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호화호照虎畵虎
옛날에 범을 매우 좋아하는 부자가 있어 화가에게 큰돈을 주고 범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 화가는 돈에 눈이 멀어 승낙했지만, 범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도화지에 붓을 댈 수 없었다.
다행히 지인이 화가에게 범이 고양이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알려줬다. 화가는 고양이를 구해다가 관찰하고 책의 묘사에 결합해 범을 그럴듯하게 그렸다.
그러나 그림을 본 부자는 겉은 비슷하나 백수의 왕으로서의 기세가 전혀 없다며 크게 불쾌해했다.
그리하여 조묘화호라는 말이 생겨 겉만 그럴듯하게 모방하는 걸 비웃었다.
"허세는. 다리가 부러져서 폭주족暴走足도 못 쓰는 주제에."
자매가 풍불지를 비웃었다.
"그걸 알면서도 지금까지 참았다는 건 너희 내상이 만만치 않다는 거네?"
풍불지는 상대의 비웃음을 조롱으로 되갚았다.
"더 늦어서 내 다리가 나으면 이길 가망이 전혀 없으니까 뭐라도 해보려고 억지로 온 거지?"
풍불지의 예리한 지적에 백화궁 자매는 이만 바득바득 갈았다.
"이깟 다리 버리는 셈 치면 폭주족 한 번은 펼칠 수 있다. 둘 다는 장담하지 못하지만, 하나는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주마."
풍불지의 다리가 나으면 백화궁의 궁주 자매는 영원히 풍불지를 피해 도망 다녀야 한다. 그렇기에 내상이 어느 정도 완화되자 무리하여 취화봉의 동굴로 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기회가 없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풍불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선뜻 덤벼들지 못했다.
"부러진 다리로 펼칠 수 있다고? 거짓말이지?"
풍불지는 신검으로 불리지만, 진짜 천하에서 제일로 치는 무공은 따로 있다. 천마도 감탄한 풍불지의 절기는 다름 아닌 보법이었다.
폭주족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단거리를 매우 빠르게 주파하는 속도 위주의 보법이다. 대부분 보법이 빠름보다는 부드러움과 자연스러움에 주안을 두는 점을 고려할 때, 꽤 유별난 무공이다.
풍불지의 폭주족은 한 번 펼치면 오 장의 거리를 단숨에 주파한다. 백화궁 자매가 풍불지와 오 장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쓴 이유다.
오 장보다 가깝다면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풍불지의 검에 목이 잘릴 가능성이 크다.
오 장 이상의 거리가 되는 걸 경계한 것 역시 폭주족 때문이다. 자매가 큰 대가 없이 풍불지를 이기는 방법은 폭주족이 끝나는 순간을 노리는 것밖에 없다.
[난 폭주족을 펼칠 수 없네. 젊은 친구가 좀 수를 내보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체력이 돌아오길 기다리던 구후영은 갑자기 들린 전음에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두 여인이 내상으로 제 실력을 다 발휘할 수 없다고 쳐도 내공이 거의 없는 구후영으로선 어마어마한 난적이다.
'여기서 죽을 순 없다. 자룡이 어딘가에서 내가 구해주길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니 난 꼭 살아서 여길 나가고 말겠다.'
세상 누구보다 소중한 동생을 떠올리며 마음을 단단히 굳힌 구후영은 천공교검을 들고 풍불지와 백화궁 자매 사이에 끼어들었다.
"넌 또 뭐야?"
내상을 입은 몸으로 풍불지와 기 싸움을 하며 기세를 올리던 자매는 화가 잔뜩 났다.
무려 신검과 기 싸움을 하는 중에 약관 정도로 보이는 애송이가 태연하게 끼어든 것으로 자존심이 상한 것도 있고, 내상을 꽤 회복했다고 여겼던 게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 것 때문도 있었다.
"저승사자."
약초꾼의 얼굴이 멍해지고 풍불지가 조용히 어깨를 들썩였다. 평소 조금 고루하게 여겨질 정도로 바른 말만 쓰던 구후영의 입에서 저런 장난스러운 소리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탓이다.
'이놈은 뭐지?'
익살스럽게 웃는 구후영의 얼굴을 확인한 백화궁 자매도 불안한 마음이 조금 커졌다.
'그놈인가? 눈 감고 일류의 경지에 이른 제자의 손을 잘랐다는.'
둘은 구후영이 비월부를 자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날 모든 정신을 풍불지에게 집중한 바람에 구후영이 비월부를 어떻게 했는지 관심 없었고, 심검에 당해 내상을 입은 충격이 너무 커서 그 후에도 떠올려 본 적이 없다.
"내공도 얼마 없어 보이는데, 괜히 아까운 목숨 버리지 말고 한쪽에 찌그러져 있거라."
"내상이 심한 모양이군. 이 몸의 내공을 못 느끼는 걸 보면."
구후영의 공갈에 자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날 풍불지의 심검에 당한 둘은 감히 백화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내상을 입은 게 들키면 둘의 내공을 뺏으려고 음양화합을 시도할 제자가 한둘이 아니다.
밤이면 여전히 추운 대별산에서 팔자에도 없던 노숙을 했고 끼니도 굶어봤다. 게다가 내상 치료도 녹록지 않았다.
어디 혈도를 타격받아 입은 내상의 경우 혈도 치료에 집중하면 쉽게 낫는데, 이번 내상은 도대체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몰라 많이 헤맸다.
시일이 흘러 내상이 어느 정도 호전한 후, 풍불지가 다리를 고치고 힘도 비축하면 자신들은 죽을 길밖에 없다는 생각에 아픈 몸을 끌고 찾아왔는데, 운 좋게도 풍불지의 다리가 안 나았고 작은 내상까지 입었다.
덕분에 용기를 내 모습을 드러냈는데, 생뚱맞게 구후영이 나서서 둘을 흔들었다.
"네가 신검 상대해. 내가 저 애송이를 처리하고 합류할게."
"아니지. 내가 더 많이 회복했으니까 네가 신검을 상대하고 내가 애송이를 처리할게. 괜히 시간 끌어서 좋을 건 없잖아."
둘이 낮은 소리로 대화했으나 귀가 밝은 구후영과 내공이 깊은 풍불지에겐 다 들렸다.
"그러지 말고 둘이 한꺼번에 덤벼. 난 최근에 깨달음을 얻어 경지가 많이 올랐고 그쪽은 내상 입었잖아. 누구도 백화궁 궁주가 고작 열일곱 살짜리 애송이한테 함께 덤볐다고 비웃지 않을 거야."
어차피 생사를 건 싸움이기에 체면 따위는 뒷전에 버리기로 했다. 그러나 그건 신검이 상대일 때의 얘기지 염두에도 없던 구후영에게까지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생살을 잘근잘근 씹어 죽일 놈.'
자매는 구후영의 오만한 발언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신검을 견제해야 함도 잊고 구후영의 도발에 걸려들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거절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겠구나. 대신 방금 좋은 말을 해준 보답으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자매 중 하나의 말에 구후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대결에서 마음가짐이 끼치는 영향은 지대至大하다. 둘이 악에 받쳐 구후영을 괴롭힐 생각을 떠올렸기에 출수할 때 힘이 덜 실릴 가능성이 크다.
구후영이 말로 둘을 도발한 이유다.
둘이 악에 받쳐 오히려 구후영을 빨리 죽이고 싶어 하더라도 내상 때문에 초식에 힘이 과하게 실릴 가능성이 있어 마찬가지로 기회가 된다.
상대가 멀쩡하다면 이렇게 도발하는 게 오히려 손해지만, 내상이 완치되지 않은 약점이 있기에 도발은 백익무해한 선택이었다.
"그만 짖고 덤벼."
서로 눈빛으로 교류한 백화궁 자매는 경공을 펼쳐 동시에 구후영에게 접근했다. 구후영은 둘의 속도를 가늠하고 바로 초식 하나 펼쳤다.
낙화검법이 아닌 난화검법의 초식이었다.
"어."
맹렬한 기세로 덮치던 자매가 자기들끼리 손바닥을 부딪쳐 기세를 죽인 후 뒤로 물러났다.
구후영의 초식이 위력은 몰라도 수준은 대단히 높아 보여 경각심이 생긴 탓이다.
"번갈아 하자."
구후영의 수준 높은 검법을 확인한 백화궁 자매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둘은 한 명이 구후영을 공격하고 남은 한 명이 신검을 견제하는 최상의 대처법을 선택했다.
잠시 숨을 고르며 마음을 다잡은 자매는 간단히 눈빛으로 교류한 후 한 명이 구후영을 공격했다.
구후영은 마찬가지로 난화검법의 초식을 펼쳤다. 번갈아 공격한다고 했으나 그대로 믿기 어려워 남은 여인도 염두에 넣고 큰 범위를 수비했다.
'구멍 난 벽.'
난화검법을 상대한 여인의 첫 느낌이었다. 상대의 검법은 마치 들어오지 말라고 벽을 치는 듯한데, 구멍이 숭숭 뚫렸다.
그런데 구멍으로 공격하자니 왠지 함정 같아서 선뜻 시도하기가 저어됐다.
여인은 공격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보는 눈은 있네."
구후영이 조롱이 잔뜩 섞인 혼잣말을 뱉었다. 그러나 음성의 크기로 봐선 아무래도 자매가 들으라고 일부러 한 소리 같았다.
"멀쩡하게 이길 생각은 버리자니까."
신검을 견제하던 여인이 구후영과 손 한 번 안 섞고 물러난 여인을 질책했다.
"니가 해봐. 말처럼 쉽나."
역할을 바꿔 견제하던 여인이 구후영을 공격했다. 구후영은 방금과 똑같은 초식을 펼쳤다.
여인도 벽에 난 구멍이 미심쩍었으나, 뱉은 말이 있어 물러나지 않고 억지로 공격을 이어갔다.
"합!"
구후영의 검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여인은 구후영의 검을 최대한 피하려 했으나 어느 순간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천공교검이 호쾌한 선을 그렸다.
깡!
검으로 손을 때렸는데 쇠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구후영은 검을 왼손으로 옮긴 후 오른손을 등 뒤에서 몰래 털었다.
마찬가지로 천공교검과 맨손으로 부딪친 여인 역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서 뒤로 물러났다.
"조심해. 보검이다."
여인들이 교대했다.
구후영은 마찬가지로 난화검법으로 수비했다. 여인이 적혈장으로 손을 단단히 하고 공격하자 방금처럼 상대를 막다른 골목에 몰았다.
그런데 아까와 달리 여인의 적혈장은 검날이 아닌 검면과 충돌했고 구후영은 강력한 힘에 밀려 맥없이 뒷걸음쳤다.
"흥. 내공이 없구나."
검에서 느껴지는 반탄력이 너무 미약해 여인은 구후영이 내공이 별로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뒤로 물러나 교대하는 대신 오히려 전진하며 적혈장으로 구후영의 가슴을 때렸다.
강한 힘에 밀려 뒷걸음질하던 구후영으로선 도무지 막을 방법이 없었다.
'웃어?'
구후영의 가슴을 적혈장으로 때린 여인이 멈칫했다. 상황에 안 맞게 환히 웃는 구후영의 얼굴을 본 탓이다.
사실 구후영은 그저 긴장한 나머지 습관적으로 웃은 건데 여인이 오해했고, 오해로 인한 작은 멈칫거림이 결국에 큰 화를 초래했다.
모든 생각이 사라진 구후영이 양손으로 검을 잡고 내려치기를 시전했다. 낙화검법도 난화검법도 아닌 안문도 명인의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그 망치질이었다.
기겁한 여인이 황급히 경공으로 물러나려 했으나 내상 때문에 기의 흐름이 원활치 않았다. 날카로운 천공교검이 여인을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반으로 잘라버렸다.
뜨거운 피가 구후영 얼굴에 확 튀었다.
신검을 견제하던 여인은 동생이 너무 쉽게 죽자 기겁하여 도망쳤다.
"야!"
구후영의 부름에 도망가던 여인이 귀신에 홀린 듯 고개를 돌렸다.
여인을 벤 구후영은 손아귀 힘이 빠져 천공교검을 놓쳤다. 그러나 제정신이 아닌 구후영은 자신이 빈손임을 몰랐다.
"죽어."
오른손을 높이 든 구후영이 여인을 향해 내려치기를 펼쳤다.
완벽한 직선을 그렸으나 하품하며 피할 수 있는 느린 내려치기였다. 더구나 손에 검이 없고 구후영과 여인의 거리는 다섯 장 정도 되었다.
"컥!"
내려치기를 본 여인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잔뜩 긴장한 채 상황을 살피던 약초꾼이 경공을 펼쳐 튀어 나갔다.
퍽!
약초꾼이 던진 돌멩이에 여인의 머리가 터지며 하얀 뇌수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쿵!
동시에 구후영도 큰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졌다.
- 작가의말
직원 : 헐떡. 실장님, 문제 생겼습니다.
실장 : 심드렁. 뭔데 호들갑이야?
직원 : 애써 진정. 17렙짜리가 71렙 몹을 5초 간격으로 둘 잡았습니다.
실장 : 화들짝. 진짜?
직원 : 넵. 여기 사건 경위입니다.
실장 : 펄럭펄럭. 안도. 뭐야. 93렙짜리 NPC랑 같이 있었잖아. 그럼 그럴 수도 있지.
직원 : 억울. 93렙짜리는 가만히 있었는데요.
실장 : 벌떡. 당장 캐릭터 동결하고 조사 시작해. 시스템 뚫린 거면 우리 좃되니까
감독 : 야, 지문은 읽지 말라고 몇 번 말했어.
여전히 맞춤법 검사기가 작동 안 합니다. 오타 보이면 지적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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