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당관一夫當關
일촌장一寸長 일촌강一寸强
무기는 길어질수록 힘이 실리고,
일촌단一寸短 일촌험一寸險
짧아질수록 아슬아슬하다.
만병지왕은 창이다. 단조술이 발달하면서 검이 흔해진 바람에 창의 위치가 가끔 위태롭긴 했지만, 무기를 든 사람 말고 단순히 무기만 봤을 땐 여전히 창이 강하다.
그런 창을 이기는 게 비수 같은 단병短兵이다. 공격 반경이 커도 너무 큰 창이라 단병을 든 자한테 접근을 허용하는 순간 공격도 수비도 끝이다.
그러나.
"가시가 세다."
어떤 상식이든 상대에 따라 예외가 생기는 법이다.
"일단 물러나."
원나라 때 일 척 이상의 쇠붙이는 무기로 분류해 소지한 자는 곤장을 때렸다. 일반 백성은 무기를 공짜로 줘도 길가에 버릴 정도였다.
염선방은 아니다. 소금을 몰래 파는 일은 들키면 가족까지 죽는 중죄다. 그렇다고 대놓고 무장할 수는 없어서 비수나 아미자峨嵋刺 같은 짧은 무기를 애용했다.
덕분에 도끼나 귀두도 같은 중병重兵을 많이 쓰는 백련교나 팽당과 달리 더 많은 사람이 동시에 덤빌 수 있었다.
그럼에도 구후영은 여전히 옷깃 하나 내주지 않았다.
무기에 독을 발라서 한결 성가신 상대인데, 구후영에겐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다행이다.'
막불위는 처음부터 어느 정도 싸우다가 옥녀봉을 떠날 계획이었으나, 지금처럼 칠십이 넘은 큰 규모로 떠날 생각은 아니었다.
'계획이 아예 빗나가진 않았다.'
구후영은 강한 기세를 타고났다.
다른 무인은 강해지고 경지가 오르며 기세를 발산하려고 애쓰는데, 구후영은 오히려 기세를 다스리는 게 우선일 정도였다.
그런 구후영이 수많은 죽음을 마주하며 살기가 제대로 일었다.
'어쩔 수 없지. 커다란 변수인 걸 알면서도 끌어들이기로 한 거니까.'
전대모겁에 피를 묻힐수록 구후영의 살기가 점점 강해졌다. 그대로 가면 구후영 혼자서 마교 무리를 다 죽일지도 모르는 상황이 됐다.
그런 진행을 원했던 게 아니기에 막불위는 예상보다 빠르게 옥녀봉을 탈출하기로 했고, 임기응변으로 불을 질렀다.
화산 검종이야 한 명이라도 더 살리고 싶어 반대할 리 없었고, 옥무영 역시 구후영의 상태가 걱정되던 터라 선뜻 동의했다.
'예상보다 훨씬 강해서 다행이다.'
계산이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구후영 때문에 원했던 대로 진행되지 않고 난장판이 될뻔했는데, 마찬가지로 구후영이 상상한 것 이상의 강함과 기지를 보인 덕분에 칠십이 넘은 무리를 이끌고 옥녀봉을 순조롭게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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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이요?"
염선방의 뒤를 이어 등장한 쌍쇄방雙瑣幇과 천산파天山派 역시 구후영을 상대로 무력하게 물러났다.
그렇게 다섯 세력을 합쳐 천이 넘은 무리가 됐는데도 용전향은 아직 약속을 어길 생각이 없었다.
"이대로 보고만 있을 거요?"
약속을 파기하고 그냥 덮치자는 요청에 용전향이 망설였다.
'지금 덮치는 게 맞을까?'
용전향은 이대정이 눈치챈 첫 속셈과 직접 입으로 말한 두 번째 속셈 다음으로 세 번째 속셈도 있었다.
모든 세력이 모이면 천 오백이 넘는다. 그렇게 될 리 만무하지만, 단순한 계산으로 구후영이 아군 한 명 죽을 때마다 마교 무인을 열 명 죽인다고 쳐도 팔백 명이 남는다.
백만은 몰라도 육십만은 되는, 천산의 벽지에서 고생하는 교도들을 생각하면 이만한 희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문제는 머리론 지금 덮쳐도 이긴다고 판단했지만, 마음이 그러한 결론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아직 기회가 남았다.'
망설임과 고뇌 끝에 용전향은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곤륜이 저자를 잡을지도 모르잖소."
"여기처럼 도망치기 어려운 곳에서 상대해야지. 마침 포위도 했겠다."
현재 백련교와 팽당과 염선방이 뒤에 있고, 쌍쇄방과 천산파는 구후영 앞에 있다. 앞에서 구후영을 견제하고 뒤에서 덮치면 반 각도 안 걸려 화산과 종남의 무리를 쓸어버릴 수 있다.
"기회가 없는 것도 아닌데, 희생을 줄이는 게 좋지 않겠소? 곤륜이라면 저자를 어떻게 할지도 모르잖소."
이들이 말하는 곤륜은 곤륜파가 아니다.
곤륜산은 길이가 육천 리나 되는 거대한 산맥으로 곤륜파 말고도 오십 개가 넘은 문파가 있다.
개중 곤륜파와 토번 대소궁大昭宮과 척지는 바람에 천산으로 도망친 자들이 모인 무리를 곤륜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독과 암기를 능숙히 다루는 건 물론이고, 평범한 상상력으론 절대 떠올리지 못할 온갖 기괴한 무공을 익혔다.
중원에서 마교의 무공을 마공이라고 비하하고 비난하지만, 마교에서 곤륜이라고 부르는 무리가 익힌 무공이야말로 사마외도란 말이 어울린다.
그런데.
"곤륜이 철수했다고 합니다."
소식을 전하라고 보낸 제자가 돌아와서 보고했다.
"그놈들이?"
곤륜의 무리 중 반 이상은 곤륜파나 대소궁에서 이를 가는 자들이다. 토번 무인의 구 할 이상이 대소궁 출신이고 곤륜파 역시 옛날 같지 않으나 영향력이 여전한 걸 생각하면, 중원에서도 반길 리 없는 곤륜의 무리가 몸담을 곳은 천산밖에 없다.
대소궁과 곤륜파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은 마교의 영역뿐이니까.
"달리 갈 데도 없는 놈들이?"
용전향 곁에 있던 이대정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흑철의 짓이겠지."
염선방 방주 오구진이 말했다.
"그놈이 곤륜파 출신에 대소궁에도 몸 담은 적 있잖은가. 그놈이라면 어르든 달래든 곤륜의 무리를 자기 입맛대로 움직일 수 있을 거야."
실제로 확인된 건 아니나 흑철이 곤륜파 출신에 대소궁에서도 무공을 배웠다는 소문이 마교에 자자하다.
"흑철이 왜?"
용전향이야 어느 정도 짐작하지만, 이대정을 비롯해 늦게 합류한 자들은 아는 바가 전혀 없다.
"내가 그것까진 어떻게 알아? 흑 장로께서 뭔가 언질을 줬는지도 모르잖아."
오구진은 생각 없이 말했지만, 듣는 용전향은 전신의 혈맥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흑철이 강석을 공격한 게 흑 장로 지시라고 우기면 그만이다.'
혈포규찰대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자 용전향은 구후영 일행에 대한 살의를 다시 키웠다.
'교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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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잠시 쉴까 하는데, 괜찮겠소?"
용전향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구후영이 갑자기 몸을 돌려 말했다.
"그러시오."
용전향은 전형적인 가죽만 웃고 안에 살은 그대로인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구후영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나는 잠깐 다녀올 데가 있으니 다들 쉬면서 기다리시오."
말을 마치기 바쁘게 구후영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에 화산과 종남의 제자들은 쉴 엄두도 못 내고 병장기를 으스러지도록 쥔 채 마교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무슨 꿍꿍이지?'
그렇게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구후영이 편액 하나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히 불타지 않았소."
구후영이 들고 온 건 서악화산西岳華山 네 글자를 새긴 편액이었다.
'그 짧은 사이에 저기까지 다녀왔다고?'
자꾸 약속을 깨자고 용전향을 재촉하던 자들이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경공 하나는 천마보다 낫군.'
천마는 경공도 꽤 출중하지만, 다른 무공과 비교해 많이 처지는 편이다. 오죽하면 본인 입으로 천하에서 경공이 가장 뛰어난 건 신검이라고 인정했을까.
'저자가 마음먹고 도주하면.'
"내가 누군지 다들 알 거고, 당신들이 어디 사는지 나도 아오. 그러니 괜히 무고한 사람들 목숨까지 내걸고 이상한 짓 안 했으면 좋겠소."
그에 옥무영이 적절히 나섰다.
"난 신검의 유일한 제자인 옥무영이라고 하오. 우리 풍옥문은 일인전승이라, 내가 죽으면 사부가 무척이나 슬플 거요."
"명교가 신검 따위를 두려워할 것 같으냐?"
누군가가 짜증을 잔뜩 섞어 외쳤다.
"그럴 리가. 사부라면 홧김에 이삼백 명을 죽인 다음 이미 죽은 놈이 살아오지도 못할 텐데 이게 뭔 짓이냐면서 손을 거두겠지."
옥무영이 태연한 얼굴로 받아쳤다.
"그러곤 친우를 찾아 술로 아픈 속을 달래려 할 거요. 참고로 내 사부는 두루두루 친한데, 친우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신창과 천강구절뿐이오."
일부당관一夫當關 만부막개萬夫莫開라는 말이 있다.
혼자서 길목을 막으면 일만이 와도 열지 못한다는 말인데, 이는 지형의 이로움을 칭찬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용맹이 뛰어난 자를 칭송하는 말이 되었는데, 천강구절, 신검, 신창 등이 일부당관에 해당한다.
그리고 현재.
구후영이 보여준 기상천외한 점혈 수법이나 경공 그리고 마르지 않는 체력과 내공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일부당관이란 표현에 어울리는 무인이다.
"이런 치욕을 이대로 참을 거요?"
천산파의 대제자 흑발백미黑髮白眉가 재촉했다. 태어날 때부터 눈썹이 하얀 덕분에 얻은 별호인데, 서역인의 피가 섞였다는 소문이 있다.
"좌우호법이 저자한테 당했네."
용전향이 말했다.
"첫 대면에 당했지. 허우대는 내공이 전부 사라졌고 허좌대는 단전을 잃었네."
"그럼 저자를 무시하고 다 죽이면 되는 거 아니오?"
흑발백미가 말했다.
"저자도 가족이 있고 친우가 있다면서. 그럼 함부로 우릴 치지 못할 거요."
마교가 먼저 구후영의 가족을 건드리지 않는 한, 구후영도 마교를 어찌하기 힘들다. 구후영이 마교에 한 협박은 반대로 구후영한테도 적용된다.
"우리가 여길 누굴 죽이자고 온 게 아니잖소."
이들의 목적은 장성의 관문을 열어 북원의 기병을 안으로 들이는 거고, 화산을 치는 건 이러한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수단을 이루고 목적에 실패하면 그야말로 허무한 일이다.
"어차피 여기서도 구후영을 잡을 수 없소. 그러니 좀 더 상황을 지켜보며 판단해도 괜찮을 듯하오."
용전향의 말에 각 세력의 우두머리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큼 쉬었으면 그만 움직여도 될 것 같은데."
대화를 마친 용전향이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안 그래도 그럴 작정이었소."
마찬가지로 막불위와 대화를 마친 구후영이 담담한 말투로 대꾸했다.
"싸울 게 아니라면 차라리 길을 시원하게 내주는 게 어떻소?"
구후영의 말에 용전향과 각 세력 우두머리들 사이에서 눈빛이 오갔다.
"천산은 밑으로 쭉 내려가."
"쌍쇄방도 밑으로 간다."
여기서 시간을 끈다고 마교한테도 딱히 도움 되는 게 없다. 더구나 지금은 앞뒤로만 공격할 수 있는 지형이라 마교에 불리하다.
구후영이 한쪽을 막고 막불위와 종남칠검이 다른 쪽을 막고, 옥무영을 비롯한 멀쩡한 자들이 앞뒤로 지원하면 훨씬 큰 희생을 치를지도 모른다.
어차피 구후영을 잡을 확신이 없는 마교 입장에선 차라리 옥녀봉 밑으로 내려가 넓은 곳에서 싸우는 게 백 배는 유리하다.
'저들도 모르진 않을 텐데.'
문제는 구후영 등도 이러한 상황을 모를 리 없다는 거다. 그런데도 태연하게 걸음을 옮기는 게 분명히 뭔가 계획이 있는 듯했다.
'난 늘 이래.'
용전향은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추진했다. 그런데 지금 일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자 커다란 압박감을 느끼며 망설임이 늘고 자꾸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마교에 나보다 나은 자가 없으니.'
배산은 성격이 유약해 세력들을 휘어잡지 못했고, 다른 자들은 욕심이 과했다.
'차라리 천강구절이 나타나서 싹 수습해줬으면 좋겠구나.'
- 작가의말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도 혼자서 세상을 쥐락펴락하지 못하는 세계관입니다. 현실에서 핵무기가 있다고 바로 강대국이 되는 건 아닌 것과 마찬가지죠.
그러나 핵은 핵 나름의 쓸모가 있습니다. 구후영은 현재 전술핵 정도 되는 위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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