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同床異夢
군대는 국가의 존망과 밀접히 관련한 조직인만큼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 탓에 밤엔 봉화를 피우고 낮엔 짐승 똥을 태워 곧은 연기를 내는 이천 년 전 주나라 시절의 방법이 명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사용되었다.
"다들 오랜만이오."
네 사내가 다시 모인 건, 명의 동쪽 변경을 연일 밝히던 봉화가 드디어 꺼진 이튿날이었다.
"생각보다 효과가 좋지 않소."
원하는 바를 모두 이뤘지만, 궁려 안의 네 사내 모두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러게 말이오."
순천부 주변엔 주둔군이 이십만이나 있었다. 그런데 조정은 구문구를 통해 쏟아 들어온 삼십만에 가까운 북원 군대를 상대로 고작 화기영火器營 둘, 이들을 보호할 기마영 둘과 보병영 여섯만 지원했고.
심지어 화기영의 이천 명 병사 중 천팔백 명은 홍이대포紅夷大炮를 운반하는 역할이었다.
"편제만 제대로 했어도 훨씬 나은 효과를 보았을 텐데."
홍이대포는 포신 길이가 일 장에 가깝고, 철과 동으로 단조했다. 덕분에 옮기기가 어려워 공성전에서나 위력을 발휘하지, 기마병을 상대하는 야전에선 별 쓸모가 없다는 게 상식이었다.
그런데 홍이대포는 이러한 단점을 무시해도 좋은 정도로 커다란 장점이 있었다. 바로 포신이 짧아 위력만 강했던 명나라의 대포와 비교해 명중률이 높고 사거리도 훨씬 멀다는 것이었다.
이에 화기영은 중요한 거점마다 홍이대포 하나씩 안치한 다음, 육 리가 넘은 사거리와 높은 명중률을 이용해 침입군의 수뇌부를 제거했다.
정식으로 군 편제를 하지 않은 북원의 오합지졸은 부족의 우두머리가 죽고 우왕좌왕하다가 명나라 기병한테 소멸당하지 않으면 약탈한 식량을 들고 장성 밖으로 도주했다.
"이 정도도 다행으로 아시오."
예상에 못 미쳤지만, 아주 망한 건 아니었다.
"뼈다귀도 못 주는 주제에 어떻게 개들 보고 꼬리를 흔들라고 하겠소."
이십만이나 되는 기마병을 수족처럼 부리려면 뭔가 내줘야 하는데, 구레나룻에겐 그만한 재물이 없었다.
"그나마 유근의 목숨을 살려둔 건 목적대로 됐소."
"혼란이 생각보다 빠르게 잠들어 황궁의 일 역시 서둘러야 하오."
만일에 대비한 군대 이동이 꽤 있어 장성을 공격하는 북원 다른 부족의 인명 손실을 낮추려는 목적도 어느 정도 이뤘다.
그러나 구문구로 들어간 부대가 생각보다 빨리 패퇴한 탓에 원하는 만큼 시간을 벌진 못했다.
"새로운 안건이 있소."
듣기만 하던 연 선생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황궁보다 더 중요한 사안이 뭐요?"
"구후영이란 자를 제거해야겠소."
뜻밖의 발언에 궁려 안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천마의 제자로 의심받는 그자를 말하는 거요?"
마교 사내가 침묵을 깨고 질문했다.
"천마완 무관하오. 여섯 살 때 대동부에 나타나서 신한천의 제자가 되었고, 열 살에 낙화문에 가서 무공에 입문했소. 열여섯 살까지 쭉 낙화문에서 지낸 걸 이미 확인했소."
"그럼 됐소."
마교 사내는 괜히 제자를 죽이면 사라진 천마가 다시 모습을 드러낼까 봐 걱정이었는데, 연 선생이 아니라고 하자 시름이 푹 놓였다.
"제거할 수 있겠소? 현현자와 내공 대결을 벌이고도 무사했던 놈인데."
"호 선생한테 무형지독無形之毒이 있다고 들었소."
연 선생이 말했다.
"다들 오해하는 게 있는데, 무형지독은 들킬 염려가 없어서 대단한 거지 독성 자체는 그리 특출나지 않소. 구후영이란 자가 백독불침을 이뤘다고 하니 무형지독은 별 쓸모가 없을 거요."
말을 하던 호 선생은 문득 의심이 들었다.
'연 선생이 내 대답을 몰랐을까?'
"독이 안 되면 마교의 고수를 보내는 건 어떻소?"
구레나룻이 말했다.
"무력으론 불가하오. 현재 무당 장로 사십칠 명이 낙화문에 있소."
연 선생의 말에 마교 사내가 깜짝 놀랐다.
"무슨 소리요? 무당 장로들이 왜 거기 있단 말이오?"
"명교의 행사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그럼 무당 장로 대부분이 무당산을 떠나 산서에 간 이유가 도대체 뭐요?"
"태극혜검의 해독이오. 아무래도 무당 장로들은 구후영이란 자가 현현자와 같은 걸 깨달았다고 믿는 것 같소."
"그런데."
구레나룻이 둘의 대화를 끊었다.
"연 선생은 왜 굳이 구후영이란 자를 제거하려는 것이오?"
"이유가 여러 개 있소. 우선, 그자는 무당과 철혈방을 연결하는 끈이오. 그 끈이 사라지면 무당과 철혈방의 사이는 예전처럼 될 거요."
"호북 쪽은 미련을 버리기로 한 거 아니오?"
"이유가 여러 개 있다고 하지 않았소."
연 선생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낙화문과 화산 검종의 일도 다들 알 거요. 화산 검종은 사실상 낙화문 제자들이 화산에 들어간 거요."
"구후영이 우리 일을 방해할 수도 있단 말이오?"
마교 사내가 눈에 힘주며 질문했다.
"구후영 혼자면야 딱히 걱정할 일이 아니지만, 마침 무당 장로들이 낙화문에 있소."
"구후영을 죽여 없애는 데 동의하오."
마교 사내가 단호하게 입장을 밝혔다.
"나도 찬성하겠소."
넷 중에 마음이 제일 안 맞는 한 쌍을 뽑으라면 당연히 마교와 북원이다. 그러나 이번엔 둘의 이해가 일치했다.
마교의 행사가 북원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미 셋이 동의한 마당에 내 의견은 필요 없겠군. 그나저나, 독도 안 되고 무력도 안 되고 황실 힘을 빌리는 것도 불가하니 연 선생의 묘책이 궁금하오."
"칠살문."
"칠살문이 사람 죽이는 쪽으론 웬만한 절정의 고수보다 나은 건 인정하는데, 구후영 정도의 고수를 죽이는 건 무리일 것 같소."
마교 사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연 선생이 호 선생을 향해 말했다.
"칠살문이 무당의 해검지에서 구후영의 보검을 얻었다고 들었소."
그에 호 선생이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자는 어떻게 그 일을 알았지?'
"그 검으로 소림 고수를 죽이는 거요."
"죄를 구후영에게 뒤집어씌우자는 거요? 소림 고수가 죽을 때 그자가 다른 데 있으면 어쩔 거요?"
마교 사내의 말에 연 선생이 호언장담했다.
"그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하겠소."
연 선생은 세 사내의 반응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자 잠깐 고민하고 말을 이었다.
"이 계획엔 부수적인 효과가 여럿 있소. 일이 터지면 구후영은 당연히 검을 분실했다고 할 거고, 그렇게 되면 무당 역시 이 일에 말려들게 되오."
호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게 되겠군. 요새 무당의 명성이 강호를 진동해 소림의 심기가 한껏 불편하니까 말이오."
"소림도 확실한 증거 없이 무당을 어떻게 할 수 없음은 알지만, 이 기회에 어떻게든 무당과 강호에 소림이 왜 소림인지 알리려고 할 거요. 그리고."
연 선생이 마교 사내에게 눈길을 줬다.
"소림과 무당이 힘겨룸할 때 명교가 거사하면 실수할 걱정이 없지 않겠소?"
그에 마교 사내가 어색한 얼굴이 되었다.
"아직 마음이 하나로 모이지 않아 계획대로 움직여줄지 장담할 수 없소."
"맨날 우릴 웃더니, 꼴 좋구나."
구레나룻이 끝내 못 참고 마교를 비웃었다.
"연 선생은 거사 시기를 언제로 생각하시오? 명교의 거사를 그 시기에 맞추도록 지금부터 조율하겠소."
마교 사내는 구레나룻을 무시하고 연 선생과 대화했다.
"나도 아직 확실치 않소. 날짜가 정해지면 가장 먼저 명교에 알리겠소."
진행을 지켜보던 호 선생의 머리엔 수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마교는 중원으로 돌아가고 싶고, 북원도 다시 중원을 차지하고 싶다. 호 선생 본인은 명 황실을 전복하는 게 목표다.
문제는 연 선생의 목적이 뭔지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건 구후영이란 자는 그저 핑계라는 것이다.'
구후영을 죽이려고 이러한 계책을 짠 게 아니라, 자신의 계책에 꼭 부합하는 사람을 찾았는데 그게 구후영이었던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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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보자고 한 이유가 뭐요?"
흩어지고 반나절 만에 셋만 다시 모였다.
"두 분은 혹시 선대로부터 천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소?"
호 선생의 질문에 마교 사내와 구레나룻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의 협력은 예전부터 이어졌소. 당시 백련교의 흑 장로와 당신의 삼촌, 내 사부와 연 선생이 장삼풍의 죽음에 맞춰 거사하려 했소."
"뭐라도 했으면 우리가 전혀 몰랐을 리 없을 테니, 시작도 전에 실패한 거요?"
"그렇소."
호 선생이 한숨을 푹 쉬었다.
"천마라는 자가 갑자기 나타났는데, 이상하게 가는 곳마다 우리 행사를 방해했소."
"뭐가 이상하다는 거요?"
"당시 계획을 아는 사람은 위에 언급한 넷뿐이오. 그런데 천마는 종남과 소림과 무당에 가서 계획을 방해했고, 내각대학사랑 대담해서 내상을 입혔소."
"대화로 말이오?"
"더 놀라운 건, 내각대학사가 무공은커녕 토납법조차 익히지 않았다는 거요."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자를 그저 말로 내상을 입혔다는 기상천외한 얘기에 평소 천마를 대단하게 여기던 마교 사내도 제대로 놀랐다.
"내각대학사는 우리 사람이었고, 당시 계획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이었소. 거듭된 방해에 연 선생은 물론이고 내 사부도 가능한 역량을 전부 동원해 조사했으나, 이 모든 게 우연이라는 결론을 얻었소."
"아니."
구레나룻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말하고자 하는 게 뭐요?"
"마저 들으시오."
호 선생이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온갖 수단을 써봤지만, 어떤 방법으로도 제거하기 힘듦을 인정한 우린 서창의 무림말살지계를 천마한테 알렸소. 예상대로 천마는 명교로 갔고, 교주가 되었소. 그때부터 우린 천마가 사라지길 기다렸소."
말을 마친 호 선생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뗐다.
"구후영을 죽여야겠소."
"아까 연 선생이 이미 말했잖소."
"구후영이란 자의 행보를 보면 천마가 떠오르오. 연 선생의 방법이 꼭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으니, 차도살인 말고 우리가 직접 칼을 들어야 하오."
"그럼 아까 바로 말하지 그랬소?"
"연 선생은 다른 꿍꿍이가 있소. 구후영을 진짜 제거할 생각이면 왜 무당과 소림을 끌어들여 일을 복잡하게 만드냔 말이오."
"호 선생은 꿍꿍이가 없고?"
구레나룻이 불쑥 말했다.
"난 명 황실을 없애는 것만 염두에 두고 있소. 내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다른 숨긴 목적이 있다고 여겨도 좋소. 그런데, 연 선생이 뭘 원하는지 아는 사람 있소?"
마교 사내와 구레나룻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내년에 유근이 산해관으로 가면 구후영이란 자도 따라갈 거요. 그때 어떤 수단을 쓰든 그자를 죽여야 하오."
"호 선생이 식량만 넉넉하게 지원하면 수천 규모의 군대도 동원할 수 있소."
"좋소. 명교는 어떻소?"
"우리도 최대한 고수를 차출해 보겠소."
셋은 손바닥을 부딪쳐 약속이 이뤄졌음을 표시한 후, 바로 흩어졌다.
이윽고.
세 사내가 사라진 자리에서 땅이 움찔거리며 흙투성이의 사내 한 명이 기어 나왔다.
"사부보다 훨씬 읽기 쉬운 놈이네."
땅속에서 나온 사내는 다름 아닌 연 선생이었다.
"서둘러야겠구나. 그놈은 너희 손에 죽기 전에 내 계획에서 쓸모를 다해야 한다."
제자리에서 한참 중얼거린 연 선생이 결연한 얼굴로 경공을 펼쳐 남쪽으로 달렸다.
스아.
비릿한 칼바람이 연 선생의 자취를 더듬어 남쪽으로 불어갔다.
- 작가의말
3부 풍운강호를 시작합니다. 먼저 그간 믿고 기다려주신 모든 분께 감사를 표합니다.
동시에 안타까운 얘기를 전해야 하는데, 마음 같아선 이대로 완결까지 쭉 달리고 싶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네요. 빈혈로 집중력을 오래 유지하는 게 힘들고, 의욕 저하도 심합니다.
그래도 최대한 끊지 않고 연재하려고 노력할 생각입니다. 하는 데까지 해 보고 정 어려우면 그때 잠깐 쉬었다 가겠습니다.
제가 확실히 약속드릴 수 있는 건, 완결과 최선입니다. 최선을 다해 올해 안으로 꼭 완결 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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