알기에 복장표국이 어떻게 나오든 철혈방은 무조건 대결을 제안했을 것이고, 아무리 확실한 증거가 있더라도 복장표국은 대결을 거부하지 못했다.
"이게 바로 강호입니다. 옳고 그름도 중요하지만, 결국엔 힘입니다."
"난 이런 강호가 싫구나."
청빈은 구후영이 말한 강호가 마음에 안 들었다.
"법과 도덕을 따질 거면 모든 일을 관부에 맡기고 시시비비는 선비한테 가려달라고 했겠죠. 강호는 태생이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청빈이 구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이 있지. 이런 강호가 싫으면 내가 떠나야지, 불평만 해서는 별 소용이 없겠구나."
청빈의 말에 구후영도 마음이 움직였다.
'자룡을 찾고 낙화문의 기반을 단단히 다지면 나도 강호를 떠나고 싶다.'
"철혈방의 속셈은 뭐지? 이긴다고 사실이 바뀌는 게 아니잖아."
"대결을 이겨 주도권을 갖는 것입니다. 철혈방의 인물이 꾸민 일이든 누군가의 음모든 당하지 않으려면 철혈방이 주도권을 꽉 잡아야 합니다."
"철혈방 사람이 저지른 짓이어도?"
"그럼요. 그래야 적당한 배상과 사과로 잘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주도권을 상대가 잡으면 크게 털릴지도 모릅니다."
"복장표국도 이런 전개를 당연히 예상했을 테니 대결을 위해 뭔가를 준비했겠지?"
둘이 대화하는 사이, 장선과 온휴가 대결 방식을 상의하여 정했다.
양측은 총 세 번의 대결을 펼쳐 승패를 가르기로 했다.
"동생, 대결 방식엔 또 무슨 학문이 있어?"
구후영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 구후영도 책을 많이 읽고 머리가 총명하여 사실관계를 빨리 파악했을 뿐이지 강호 경험이 풍부한 건 아니다. 그런데 청빈의 기대 가득한 질문에 모른다고 대답할 수도 없어 머리에서 김이 날 지경이었다.
"제 생각인데."
구후영은 깊이 고민하고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대결이 늘면 고수가 많은 철혈방 쪽이 우세일 것 같습니다. 세 판으로 정한 건 철혈방이 손님인 복장표국 측을 배려한 듯합니다."
구후영이 보기엔 복장표국 측에 고수가 적다. 배월교는 교주 말고 딱히 빼어난 자가 보이지 않았고, 복장표국은 대단한 고수가 없다.
반면, 철혈방은 호북의 패주로 불리던 문파다. 양양이 근거지기도 하니 원하는 대로 고수를 차출할 수 있다.
"그러니까 철혈방이 보기엔 배월교 측에 고수가 별로 없으니 선심 쓰는 척 세 판만 대결하는 거로 정했다는 거지?"
구후영은 사실관계를 정학히 파악했으나 철혈방의 속셈까지는 염두에 두지 못했다.
풍불지의 평가처럼 천품이 후해서 야박한 생각을 잘 못 떠올리는 탓이다.
'모든 행보에 노림수가 있어.'
다섯 판으로 하면 필승인 철혈방이지만, 상대의 전력을 가늠하고 세 판으로 양보하는 거로 아량을 보였다.
양보로 밑밥을 깔았기에 복장표국 측에서도 안면을 몰수하고 핍박하기 어렵다. 만에 하나 철혈방이 대결에서 지더라도 말이다.
'양측 모두 진실을 가리기보단 이기는 데 집착하는구나.'
구후영이 강호의 비틀어짐에 속으로 한탄하던 그때.
"첫 대결은 저와 장 당주가 하는 게 어떻습니까?"
배월교주가 호수에 커다란 돌을 던졌다.
사실 복장표국의 청첩을 받고 도우러 온 자들도 대부분 배월교라는 문파를 오늘 처음 알았다. 철혈방을 도우러 온 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어, 아무리 교주라지만 어려 보이는 여인이 장 당주에게 도전하는 걸 양측 모두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젠장. 선수를 뺏겼구나.'
장선이 속으로 땅을 치며 후회했다.
이겨도 광채롭지 못하고, 지기라도 하면 남은 두 대결을 모두 철혈방이 가져오더라도 코가 꿰인다.
"혹시 장 당주보다 더 고수인 분이 따로 계신가요?"
그러나 배월교주의 도발에 장선에겐 더 고민할 여지가 사라졌다.
"나는 철혈방 서열 삼위인 철추당의 당주일 뿐이고 그대는 한 무리를 이끄는 수장이요. 신분 차이가 현격하여 내가 나서는 게 맞는지 고민되었으나, 거절하는 것도 불경인 것 같소. 미천한 재주로 상대할 테니 교주께서 손속에 사정을 두시기 바라오."
장선은 자신을 한껏 낮추는 거로 퇴로를 확보했다. 이겼을 때 아녀자를 상대로 쉽게 승리했다는 박한 평을 덜 들을 수 있고, 혹여 지더라도 철혈방에 타격이 덜 오도록 최대한 애썼다.
"장 당주의 여의권如意拳은 중원에 모르는 자가 없으니 겸손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솔선수범해야 하는 교주라는 감투 때문에 이제 벽옥碧玉(열여섯)에 이른 아녀자가 감히 장 당주와 손을 섞으려 했으니 솜씨가 하찮다고 비웃지 마시기 바랍니다."
장선은 얼굴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으나 속은 황련탕을 먹은 것처럼 쓰렸다. 만일을 대비해 한껏 자신을 낮췄는데 상대가 더 낮춰버리니 절대 져서는 안 되며, 그저 이겨도 문제다.
장선으로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인정할 정도로 상대 체면을 지켜주는 동시에 어떠한 잡음도 없도록 확실히 이겨야 한다.
"재밌구나. 대결을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싸움이 시작됐구나."
청빈이 흥분해서 말했다. 자객으로 키워지며 상대가 방심하는 틈을 타 얍삽하게 끝장내거나 기세로 압도해서 반격할 엄두도 못 내게 하여 확실하게 죽이는 것만 배웠기에 고수의 대결을 보는 일은 처음이었다.
"평소 보기 힘든 대단한 무공들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대가 큰 건 구후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방선생은 구후영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유명한 고수였다. 그러나 구후영이 본 건 독을 이용한 비열한 수법뿐이었고, 다시 만났을 땐 다리 둘에 팔 하나 없는 가련한 모습이었다.
백화궁 자매와 신검 풍불지의 대결 역시 너무 순식간에 끝났다. 서로 함정을 판 머리싸움은 대단했지만, 싸움 과정은 간단해도 너무 간단했다. 더구나 너무 높은 경지의 대결이어서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도 싸움을 구경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여의권으로 유명한 장 당주와 탄주해혈의 대단한 경지를 선보인 배월교주의 대결이 무척이나 기대됐다.
"그럼 대결의 중재인仲裁人으로 홍엽산장의 대부인을 모시겠습니다."
모든 대결이 깔끔하게 승패가 갈리는 건 아니다. 그럴 경우를 대비하여 중재인을 두는데, 중재인은 무공이 대단하거나 명망이 높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홍엽산장은 구후긍의 의거義擧로 대대로 호북 무림의 숭앙을 받았고 흉년이 들거나 수재가 발생하면 늘 식량을 풀어 난민을 구제해 양양 백성들의 우러름도 받았다.
명망만 봐도 중재인의 자격이 차고 넘쳤다.
"네 할머니인지도 몰라."
청빈의 속삭임에 구후영은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환갑 정도 나이로 보이는 대부인은 복스러운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한가득 피었다. 비록 지팡이를 짚었지만, 허리가 꼿꼿하고 발걸음도 경쾌했다.
대부인이 나타나자 철혈방 쪽 사람들이 분분히 일어나 포권으로 예를 올렸다.
"배월교의 후배가 홍엽산장 대부인께 예를 올립니다. 여중호걸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더니 백문이 불여일견이군요. 장 당주 편을 들지 않겠냐고 잠깐 의심했던 소녀가 부끄럽사옵니다."
장선과 배월교주의 기 싸움이 재발했다.
"교주께서 과려過慮했소. 대부인의 손주가 짝을 찾는 시기여서 묘령의 여인만 보면 호감을 느낀다오. 평수만 이뤄도 그대의 승리를 선언할 것이니 부담을 덜고 대결에 임하길 바라오."
"장선 이놈. 영이 사부라고 오냐오냐했더니 이게 무슨 추태냐. 강호에선 노인과 아이와 여인을 가장 조심하라는 말도 있거늘. 철혈방의 위신이 달린 대결에 임하면 최선을 다할 생각을 품어야지. 어디서 잡스럽게 머리를 굴리느냐."
불호령이 떨어졌다.
- 작가의말
월왕 구천은 다름 아닌 와신상담의 주인공입니다. 곰 쓸개를 맛보며 망국의 고통을 매일 되새긴 인물이죠.
범려는 구천의 재상으로, 오나라와 벌인 싸움에서 지고 신하국이 된 월나라를 잘 추슬러 복수한 주역입니다. 오나라의 왕 부차가 국사를 제대로 못 돌보게 자신의 애인인 서시를 첩으로 보낸 독한 놈이고, 오나라를 이기자 구천이 자신을 토사구팽할 걸 알고 바로 도망친 약삭빠른 놈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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