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지쟁名分之爭
장자 승계의 원칙이 없으면 황제 자리를 두고 잦은 다툼이 일어 황궁은 물론 세상도 혼란에 빠지기 십상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은 장자 승계라는 명분에 커다란 힘을 실어준다. 아무도 명분이 깨져 자기 주변에 혼란이 생기는 걸 반기지 않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로 온갖 명분이 크고 작은 힘을 얻었다.
"무당 대장로 현영 진인 일행 여섯 명입니다."
무당의 등장에 손님들이 수군거렸다.
소문대로 홍엽산장이 축하연을 열고 삼백 명이 넘은 호북에서 이름깨나 있다는 사람을 초청했음에도 여전히 반신반의했는데, 무당이 진짜 등장하자 다들 제대로 놀랐다.
"이쪽으로 오시오."
연무쌍이 나와서 무당 일행을 안내했다. 그에 현영자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장주가 직접 나와 영접하지 않는다고?'
현허자가 장문일 때부터 무당의 실세였던 현영자가 왔는데 구후영이 아닌 연무쌍이 나온 건 싸우자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을 이렇게 크게 벌인 상대가 그렇게까지 멍청할 리 없다는 생각에 현영자는 화를 누르고 경각심을 키웠다.
'단단히 준비했군.'
초봄인 지금 연회를 풍성하게 꾸미는 건 어려운 일이다. 현영자는 상에 놓인 음식들로 철혈방이 이번 일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절감했다.
'분위기도 무겁고.'
초대받은 손님이 다 온 게 아니어서 빈자리는 철혈방 사람으로 채웠다. 그래선지 즐거워야 할 잔치의 분위기가 다소 비장했다.
"어서 오시오."
연무장에 들어서자 구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현영자를 향해 포권했다.
"구후 장주는 별래무양하셨소?"
상석에 안내받은 현영자가 자리에 앉지 않고 구후영과 안부 인사를 나눴다.
"일전엔 큰 깨달음을 갑자기 얻어 말도 없이 떠났소. 이제라도 무당의 극진한 대접에 감사드리오."
"무당은 구후 장주를 극진히 대접했는데, 홍엽산장은 왜 무당을 홀대하는 거요."
현영자는 시종 착석하지 않았다. 이는 구후영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을 경우 바로 떠나겠다는 위협이었다.
"본 장주가 불민하여 대장로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소."
"내가 아무리 부덕해도 명색이 무당 대장로인데, 구후 장주가 자리에서 날 맞이할 줄은 몰랐소."
"하하."
구후영이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무당 장문이 왔다면 당연히 장주가 마중해야겠지만, 무당의 큰 어른이 왔으니 장주의 삼촌이 맞이하는 게 예의와 법도에 부합하지 않겠소?"
'계약서가 진짜구나.'
구후영이 장문을 대장로 위에 놓으려고 하자, 현영자는 계약서가 진짜라고 확신했다.
'장문이 체결한 계약을 대장로의 신분으로 엎지 못하도록 명분을 쌓고 있다.'
"홍엽산장이나 철혈방은 배분을 무시하고 권력을 잡은 자가 최고일지 몰라도, 우리 무당은 장문이라고 사숙들한테 함부로 하지 않소."
"현영 진인의 말은."
구후영이 살짝 뜸을 들였다.
"무당은 개국공신을 홀대하지 않고 장문보다 더 중히 여긴다는 말이오?"
현영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질렸다.
'생각보다 세게 나오는데?'
여기서 현영자가 고개를 끄덕이면, 개국공신을 숙청한 명태조 주원장과 자신에게 반기를 든 늙은 대신들을 잡아 죽인 명성조 주체를 대놓고 욕한 셈이다.
잠깐 고민한 현영자는 이대로 진행되면 흙구덩이에 점점 깊이 빠질 길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반가운 손님이 오셨는데, 본 장주가 술 한 잔 권하겠소."
"무당은 진무관을 짓기에 앞서 제자 모두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있소. 그래서 술은 마시지 않겠소."
"혹시 철혈방도 금주와 금육을 해야 하는 거요?"
"안 그래도 될 것 같소."
현영자의 가시 돋친 말을 구후영이 부드럽게 받아넘겼다.
"장담은 못 하나, 최대한 술과 고기를 입에 안 대게 단속하겠소."
'어린놈이 만만치 않구나.'
배수진을 친 자답게 구후영이 잠시도 쉬지 않고 압박하자 현영자도 여유가 점점 줄었다.
"해검지가 공격받은 날 무당 장문과 장문 직인이 함께 사라졌는데, 혹시 아는 바가 있소?"
밀린 느낌을 받은 현영자가 화제를 바꿔 구후영을 역으로 압박했다.
"내가 아는 건 그날 다 말씀드렸소. 해검지에 맡긴 보검을 잃고, 보검을 지키던 양 호위가 독 묻은 비수에 당해 목숨이 위태로웠던 게 해검지에서 발생한 일의 전부요."
구후영이 태연하게 받아쳤다.
"그럼, 계약은 언제 누구와 체결한 거요?"
"무당의 객방에서 옥 장문과 체결했소. 설마, 대장로께선 모르는 일이었소?"
구후영이 짐짓 놀란 얼굴로 말하자 현영자는 이가 갈렸다.
'옥무영 이 개새끼.'
사부가 일찍 죽어 세력 응집이 어렵다는 이유로 수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손수 장문 자리에 올려줬는데, 이렇게 큰 사고를 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얘긴 왜 이제야 하는 거요?"
"당시엔 양 호위의 생사가 위중해 경황이 없었고, 그 뒤론 묻는 사람이 없어서 말하지 못했소."
구후영의 대답에 현영자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굳이 따져보면 외인에 불과한 구후영이 옥무영과 계약한 일을 무당에 자진해서 알려야 할 의무는 없다.
'여기서 더 따지면 무당은 그간 장문도 안 찾고 뭐 했냐고 비난만 받겠지.'
이제 남은 유일한 희망은 계약서의 서명이나 인장이 가짜라고 우기는 건데, 홍엽산장의 대문에 발을 들일 때까지 옥무영과 직인의 행방에 관한 소식은 없었다.
'설마.'
현영자는 계약이 가짜라고 우길 걸 대비하여 홍엽산장이 옥무영을 데리고 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아닐 거야. 그건 그냥 싸우자는 건데.'
만약 거기까지 갔다면 홍엽산장이 무당을 도발한 셈이다. 그런 경우, 홍엽산장의 명분이 아무리 강해도 무당과 싸워야 하고, 결과는 당연히 철혈방의 와해다.
'그렇다면 옥무영이 자발적으로 이들과 손잡았다는 건데. 도대체 왜?'
황금이 산처럼 쌓여도 죽으면 돌산이나 다를 바 없다. 무당이 아무리 측은지심을 입에 달고 살아도 이러한 배임 행위를 그냥 두지 않는다.
그걸 모를 정도로 멍청한 옥무영이 아니기에, 고작 구박 좀 받았다고 이런 어마어마한 사고를 치진 않았을 거다.
'어린놈이 무공만 강한 줄 알았는데, 수완도 상상 이상이구나. 도대체 옥무영을 어떻게 구워삶았지?'
쉽게 생각하고 온 건 아니지만, 상상 이상으로 까다로운 상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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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가 즐겁게 진행되는 가운데, 구후영과 현영자가 독대했다.
"구후 장주는 어쩔 생각이오?"
"오늘 계약서를 공개하고 못을 박아야겠소."
"그 못이 관뚜껑에 박히는 못이 될지도 모르네."
현영자의 압박에 구후영이 피식 웃었다.
"그 관에 나만 들어가라는 법은 없는 것 같소."
현영자의 입에서 빠드득 소리가 새어 나왔다.
"대장로는 아직도 모르겠소?"
구후영이 형형한 눈을 빛내며 기세를 키웠다.
"철혈방은 이 일에 목숨을 걸었다는걸."
"세상의 모든 물이 바다로 가지만, 한강의 물이 장강에 흘러 바다까지 가는 덴 시간이 걸리오. 오늘은 무당이 축하연에 참석했다는 데 만족하고 여기서 멈추시오."
"싫다면 어쩔 생각이오."
"무당은 장문의 실종과 직인의 분실을 세상에 알리고, 철혈방과 맺은 계약이 무효라고 발표할 거요."
"이 시점에 싸우겠다는 거요?"
고수 숫자는 무당이 압도하지만, 철혈방이라고 속 빈 강정은 아니다. 무당 역시 어느 정도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더구나 무당과 철혈방의 싸움 직후 북원의 침공이 이뤄질 시, 무당이 욕받이가 될 가능성이 무척이나 크다.
"싸울 일은 없소. 무당은 그저 철혈방에 혐의가 있다고만 할 뿐, 철혈방이 뭔가를 했다고 주장하진 않을 거요."
현영자는 웬만하면 꺼내지 않으려 했던 최후의 수단을 동원했다.
"각자 주장을 펼치는 사이, 무당은 진무관의 건축을 다른 곳에 맡길 거요. 차후 옥무영이 나타나서 자신이 체결한 계약이 맞는다고 시인해도 그땐 이미 늦었소. 물론, 무당은 심심한 위로와 함께 소정의 금액을 철혈방에 보상으로 줄 생각이오."
수많은 상황을 상정해 대책을 짰지만, 현영자가 말한 방법은 고려 범위에 없었다.
"오늘 계약서를 꺼내지 않으면 다시 자리를 마련해 두 문파의 미래에 관해 진지하게 상의할 의향이 있소. 그러나 오늘 계약서를 꺼내면 이대로 모든 게 끝장임을 아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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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영자는 자리로 돌아가 연회를 즐겼고, 구후영은 급히 사람을 소집해 대책을 상의했다.
"명분 싸움은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는 걸 알고 힘 싸움으로 바꿔버렸군요."
단아가 탄식했다.
철혈방은 힘의 격차가 크기에 어떻게든 명분 싸움으로 끌어갔고, 필승의 전략까지 세웠는데.
'역시 강호에선 힘이 최고구나.'
철혈방이 고심하여 짠 판을 현영자가 간단히 엎어버렸다.
"빨리 대책을 찾아야 하오."
공형선이 재촉했다.
"현영자가 안면을 완전히 몰수할 경우, 대책이 없습니다. 분하나 제안에 따르는 게 좋습니다."
단아가 말했다.
"대책은 없지만, 오늘 계약서를 공개하지 않으면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됩니다."
구후영이 반대했다.
"계약 체결이 어려운 경우, 다른 대책이 있다고 하지 않았냐?"
단아와 구후영의 대화를 듣던 연무쌍이 불쑥 끼어들었다.
"처음엔 태극혜검의 해석을 돕는 걸 계약 조건으로 걸 생각이었습니다."
구후영의 말에 왕경초가 손뼉을 짝 쳤다.
"지금이라도 그걸 조건으로 걸면 안 되겠소?"
"무당에 있을 때 티를 많이 내긴 했는데, 현영자가 그것만으로 만족할지 모르겠소."
현재 상황에 태극혜검의 해석을 돕는 건 확실한 동아줄이라기보단 요행의 지푸라기다.
"누구도 확실한 생각이 없을 땐 다수결이 답이오."
공형선이 다시 나섰다.
"난 계획대로 진행하는 걸 찬성하오. 어차피 무당이 계약서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까지 염두에 뒀잖소. 괜히 무당에 끌려다니기보단 끝까지 우리가 짠 판에서 노는 게 낫다고 보오."
왕경초가 말했다.
"저는 일단 한발 물러서는 쪽입니다."
단아가 말했다.
"무당이 다른 곳과 계약하는 걸 방해하며 옥무영을 찾아내면 우리 승립니다."
"난 왕 당주 말에 동의하오."
공형선이 왕경초 편을 들었다. 이미 있는 머리 없는 머리 다 썼기에 더는 머리 쓰기가 싫었다.
"난 단 소저 편이오."
연무쌍이 말했다.
장선 역시 단아 편을 들었고, 양 호위는 왕경초의 손을 들어줬다.
"이젠 방주의 결단에 달렸소."
왕경초의 말에 구후영이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어떤 결정을 내려도 방주의 뜻을 따를 테니, 부담 갖지 마시오."
공형선이 구후영을 응원했다.
"무당이 저리 나오는 이상, 우리가 원했던 길은 이미 막힌 것 같소."
잠깐 고민한 구후영이 입을 열었다.
"무당 대장로의 뜻대로 해주되, 오늘 당장 자리를 마련해 담판을 지어야겠소."
"우리에겐 담판에 내놓을 밑천이 없습니다."
단아의 말에 구후영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에겐 철혈방의 해체라는 커다란 판돈이 있소."
구후영의 말에 왕경초와 공형선은 물론이고, 양달도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간 철혈방보단 자신의 이익을 앞세웠지만, 정작 해체한다고 하니 아쉬움과 미련 그리고 분노가 끝모르게 치솟았다.
그때, 마음이 시원해지는 소리가 벽을 뚫고 일행의 귀에 전해졌다.
"무당 장문 옥무영 대협 일행 두 명입니다."
- 작가의말
'어린놈이 무공만 강한 줄 알았는데, 수완도 상상 이상이구나. 도대체 옥무영을 어떻게 구워삶았지?'
현영자는 몰랐다.아궁이에 불을 지핀 것도 옥무영이고, 가마에 물을 부은 것도 옥무영이고, 후추와 소금을 뿌리고 끓는 물에 몸을 던진 것 역시 옥무영이며, 솥 안에 들어간 다음엔 직접 뚜껑까지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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