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신유재我神猶在
절정의 기준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주 바뀌었는데, 현재는 안으로 정기신이 조화하고 겉으론 신체의 육합이 조화해야 한다. 청월처럼 단순히 내공 경지만 높다고 절정으로 쳐주는 건 송나라 때나 가능하던 일이다.
게다가 내공과 무공의 조화도 이뤄야 하니 예전보다 기준이 훨씬 높아졌으나, 절정으로 불리는 무인이 여느 때보다 많다.
무공 자질만 뛰어나면 내공은 영약으로 키울 수 있고, 송나라 시절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한 내공 수련자 덕분에 절정까지 이르는 수련법이 다양한 덕분이다.
장삼풍 같은 무학의 대종사가 하필 이 시기에 나타난 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넘치는 절정에 호사가들은 절대의 경지를 만들고, 천마와 장삼풍 그리고 오래전의 인물인 왕중양이나 달마 등을 넣었다.
당연히 사대신협이 절정인지 절대인지가 한때는 강호인들의 큰 관심사였다.
하지만, 요즘은 관심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팽창회는 오호단문도를 완성하려고 두문불출한 지 어언 이십 년이 넘고, 홍기영은 관에 투신한 바람에 백안시를 당해 사람들이 잘 거론하려 하지 않았다.
풍불지는 뛰어난 재능으로 사대신협의 최고수로 추앙받았지만, 도처에 염문을 뿌리고 다닌 행실과 다소 경박한 거동 때문에 점점 평가절하되고 있다.
악불형 역시 십 년 가까이 강호에서 사라져 잊히고 있다가 오늘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악 대협께 한 수 가르침을 청하고 싶은데."
눈동자가 투명해진 덩치 큰 사내가 말했다. 아름다운 여인을 갈구하는 수컷을 닮은 눈빛에 산전수전을 다 겪은 악불형도 팔에 소름이 돋을 뻔했다.
"싶은데?"
악불형이 느린 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되물었다.
"묵룡墨龍이 보이지 않아 참고 있소."
악불형의 무기는 길이가 일 장이 조금 넘는 검은 창이다.
거기에 누가 봐도 큰 덩치에 여인의 허리까지는 아니나 웬만한 사내의 허벅지와 비견되는 팔뚝 덕분에 얼굴을 모르는 사람도 악불형을 쉽게 알아봐 사대신협 중 소문이 가장 많았다.
그렇기에 근 십 년간 전혀 목격자가 나타나지 않자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병으로 죽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창槍이 없다고 신神까지 사라졌을까."
악불형이 거만하게 말했다. 그에 덩치 큰 사내가 흥분으로 콧김을 씩씩거렸다.
"설마, 혈포규찰대 소속인가?"
혈포규찰대는 천마가 창안한 육양공六陽功을 익혀 경지가 높을수록 쉽게 흥분한다. 다행히 중원이 욕하는 것처럼 천마의 무공이 사악하지가 않아 투지만 드높일 뿐 파괴와 살육을 부르진 않는다.
"혈포규찰대 부대주 강석이오."
"강석이면 혈포규찰대에서 제일 강하다는 그놈?"
규찰대주는 무공만 따지면 혈포규찰대에서 네 번째나 다섯 번째에 머문다. 대주가 된 건 아수라진의 핵심 역할을 할 수 있는 단단함 덕분이지 최강자여서가 아니다.
"미천한 이름을 알아주시니 감격할 따름이오. 내 이름이 악 대협께 누만 안 된다면 한 수 가르침을 내려주시오."
악불형은 눈에 핏기가 점점 짙어지는 강석을 보며 속으로 한탄했다.
'저러니 다들 초 형을 오해하지.'
천마의 육양공은 강호에 알려진 것과 반대로 정공 중의 정공이다. 단, 아수라진으로 자질이 부족한 자들도 높은 경지를 쉽게 밟은 바람에 여러 부작용이 속출했다. 악불형은 강호의 잘못된 소문들이 늘 안타까웠으나, 강석의 모습을 보니 오해할 만도 하다며 결국엔 수긍하게 되었다.
"경사로운 잔치인데 어울리는 마무리가 있어야지. 저기가 끝나면 시작하자."
악불형의 말에 배산과 강석이 기쁘게 웃고, 용전향을 비롯한 자들은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저 청년은 인자引子고, 주主는 악불형이었구나.'
악불형이 구후영을 고른 건 혼자라는 이유가 전부였지만, 그러한 사정을 알 길 없는 용전향은 단단히 오해했다.
'그럼 천마가 어딘가 살아있다는 말인데.'
악불형은 외모나 거친 목소리 때문에 무식하다는 오해를 많이 받는다. 물론, 십여 년 전까진 딱히 오해도 아니었다. 멍청하진 않으나 무공 빼고 관심사가 거의 없어서 모르는 자가 보기엔 그리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높은 경지를 밟기 위해선 성실히 수련하는 것만으론 어려움을 인지하고 근 십 년 정도 강호를 떠나 온갖 다른 경험을 하고 살았기에 사람이 크게 변했다.
용전향은 악불형의 변화를 전혀 모르기에 이 모든 게 천마의 안배라고 오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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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현자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현현자는 사부 이상으로 따랐던 장삼풍의 죽음에 큰 타격을 받았다. 그 뒤로 삐뚤어지고 방황한 데는 현현자의 타고난 성격 탓이 크지만, 장삼풍의 부재도 주요 원인이었다.
그런 현현자를 나락 끝까지 안 떨어지게 붙잡아준 건 역설적으로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았던 정학이었고, 구렁텅이에서 끌어낸 건 미소가 정학을 닮은 구후영이었다.
"고맙구나."
현현자의 인사에 구후영이 고개를 살짝 숙여 대답을 대신했다. 속에 앙금이 남거나 한 건 아니고, 너무 큰 감동에 입이 쉬이 열리지 않았다.
"경사로운 잔치에 와서 폐만 끼치고 가서 미안하오. 무당은 이만 작별하겠소."
현현자의 말에 배불뚝이 장로가 깜짝 놀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나 지금 현현자의 말에 토를 다는 건 무당의 위명을 깎아 먹는 짓밖에 안 됨을 알고 입을 뻐끔거리기만 했다.
"멀리서 어렵게 오셨는데 좀 더 머물다 가시지요."
배산은 잘하면 무당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생각에 극구 만류했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기 마련이고, 고목이 쓰러져야 새싹이 더 잘 자라는 법이오."
현현자가 현기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내 수명이 채 두 달 남지 않았소. 천산의 땅은 비옥하니 이 고목은 무당에서 썩어야지 않겠소?"
"사형. 설마 내상을."
너무 놀라 입을 열었던 배불뚝이 장로가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양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았다.
강호에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아 꾸며낸 가상의 인물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정학 대신 무당의 최고수로 추앙받는 현현자가 약관 정도의 청년과 내공 대결을 벌이고 내상을 입었다는 소문이 돌면 무당의 명성에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아니다. 그냥 내 천수가 다 되었을 뿐이다. 탐욕이 눈을 가려 그간 보고도 알지 못했는데, 다 버리니 비로소 모든 걸 알겠구나."
배불뚝이 장로는 눈알을 잠깐 굴리곤 바로 배산에게 공수했다.
"무당은 마교의 앞날이 평화롭고 번창하길 기원하오. 사형의 명이 있어 무당 제자들은 이만 떠나겠소."
장삼풍은 우화할 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어쩌면 뭔가를 남겼는데 아무도 못 알아본 걸지도 모르지만, 누구도 못 알아보면 무당 입장에선 안 남긴 거나 마찬가지다.
죽음을 앞둔 현현자는 삼풍 조사와 생각이 다른 듯해 보이자 배불뚝이 장로는 빨리 무당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어서 돌아가서 현현자가 얻은 깨달음을 글로 잘 정리하면 무당이 더 강한 문파로 거듭날 것이고, 그러려면 강호는 당분간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
그렇기에 잊지 않고 명교를 마교로 바꿔 불러 달라진 무당의 입장을 확실히 전달했다.
"귀빈들은 일단 잔치를 즐기시기 바라오. 소생은 무당의 친우들을 잠깐 배웅하겠소."
배산의 친절한 배웅을 받으며 떠나던 현현자가 쾌활당의 문을 나설 때 고개를 돌려 구후영을 바라봤다.
벅찬 감동에 여전히 입이 열리지 않은 탓에 구후영은 현현자에게 눈으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소형제, 그만 서 있고 이리 오게."
배산과 무당 제자들이 사라지고도 구후영은 현현자와 함께 수련하며 받은 깊은 감동 때문에 계속 멍하니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악불형이 거친 목소리로 구후영을 불렀다.
고개를 살짝 돌려 악불형과 눈을 마주친 구후영은 정신을 번뜩 차렸다. 구후영의 눈에 정기가 깃드는 걸 확인한 악불형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안 깨우면 현재 얻은 깨달음에 매몰되어 평생 그것만 붙잡고 허송세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못 깨우면 어렵게 얻은 깨달음이 유실되어 원망을 사게 된다.
다행히 구후영은 둘 다 아니어서 악불형을 기쁘게 했다.
"혹시 변용變容한 겁니까?"
키와 얼굴과 목소리가 모두 변했음에도 구후영은 용케 악불형을 알아봤다. 공청석유로 예민해진 감각 덕분이었다.
"생각보다 안 놀라는군. 다시 날 소개하지. 졸지에 낙화문 소속이 되어버린 악불형이라고 하네."
악불형은 구후영과 낙화문을 강호의 커다란 소용돌이에 끌고 왔음을 인지했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보호막이 되어주려 했다.
"말씀 많이 들었는데 직접 뵈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구후영은 실제로 풍불지에게서 악불형 얘기를 꽤 들었지만, 악불형은 그저 치렛말이려니 하고 가볍게 지나쳤다.
"어?"
발걸음을 옮기다가 휘청한 구후영의 입에서 경탄이 터졌다. 다행히 금세 균형을 회복해 똑바로 걸어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저놈은 천마의 제자가 분명해.'
구후영은 현현자와 함께 수련하는 과정에 내공을 전부 잃었다. 더불어 공청석유의 기운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비록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지만, 몸을 채웠던 강한 기운이 사라지면 감각이 달라져서 거동이 불편하기 마련이기에.
금세 바뀐 몸에 적응해서 똑바로 걷는 구후영의 모습에 웬만큼 경지가 되는 자들은 임초현의 귀한 제자를 제멋대로 천마의 것으로 바꿔버렸다.
'무당이 돌아서고, 소림은 원체 천강구절 편이고. 거기에 천마의 제자까지 나타나고.'
용전향의 이마 주름이 점점 깊어졌다. 중원의 사대문파 중 화산을 뺀 셋이 배산 편이 되었다. 이러면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도 그리할 수 없다.
'어렵게 북원 놈들과 손잡았는데, 일이 이따위로 흐르는구나.'
마교에서 원과 사이가 가장 나쁜 세력이 누구냐면 열에 열은 백련교 출신들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 만큼 이번에 어렵게 손잡았는데, 시작도 전에 끝나게 생겼다.
"악 대협, 약속 지킬 시간이오."
구후영이 자리에 궁둥이를 붙이기 무섭게 강석이 악불형을 닦달했다. 경국지색의 미녀를 앞둔 총각처럼 시뻘겋게 단 얼굴로 씩씩거리는 강석을 본 구후영은 화들짝 놀라며 양팔을 쓰다듬었다.
"안 그래도 초 형이 만든 육양공이 늘 궁금했다."
사내가 혈포규찰대 소속인 것도, 악불형이 천마와 결의형제인 것도 모르는 구후영이기에 오리무중에 빠져 부지런히 주변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상석은 물론 시야가 닿는 중석까지 노강호가 아닌 자가 드물어 표정으로 뭔가를 알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아침에 도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던데, 그게 무슨 말인지 이제 알겠소. 샌님들의 말장난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옳은 말이었군."
옅은 그림자가 희끗거리더니 강석이 중석에 나타났다. 혈포규찰대라는 말에 그저 무식한 싸움꾼으로 생각했던 자들이 속으로 크게 놀랐다.
"내가 아무리 경우가 없기로선 경사로운 잔치에 피를 볼까."
거악巨岳이 움직였다.
악불형은 딱히 기세를 끌어올리거나 하지도 않았는데 덩치와 분위기만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혈포규찰대 강석이 악 대협께 한 수 가르침을 청하오."
느리게 걸어서 중석까지 간 악불형이 호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난 신창 악불형이다. 현재 창이 없으니 그냥 신이라고 불러라."
- 작가의말
아신유재 - 나의 신神은 여전하다. 여기서 신은 great과 비슷한 의미로 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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