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산혈해屍山血海
시선과 시선이 부딪히고, 검과 도가 부딪쳤다.
모든 것을 쏟은 강렬한 부딪침의 결과는 셋 중 하나였다. 하나가 살고 하나가 죽거나, 둘 다 죽거나, 둘 다 살거나.
마지막 경우, 둘은 자신의 모든 걸 또 한 번 던졌다.
그렇게 최소 하나가 죽을 때까지 격돌은 끝나지 않았다.
어렵게 격돌이 끝나고 운 좋게 살아남은 자가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겅중겅중 달렸다.
그런데 갑자기 바닥에 쓰러져 있던 시체가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부러진 검으로 다리를 노렸다.
뜻밖의 공격에 미처 반응하지 못한 사내는 베인 다리가 힘이 풀리며 풀썩 쓰러졌다.
기습한 사내는 피를 너무 흘려 어지러운 가운데도 모든 힘을 끌어모아 쓰러진 사내를 덮쳤다.
그러나 이를 목격한 다른 사내가 날쌔게 달려와 등에 검을 깊숙이 박았다.
"놈!"
근처의 누군가가 화난 나머지 비수를 던졌다. 같은 편을 구하려고 무작정 몸을 날린 사내는 쏜살같이 날아온 비수에 속절없이 당할 것 같았다.
그런데 때마침 누군가가 휘두른 검이 하필이면 비수와 충돌했다. 비수에 방해받은 자는 검의 궤적이 어긋난 바람에 상대의 공격에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검과 충돌하며 궤적이 바뀐 비수는 누군가의 어깨에 푹 박혔다.
누군가를 죽이려고 혹은 살리려고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변수가 되어 전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물론, 이 자리에 선 자들은 억지로 군대에 끌려가 타의로 전쟁터에 몰린 무고한 평민이 아니다.
이들은 무인이 되기 위해 무공을 익히고 칼을 들었으며, 땀 대신 피를 흘리는 칼날 위의 삶은 선택한 자들이다.
그럼에도.
구후영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구후영은 이러한 아수라장을 처음 보는 게 아니다.
장방선생의 독에 백 명이 넘은 사람이 죽었을 때도 구후영은 거기 있었고, 더 많은 공력을 위해 같은 문파끼리 속이고 죽이는 취화봉의 현장에도 있었고, 비급을 탐내 무고한 자를 죽이려는 귀검동에도 있었고, 천 명이 넘은 사람을 불태워 죽이고 역모죄까지 뒤집어씌우려는 사건에도 있었고, 역근경과 세수경의 주해본을 위해 무작정 충돌을 일으키고 심지어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 했던 자리에도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진 구후영이 약자였다. 사실 소림으로 갈 때는 이미 강한 힘을 얻어 약자라고 할 순 없었으나, 상대가 누군지 생각하면 여전히 약자가 맞았다.
그렇기에 세상의 무상함과 인간의 야박함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무력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럼 얼마나 죽여야 이 빌어먹을 싸움을 끝낼 수 있는 거요?"
지금은 아니다. 지금의 구후영은 힘이 있다. 마교가 대단한 상대인 건 맞지만, 구후영에겐 원경이 있고 옥무영이 있고, 막불위도 있다.
언제 올지 모를 종남칠검을 비롯한 종남파 고수들도 있고, 당분간은 같은 편인 화산 검종도 있다.
그런데도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에 구후영은 울화가 치밀었다.
"애송이가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용전향은 무조건 화산 검종을 다 죽인 다음, 기종의 도움을 얻어 섬서 북부의 관문을 모조리 열고 북원 기병을 안으로 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가능성은 아예 염두에서 배제했기에, 더 이상 머리 쓰길 포기했다.
그래서 구후영의 말에 뭔가를 떠올리는 대신 자존심을 세웠고, 그걸 솔직히 표출했다.
완고불화頑固不化.
구후영은 용전향의 모습에서 대화가 무의미함을 새삼 느꼈다.
'힘을 보여주기 전엔 호의가 구걸로 보이겠지.'
급작스럽게 벌어진 전투에 마음이 복잡했던 구후영이 드디어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하나를 죽여 셋을 살린다면, 그것 역시 공덕이겠지.'
고민이 끝남과 동시에 구후영의 검이 번뜩이며 용전향의 목을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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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포기하라니까."
산간 지역에 봄이 늦게 온다지만, 꽤 따뜻한 날씨다. 그런 날씨에 안 어울리게 두꺼운 천으로 만든 검은 장포로 몸을 꼭꼭 감싼 사내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돈 받고 일하는 거라서 사람 죽이고 싶진 않다고."
"당신은 누구요?"
막불손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낭패한 기색으로 질문했다.
"빨리도 물어본다."
혼자서 종남칠검을 포함한 육십 명이 넘은 종남 고수를 막아선 사내가 툴툴거렸다.
"일찍 물어봤으면 안 싸웠을지도 모르잖아. 난 보기보단 부끄러움이 많아서 자기소개를 잘 못 한단 말이야."
'이 새끼 성질 돋우려고 일부러 이러는 건가?'
막불손은 잔뜩 치민 화를 겨우 눌렀다.
"난 마교 이인자인 흑철黑喆이라고 한다."
"흑철?"
막불손이 중얼거리자 사내가 짜증을 냈다.
"흑면수黑面獸라면 알겠나?"
흑면수라는 별호에 막불손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놀랐다.
"흑면수라면 천마랑 사흘 동안 싸웠다는."
"거짓말이야."
흑철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괴물과 사흘씩이나 싸우는 놈은 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거야."
'흑면수라면, 돈이면 자기 부모도 죽인다는 놈이잖아.'
흑면수에 관한 소문을 떠올린 막불위는 내심 다행을 느꼈다.
"마교에서 얼마 받았소?"
"황금 이백 냥."
생각보다 큰 액수에 움찔했으나, 막불손은 과감히 질렀다.
"삼백 냥 드리겠소."
그에 흑철이 고개를 저었다.
"칼잡이라 그런지 셈이 약하네. 마교가 나한테 이백 냥 줬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여기까지 와서 너희랑 피 터지게 싸웠고."
먼지 한 톨 안 묻은 흑철의 검은 장포를 보며 막불손은 몰래 이를 갈았다.
"그런데 이대로 돌아간다? 그러면 마교에 황금 이백 냥을 돌려줘야 한다고. 그럼 내게 백 냥만 남겠지?"
아무도 찬성하는 내색을 하지 않자 흑철이 탄식했다.
"무인이 되기 전에 우선 사람이 되라. 종남에선 이런 거 안 가르쳐?"
"허튼소리 말고, 얼마 달라는 거요?"
"자. 난 지금 황금 이백 냥을 벌었어. 천산에서 먼 화산까지 발 아프게 달려오고 종남의 고수들과 싸우는 대가로 말이지. 그런데 삼백 냥을 받고 마교에 이백 냥을 돌려주면 백 냥을 번 게 되는 거야. 그러니 삼백 냥을 받으면 내가 백 냥 손해라고."
"그래서."
"이백 냥 버는 건데 백 냥 손해 보게 됐어. 즉 총 삼백 냥 손해인 거야. 그러니 그쪽은 내게 삼백 냥 더하기 삼백 냥 해서 육백 냥을 줘야 셈이 맞는다고."
"좋소. 황금 육백 냥 드리겠소."
"내놔."
"아니, 누가 은도 아닌 황금을 육백 냥씩이나 들고 다닌단 말이오."
흑철이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도둑질한 놈이 외려 몽둥이를 휘두른다더니. 내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주겠다고 해놓고, 줄 돈 없다고 지가 성내네?"
생각 같아선 일검에 죽여버리고 싶지만, 구후영의 도움을 받아 개량한 칠성진으로도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 상대다.
"은표를 받으시오?"
"받지. 은자로는 삼천 냥이다."
지역에 따라 황금 한 냥이 백은 넉 냥인 데도 있고, 닷 냥인 데도 있다. 그러나 막불손은 사람 목숨 갖고 흥정할 기분이 아니어서 망설이지 않고 가슴에서 삼천 냥 어치의 전표를 꺼내 흑철에게 건넸다.
"거래해줘서 고맙소."
전표를 받은 흑철이 막불손에게 공손한 태도로 포권했다.
"그럼 난 이만 황금을 돌려주고 떠나겠소. 혹시 내게 의뢰할 일이 생기면 천산에 와서 검은 삼각기를 눈에 잘 띄는 곳에 꽂으시오. 그럼 내가 찾아갈 거요."
말을 마친 흑철이 수직에 가까운 벼랑을 발로 툭툭 차며 옥녀봉 꼭대기로 쑥쑥 올라갔다.
날개 달린 새보다도 더 빠를 것 같은 모습에 종남 무인들은 돈으로라도 해결이 돼서 천만다행이라며 하나같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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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후영의 검이 용전향을 향하자 네 노인이 각자 무기로 구후영의 요혈을 찔렀다.
그러나 구후영은 자신이 공격받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용전향을 공격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깡.
이미 몇 번의 경험으로 피하면 피할수록 궁지에 몰림을 깨달은 용전향은 두 자루 단검을 교차해 구후영의 베기를 막았다.
'헉.'
마교의 사기를 위해 겨우 비명을 참았지만, 생각 같아선 목청이 터지도록 고래고래 외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천마고 뭐고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구후영을 죽이면 제자의 죽음에 분노한 천마가 다시 나타날까 봐 가슴에 꽉 찬 살의를 겨우 누르고 다른 세력에도 구후영을 건드리지 말라고 설득한 용전향이다.
그러나 구후영의 일격마다 귀문관이 눈앞을 아른거리자 당시 현명하다고 여겼던 결정이 더없이 후회됐다.
염압군방艶壓群芳.
아름다움이 모든 꽃을 누른다는 뜻으로, 구후영이 난화검법과 낙화검법을 결합한 초식 중 하나다.
이수대공以守代攻의 난화검법과 이공대수以攻代守의 낙화검법을 결합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어서 얼마 만들지 못했는데 개중 가장 쓸 만한 초식이었다.
"헉!"
구후영의 검이 자신만 노린다는 착각에 네 노인이 동시에 물러섰다.
"속았다."
네 노인은 나이가 들어 육체가 쇠퇴한 대신, 내공의 운용은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런 자들이 실질적인 공격이 아닌 초식과 기세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이만 죽어.'
어렵게 얻은 기회에 구후영은 방금 충돌한 여파를 미처 해소하지 못한 용전향을 향해 깔끔한 내려치기를 펼쳤다.
그에 지켜보던 자 모두가 더없이 경악했다.
'용 당주가 죽으면 교가 난장판이 된다.'
용전향은 대단한 고수가 아니다.
중원의 기준으론 대단한 고수지만, 마교 기준에선 아니다. 무공에 관한 이해와 경지만 높고, 실전에선 큰 활약을 못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련교의 정통이라는 이유와 대부분 세력과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는 정치력 등으로 꼭 필요한 사람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 네 노인은 물러서던 몸을 급히 멈추고 다시 구후영을 덮쳤다.
그때.
깡.
어느새 나타난 흑철이 양손을 교차해 구후영의 경천동지할 내려치기를 저지했다.
필살을 자신했던 공격을 실패한 구후영은 얼굴을 굳히며 몸을 흔들었다.
그에 목숨을 버릴 각오로 구후영을 덮치던 네 노인 모두 허탕을 쳤다.
"대단한 보법이군."
흑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구후영의 공격을 받아내며 팔도 몸도 떨렸지만, 감탄한 나머지 자신의 약세를 숨길 생각도 못 한 탓이었다.
"대단한 호신공이오."
구후영은 우선 용전향을 궁지로 몬 다음, 어려운 초식으로 귀찮게 방해하는 네 노인을 물리쳤다. 거기에 이어 필살을 자신한 공격을 펼쳤는데 막혀버렸고, 여력을 어렵게 짜내 동귀어진을 불사한 네 노인의 공격을 회피했다.
그에 몸도 마음도 탈진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의뢰금을 배로 줄 테니, 저자를 죽이시오."
운 좋게 죽음을 면한 용전향이 두려움이 실린 목소리로 흑철에게 말했다.
"다른 의뢰가 있어 그건 어렵겠소."
말을 마친 흑철이 품에서 황금 이백 냥을 꺼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참 아쉽게 됐소. 더 중요한 의뢰가 있어 당신의 의뢰는 부득이하게 거절해야 하오."
말을 마친 흑철이 눈을 질끈 감으며 황금을 용전향에게 던졌다.
"왜?"
얼떨결에 황금을 받은 용전향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대신, 작은 고민 하나 해결해주지."
말을 마친 흑철이 주변을 잊고 충돌 중인 원경과 강석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작가의말
내가 남긴 자산으로 각 분야 출중한 자들을 장려하는 상을 만들어라. 그러나 내 아내를 뺏은 수학자 같은 부류엔 절대 주지 마라. 단, 흑철만큼은 예외다.
- 노벨의 마지막 유언에서 발췌.
현대 수학은 흑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 식사 후 커피믹스로 입을 가시던 중에 아인슈타인이 뱉은 진심.
흑철. 그는 1+1=2를 진리로 신봉하던 고루한 수학계에 한 줄기 빛이었다.
- 서울대 법학과 초청 교수 카이·스트가 자신의 첫 강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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