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대백眞相大白
검은 본디 사람을 찌르는 흉한 물건이 아니었다.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낼 때 돼지나 양의 목을 베어 피를 내는 신성한 물건으로, 존귀한 자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인간은 검이 신령도 두려워하는 물건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검에 수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소림에서 검을 가져간 사람이 당신인가?"
옥무영이 질문했다.
"그래. 그때부터 사제랑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지. 그래서 일부러 칠살문의 감옥에 숨어 지낸 거고."
위종이 경국지색의 미인한테나 줄 법한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천공교검을 쓸어봤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은 김에 나와 이 검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이제부터 하는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임을 미리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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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선각先知先覺.
세상의 법칙을 먼저 알고 깨닫는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역사에서 선지자는 늘 인간을 더 나은 상황으로 이끄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모든 선지자가 수호자는 아니지만, 모든 수호자는 선지자다. 진법의 활성과 보수의 사명을 지닌 수호자들은 시대에 부합하지 않은 대단한 지식을 보유했다.
일부는 틀린 지식이었지만, 대부분은 적용되는 즉시 도약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대단한 것이었다.
상고의 지식을 얻어 수호자가 된 인간은 하나같이 자신의 지식 중 유용한 것을 널리 전파했다.
그러다 수명이 다해 죽으면 지식과 기억은 다른 자의 몸으로 옮겨갔다.
즉, 서불이 마지막으로 깬 술의 수호자라는 말은 거짓이었다. 수호자들은 동시는 아니어도 비슷한 시기에 깨서 몸을 바꿔가며 쭉 존재해 왔다.
나라나 부족을 천 년씩 통치한 왕의 전설은 바로 여기서 비롯했다.
그렇게 오랜 기간이 지나 수십 개의 몸을 바꾼 수호자들은 '지식'과 '의지' 외에 '자아'가 생겼다.
그저 진법을 수호하는 도구가 아닌 욕망을 갖춘 인간으로 변화한 것이다.
위종이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질투'였다.
편작이나 노반과 같이 상고 시대의 지식을 물려받은 게 아닌데도 대단한 수준의 의술과 건축술을 익힌 자들에 대한 질투.
특히 노반이 나무로 만든 새는 잠시 하늘을 날았는데, 위종이 보유한 지식으로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질투를 느끼고부터 위종은 더 나은 존재가 되려는 '욕망'을 품게 되었다.
반대로 수호자의 운명에 염증을 느낀 자들도 있었다.
개중 둘이 우연히 만나 부부가 되었다.
이들 부부는 자식을 낳았고, 죽은 다음 아주 높은 확률로 자신들이 낳은 아들의 몸을 빼앗을 것임을 깨달았다.
이미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 부부기에 그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알았다.
그에 부부는 자신들의 '삶'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무의 수호자였던 남편과 술의 수호자였던 아내는 자신들이 아는 지식을 결합해서 한 자루 검을 만들었다.
무려 삼 년의 시간을 들인 이 검이 완성되었을 때 먹구름이 몰려와 사흘 내내 소나기를 쏟고 벼락을 퍼부었다고 한다.
검을 완성한 부부는 자신들의 비밀을 아들에게 알린 다음, 검으로 자기 심장을 찔렀다.
그 결과 두 명의 수호자는 '영면'에 들었고, 푸르던 검신이 옅은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이 둘이 바로 간장干將과 막야莫耶 부부다.
간장과 막야의 아들은 이름이 적赤이었는데, 부모의 유언에 따라 수호자를 '사냥'했다.
그러다 힘이 부족해 어떤 무의 수호자 손에 죽었다.
간장과 막야가 만든 검을 손에 넣은 무의 수호자는 검신에 천공교검 네 글자를 새겼고, 적이 하던 일을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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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로 귀검자다."
어느새 흥분을 가라앉힌 위종이 조용히 고백했다.
"대부분 수호자는 삼십 년 이상 살지 못했는데, 난 사백 년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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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교검을 얻은 귀검자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수호자를 사냥했다.
세상은 중원의 수백 배 크기였다.
게다가 죽은 수호자의 기억이 남은 자들에게 전해지며 '사냥꾼'의 존재는 모두에게 알려졌다.
일부 수호자는 강력한 군대를 조직해 자신을 지켰고, 일부 수호자는 숨었다. 일부 수호자는 자신이 들킨 걸 알아채자마자 자결해 몸을 옮기는 방식으로 귀검자를 괴롭혔다.
귀검자는 무려 삼백 년의 기간 수십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대부분 수호자를 해치웠다.
그러나 결국엔 궁지에 몰렸고, 자결함으로써 '영면'에 드는 것만큼은 겨우 면했다.
귀검자를 죽이고 천공교검을 앗아간 자가 바로 술의 마지막 수호자인 서불이었다.
서불은 수호자들을 부활코자 했다.
그러나 서불 역시 몸을 옮기는 것에 대한 고초를 알았다. 그래서 더는 몸을 옮기지 않고 영생하는 수호자를 만들려 했다.
삼천의 동남동녀는 부활한 수호자의 몸이 될 예정이었고, 의봉군체술은 합쳐진 기억을 다시 나누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서불은 첫 시도에 실패했고, 바로 죽은 바람에 두 번째 기회를 잃었다.
원래대로라면 서불도 위종처럼 새로운 몸을 차지해야 했지만, 의봉군체술의 영향 때문에 기억이 삼천 개로 나뉘었다.
그렇게 술의 수호자는 완전히 사라졌다.
한편.
자결하고 몸을 갈아탄 위종은 깊은 산속에 숨어서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다.
강렬한 '욕망'으로 누구보다 노력한 위종은 드높은 경지를 이룰 자신이 있었고, 무의 끝을 보아 영생할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수명을 조금 연장하는 정도가 한계였다.
그리고 시종 위종을 괴롭히는 의문도 있었다.
천공교검에 죽어 '영면'에 든 수호자의 기억은 모두에게 전해진다. 무의 수호자의 기억은 무의 수호자에게, 술의 수호자의 기억은 술의 수호자에게.
그러나 지식은 술의 수호자건 무의 수호자건 반 정도만 위종한테 넘어왔다.
남은 반의 지식은 어디에 간 것일까?
위종은 하나의 대담한 가설을 세우고 수백 년의 시간을 들여 검증했다.
결과, 남은 지식은 천공교검에 '저장'되었다는 결론을 얻었다.
아쉽게도 위종은 무의 수호자인 간장의 기억만 얻었다. 술의 수호자인 막야의 기억을 얻지 못한 탓에 천공교검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구체적으로 어떤 기능이 있고, 천공교검에 갇힌 지식을 어떻게 꺼내는지도 몰랐다.
그때부터 위종은 서불의 기억을 욕심내기 시작했다. 마지막 술의 수호자인 서불의 기억을 얻으면 막야의 기억도 얻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천공교검에 담긴 지식을 얻어 일흔둘 수호자의 지식을 모두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신神이 될지도 모른다.
고작 영생 따위가 아닌 전지하고 전능한 신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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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서불의 시도가 완전한 실패가 아니었단 거지."
위종이 탄식했다.
"비록 원하던 방식이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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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종의 사제는 일흔두 수호자 중 하나가 아니었다.
위종의 사제는 기억을 전하지 못하는 반쪽짜리였다.
서불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천공교검의 지식 중 일부를 꺼냈다.
그 지식은 새로운 무의 수호자를 탄생시켰다.
위종은 사제의 그러한 상황을 알아챈 다음 그럴듯한 거짓을 꾸몄다. 지식만 얻은 사제는 위종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위종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즉, 위종의 사제는 진심으로 진시황을 죽이려 했다.
그렇기에 구후영 등을 적이 아닌 손 잡을 수도 있는 잠재적 아군으로 생각해 다짜고짜로 살초를 펼치지 않았다.
둘의 관계에 문제가 발생한 건 위종이 천공교검을 가로챈 다음부터였다.
천공교검이 진시황의 지식을 빼앗는 열쇠임을 아는 사제는 위종의 배신에 분노했다. 그때부터 둘은 각자 노선을 걸었고, 이미 모든 안배를 마친 위종은 칠살문의 감옥에 숨어서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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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방 방주가 당신의 끄나풀인가?"
구후영이 질문했다.
깨달음을 수습하느라 여겨듣진 않았으나 대략적인 맥락은 이미 파악했다.
"맞아. 너희는 우연히 거길 발견한 줄 알았겠지만, 다 내가 의도한 거였다."
구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공교검이 생각보다 가볍긴 한데, 그래도 금속이다. 나뭇가지 안에 있으면 무게가 이상할 텐데, 나뭇가지를 던져준 청의방주가 모를 리 없었다.
당시 청의방주를 끌어들인 건 칠살문과 연관이 있다는 의심 때문이었는데, 알고 보니 위종의 하수인이었다.
"그간 시간을 끌었던 건 혹시 당신 사제의 기억이 누구한테 전해지지 않았나 의심해서였겠지?"
위종이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본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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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출'된 위종은 천천히 일행을 유도하며 반응을 살폈다.
구후영과 원경은 소생자 후보일 뿐만 아니라 수호자 후보이기도 했다.
천공교검으로 사제를 죽이면 사제의 기억이 둘한테 전해질지도 모른다.
비록 사제가 그간 만난 유일한 수호자였지만, 위종은 혹시나 다른 수호자가 더 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꽤 많은 내막을 아는 사제를 계속 살려둘 순 없었고, 구후영이나 원경한테 일부 진실이 전해질 모험을 무릅쓰고 사제를 죽였다.
위종은 지팡이로 천공교검을 숨겼고, 진법의 도움을 받아 실력을 숨김으로써 일행의 의심을 최대한 피했다.
그 뒤엔 구후영이나 원경한테 사제의 기억이 전해지지 않았는지 세심히 살폈고, 자신의 음모가 들켰을 것을 가정해 온갖 대비책을 세워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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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예전부터 알았던 건가?"
"그래. 그러나 지하가 있다는 것만 알았을 뿐 들어가는 방법은 몰랐었지."
이야기를 늘어놓던 위종이 갑자기 탄식했다.
"수천 년을 살았는데도 결국 부동심을 얻지 못했다. 육 층에서 문을 발견한 순간 조급증이 일었지. 그 탓에 간단히 끝낼 일을 이리도 흉험하게 만들었구나."
"우리가 판단력이 낮아진 건 당신 수작인가?"
구후영의 질문에 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대의 주술이다. 위력이 약한 대신 들킬 염려가 없지. 주술을 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문제긴 한데."
그간 위종이 공들여 주술을 건 상대는 사대신협과 구후영과 원경이었다.
덕분에 위종이 사라지고 나서 귀연이 가장 먼저 문제점을 발견했다.
지하에 내려와서 다시 위종의 영향을 받긴 했으나 한 번 벗어났던 경험 덕분에 다들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사실은 내려와서 천마를 비롯한 소생자들을 죽이고 서불의 기억을 얻으면 끝이었다. 모든 기억을 합쳐 흠결이 있는지 확인하면 다른 수호자의 존재 여부를 쉽게 알 수 있고."
"그런데 팽창회의 방해로 천마를 죽이는 데 실패했고, 혈포규찰대가 천마를 깨웠지. 천마가 반쪽짜리 점괘술을 믿고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사태가 어떻게 발전했을지 나로서도 가늠이 안 간다."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던 위종이 갑자기 환희에 찬 표정을 지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쉽게 끝낼 일에 온갖 풍파가 깃든 것엔 다 이유가 있다. 방금 얻은 서불의 기억까지 합쳐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
"천공교검은 지식뿐이 아니라 천공교검에 심장을 찔린 자의 '힘'도 저장된다. 그냥 근력이나 내공 같은 힘 말고, 근원에 가까운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그 '힘' 말이다."
"천마한텐 삼천 명의 '힘'이 깃들었다. 원래는 얻지 못할 힘이었는데, 천마와 너희의 방해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큰 힘을 얻게 되었구나."
말을 마친 위종은 한참이나 광소를 터뜨렸다.
"고맙구나."
잔뜩 굳은 일행의 얼굴을 한 번 훑은 위종이 천공교검을 거꾸로 잡은 다음 자기 심장을 쿡 찔렀다.
- 작가의말
초콜릿 팝니다. 대량으로. 한 입만 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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