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일전背水一戰
소문이란 놈은 참으로 이상하다.
누가 들어도 그럴듯하고 믿을 만한 소문은 다리가 짧아 멀리 가지 못한다. 반면, 누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허황한 소문은 날개가 돋쳐 널리 회자하고, 믿는 자와 안 믿는 자들이 설전을 벌이며 과장하고 왜곡하여 소문이 소문을 낳는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고, 백 년 전에도 그랬고, 천 년 전에도 그랬으니, 이쯤이면 소문이 이상한 게 아니라 사람이 이상하다고 여기는 게 맞는 듯하다.
"진짜라니까. 내 친척이 무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는데, 구후 장주와 현현자 대장로가 마교에서 대결을 벌인 일을 똑똑히 들었어."
"나도 들은 게 있는데. 구후 장주가 무당을 찾아가서 장로들에게 태극권을 가르쳤다고 하더라."
"금검당 사람들이 직접 봤는데, 구후 장주가 신검이랑 망년지교忘年之交(나이를 잊은 친구)래."
"낭인 무리가 홍엽산장을 약탈하러 왔는데 신창이 나타나서 막았대."
"신창이 왜?"
"구후 장주가 거금을 들여 고용했대."
온갖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진짜 놀랠 만한 일이 터졌다.
"들었어? 무당에서 은자 수십만 냥을 들여 도관을 크게 짓기로 했는데, 그 일을 철혈방이 한대."
"에이, 설마."
"진짜야. 홍엽산장에서 축하연을 여는데, 무당도 초청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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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아는 사람 없는가?"
홍엽산장의 청첩을 확인한 현영자는 화가 꼭뒤까지 치밀었다.
"지금 알아보고 있습니다."
애꿎은 막내 장로가 나섰다.
"뭘?"
"장문 사제와 직인의 행방 말입니다."
"그놈이 아직도 안 돌아온 건가?"
"직인도 없습니다."
태극혜검의 해석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구후영이 붓으로 그린 태극이 사람들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 탓에 무당 장로들은 한동안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 속을 살아야 했다.
그런 와중에 진무관을 짓는 일을 철혈방에 맡겨 고맙다며 축하연에 참석해달라는 내용의 청첩을 받으니 노발대발할 수밖에 없었는데.
"장문뿐이 아니라 직인도 같이 사라졌다라."
현영자는 금세 평정을 회복했다.
"그렇습니다."
"혹시 장문이 지금 홍엽산장에 있는 건 아니겠지?"
"거기까진 아직."
"잠깐 생각하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현영자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철혈방이 배수진을 쳤어."
"배수진이요?"
한나라의 대원수 한신은 조나라를 공격할 때 일만의 병력을 강가에 두어 배수진을 쳤고, 이로 상대를 유인해낸 다음 이천의 기병으로 기습하여 조나라 병영을 점령했다.
거기에 퇴로가 막힌 한나라의 일만 군사가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싸운 덕분에 조나라 군대는 형편없이 무너졌고, 왕을 비롯해 모든 장수가 한신에게 잡혔다.
"우리가 축하연에 안 가면 어떻게 될까?"
"글쎄요."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계약서를 공개해서 우리가 절대 못 무르게 하겠지."
홍엽산장의 축하연은 무당을 유인하는, 그것도 상대가 물지 않고는 절대 못 배길 정도로 확실한 미끼다. 한신이 강가에 쳤던 배수진보다 훨씬 위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가면요?"
"가면 계약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별해야 하는데, 장문과 직인이 사라진 걸 보면 진짜일 가능성이 높겠지."
"장문 사제가 무당을 팔아먹었다는 말입니까?"
현영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심약한 놈이 그럴 리가. 아무래도 철혈방에 납치됐거나."
아니면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렸거나.
"철혈방이 그렇게까지 막 나갈까요?"
무당과 철혈방은 쭉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대놓고 충돌한 일은 없다. 철혈방이 강세일 때도 그랬고, 무당이 강세일 때도 마찬가지다.
철혈방이나 무당 정도가 되면 홧김에 주먹을 드는 일이 줄기 마련이고, 치른 희생 이상으로 이득이 확실할 때나 칼을 뽑는다.
"그래서 배수진이라고 한 거지. 성공하면 살고, 실패하면 호북 무림에서 철혈방이란 이름이 역사가 되는 거니까."
그제야 장로들도 홍엽산장이 보낸 청첩의 무게를 실감했다.
"구후 방주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구후영에게 친밀감을 느낀 장로 중 하나가 말했다.
"그게 문제다."
현영자가 탄식했다.
"아무리 무당이라도 확실한 증거 없이는 홍엽산장의 장주에게 계약서를 위조했다고 하거나, 무당 장문을 어떻게 했다고 규탄할 수 없다."
덕이 아무리 높아도 이익 관계를 넘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소용도 없는 건 아니었다.
"그냥 철혈방에 맡기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오."
장로 하나가 입을 열었다.
"왜 그리 생각하지?"
"마교도 아니고 철혈방도 아니면, 조정의 목표는 종남이 될 거요."
종남은 전진교의 후신으로, 수백 년간 중원 도교의 우두머리였다. 현재 중원 도교의 거두巨頭로 성장한 무당 입장에선 종남이 살갗에 박힌 가시와 같다.
꼭 뽑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시시각각 거슬린다.
"하나를 알고 둘을 모르는군."
현영자가 고개를 저었다.
"호북에서 철혈방을 치려면 누가 손을 써야지?"
"무당이오."
"그러니까. 무당 빼고 철혈방을 칠 만한 세력이 없다. 그런데 무당의 진무관을 짓는 일을 철혈방이 맡아버리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그간 받아먹은 게 너무 많아 조정이 지시하면 무당은 철혈방을 칠 수밖에 없다. 철혈방이 사라지는 게 무당의 이득에도 부합하기에 망설일 일도 전혀 아니다.
문제는 명분이다.
현재라면 어떻게든 명분을 만들어서 철혈방을 칠 텐데, 진무관을 짓는 일을 철혈방에 맡긴 후엔 명분이 약해진다.
그런 상황에 철혈방을 억지로 치면 무당은 중원 도교를 이끄는 종파가 아닌 이익을 따지는 강호의 무리로 전락하고 만다.
그토록 강한 소림이 하남 전체에 끼치는 영향력이 부족한 건 다 이러한 우려 때문이다. 너무 속물로 보이면 불교 총본산으로서의 형상이 사라지며 수익이 오히려 줄어든다.
"철혈방에 머리 잘 쓰는 자가 있군요."
그 머리 잘 쓰는 자가 허수아비 방주였던 동엽이란 건 아마 무당에 만 번의 기회를 줘도 맞히기 어려울 것이다.
"혹시 말입니다."
다들 침묵한 가운데, 막내 장로가 입을 열었다.
"장문 사제가 자의로 계약한 거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그놈이 정신이 나가지 않은 이상에야···"
"사질의 말에 도리가 있소. 그간 몇몇 장로가 장문을 여간 홀대한 게 아니잖소. 수많은 제자가 보는 곳에서 어린애 꾸짖듯 한 게 한두 번이오?"
"그거야 맨날 수련을 빼먹고 빈둥거리니 그런 거 아니오."
"맞소. 무당에 검을 납품하는 대장간에서 정기적으로 금품을 수수한다는 소문도 무성하오."
"그래도 그렇지. 명색이 장문인데 체면은 지켜줬어야 할 게 아니오."
"그만."
현영자가 장로들의 말다툼을 제지했다.
"믿을 만한 속가를 시켜 홍엽산장의 동태를 감시케 하고, 장문과 직인의 행방을 찾는 데 절정에 이른 모든 제자를 투입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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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무영의 행방은 아직입니까?"
축하연 날짜인 삼월 십오일이 다가올수록 구후영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지만, 아무 소식도 없습니다."
"내 걱정이 기우이길 바랍니다."
구후영은 무당에 있으면서 옥무영에 관한 이야기를 꽤 들었는데, 사람 좋다는 평과 장로들의 꼭두각시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구후영이 현재 걱정하는 건, 옥무영이 돈을 목적으로 한 게 아니고 누군가의 지시로 계약서를 작성해줬을 가능성이다.
"무당이 이토록 대단한 함정을 팠다면, 우린 당해도 쌉니다."
"제가 또 쓸데없는 걱정을 했군요."
이미 흐름이 형성되었기에 멈추거나 비틀지 못한다. 현재로선 그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임기응변하는 수밖에 없다.
"잠깐 산책하며 기분을 풀어보세요."
"마침 생각나는 곳이 있는데, 같이 가실래요?"
단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구후영이 앞장섰다.
열 번 이상 다닌 길이기에 구후영은 전혀 헤매지 않고 목적지로 곧장 향했다.
"여긴?"
"자칭 천하제일 야장이 사는 곳입니다."
안 허물어진 게 용한 집으로 다가가는 중에, 쪽문이 벌컥 열리며 왕 야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선이 잘 익힌 음식을 매일 갖다준 덕분인지, 아니면 귀한 쇠를 만져 기분이 좋아선지, 왕 야장은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생기가 돌았다.
"어떻게 알고 왔어?"
"네?"
"내일 장선이 오면 끝났다고 알려주려 했는데, 어떻게 알고 왔냐고."
"귀검을 다 없앤 겁니까?"
"없애다마다. 그걸로 멋진 검까지 만들었지."
말을 마친 왕 야장이 집으로 들어갔다가 검 한 자루를 들고나왔다.
"자, 어때."
구후영은 왕 야장 손에서 검을 건네받아 꼼꼼하게 살폈다.
'대단하다.'
천하제일 야장이라는 말이 그냥 허풍은 아니었는지, 흠잡을 데 하나 없이 균형이 잘 잡힌 검이었다. 색은 그냥 철검이랑 별반 다르지 않고 검 날의 모양도 특별한 데 없이 수수했는데, 구후영은 그게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남은 거로 비수도 만들었는데, 마음에 드는지 보아라."
왕 야장이 내민 비수는 모양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보통 화려하다고 하면 문양을 새기고 보석을 붙인 모습을 연상하는데, 왕 야장은 그저 모양으로 화려함을 빚어냈다.
"정말 대단한 솜씨입니다."
왕 야장에게 공치사하던 구후영은 손이 데일 것 같은 뜨거움을 의식하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면사에 가려져 확신하긴 어렵지만, 단아의 시선이 비수를 못 떠나는 듯했다.
'그간 신세도 많이 졌는데.'
"맞다. 잠깐 기다려."
구후영의 칭찬에 싱글벙글 즐겁게 웃던 왕 야장이 또 뭔가를 들고나왔다.
"이건 나무를 깎아 만든 검집과 도집이다."
나무를 쪼개 속을 판 다음 철편으로 조이고 가죽을 감아서 만든 검집과 도집은 예술품처럼 아름다웠다. 좋은 재료를 썼는지 아니면 특수 처리를 했는지 나무가 검붉어 한결 품위 있어 보였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고맙기는. 오랜만에 살아 있는 기분이었다."
"소녀가 암기 제작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가만히 있던 단아가 왕 야장에게 질문했다.
"난 불을 가까이 안 하기로 맹세했다. 암기 만드는 건 힘들겠구나."
"단조하라는 게 아닙니다. 철괴를 드릴 테니 갈아서 모양을 만들면 됩니다."
"그래? 사실 내가 연마硏磨로는 또 천하제일을 자랑하지."
"이따 저녁쯤에 철괴랑 암기 도면을 갖다 드릴게요."
"그래. 좋아. 하하."
구후영과 단아는 즐겁게 웃는 왕 야장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홍엽산장 쪽으로 걸었다.
"구후 공자는 한결 안정된 느낌입니다."
"검을 손에 잡으니 잡념이 다 사라지네요."
"검사가 검을 잃었으니 마음이 불안한 게 당연한데, 제가 소홀했군요."
"그게 어찌 단 소저 잘못입니까. 당사자인 저도 몰랐는데 말입니다."
대화하는 사이, 구름 뒤에 숨었던 해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에 싹이 땅을 뚫으면서 데리고 나온 흙내음이 한결 강렬해졌다.
"봄이군요."
단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구후영이 비수를 꺼내 수줍게 건넸다.
"그간 신세만 졌는데, 제 작은 마음입니다. 아마도 천하에서 제일 단단한 비수일 겁니다."
"이걸 제게 선물하시는 건가요?"
"네."
"그럼."
구후영의 손에서 비수를 받은 단아가.
"먼저 가겠습니다."
경공을 펼쳐 순식간에 사라졌다.
"단 소저, 같이 가요."
단아의 돌발행동에 당황한 구후영이 황급히 뒤를 쫓았다.
"싫은데요."
완연한 봄이었다.
- 작가의말
그간 제가 ‘화가 꼭두까지 치밀다’라는 표현을 종종 썼는데, 오늘에야 꼭뒤가 표준어임을 알았습니다. 꼭뒤가 뒤통수 한가운데를 뜻하기에 당연히 꼭두가 표준어고 꼭뒤가 사투리라고 생각했는데, 제 편견이었네요.
그나저나, 요새 봄기운이 물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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