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전승一人傳承
일인전승은 사부가 평생 한 명의 제자만 가르치는 걸 말하는데, 복잡하고 난해하여 하나부터 열까지 사부가 손잡고 가르쳐야 했고, 제자가 사람 구실을 할 즈음이면 사부가 이미 노쇠하여 따로 제자를 받을 여력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다른 이유로 일인전승을 고집하는 문파도 있지만.
일인전승은 무인이 급격히 많아진 송나라 때부터 서서히 줄었는데, 일부는 문파로 성장했고 대부분은 그대로 사라졌다.
"대장로도 오셨군."
무당 장문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송문검松紋劍을 허리에 차고 나타난 옥무영이 현영자를 향해 반갑게 외쳤다.
'송문검은 분명히 삼청전에 있었는데.'
삼청은 옥청, 상청, 태청의 셋이다. 이 셋을 함께 모신 곳이 삼청전이고, 각자 모신 곳이 옥청전과 상청전과 태청전이다.
무당에선 삼청전을 장문의 집무실로 쓰고, 삼청 중 으뜸인 옥청전을 장로들 집무실로 썼다.
상청과 태청은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썼는데, 중요한 손님은 상청전에서, 그렇지 않은 손님은 태청전에서 맞이했다.
무당은 얼마 전까지 직인을 찾느라 삼청전을 꼼꼼히 뒤졌고, 송문검이 멀쩡하게 있는 걸 분명히 확인했었다.
'내가 출발한 다음에 무당에 들러 검을 갖고 여기까지 왔다고 여기기엔 저놈의 내공이 너무 적다.'
현영자는 확실한 정보 하나라도 더 듣기 위해 삼 월 십오 일 당일에 양양에 도착할 정도로 늦게 출발했다.
비록 옥무영이 다른 무공과 비교해 경공이 사뭇 뛰어나다곤 하나, 부족한 내공 때문에 현영자보다 늦게 출발하여 일찍 도착할 가능성은 아예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는 말인데.'
현영자는 눈길을 돌려 옥무영과 함께 온 사내를 확인했다.
'옥무영 또래로 보이는군.'
표정도 자세도 동네 마실을 나온 사람처럼 편한 청수한 인상의 중년이었다. 얼굴만 봐선 불혹 정도로 보이나, 깊이 있는 눈을 봤을 때 나이가 더 많을 가능성이 컸다.
"장문께서 여긴 어쩐 일이오? 홍엽산장의 축하연은 나만 참석하기로 결정 난 거로 아는데."
짧은 사이에 수많은 고민을 마친 현영자가 태연한 얼굴로 옥무영의 인사에 화답했다.
"무당과 철혈방의 계약은 본 장문이 직접 서명하고 인장을 찍었으니, 축하연에도 당연히 참석해야지 않겠소?"
현영자는 상상한 적도 없는 옥무영의 기고만장한 태도에 화가 잔뜩 치밀었으나, 덕분에 머리는 오히려 차가워졌다.
'심약하던 놈이 저리 날뛰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설마 곁에 있는 사내를 믿고 저러는 걸까?'
"그렇다면 어서 이리로 오시오. 근데, 일행은 누구시오? 무당 사람이 아니니 주인께 말해 따로 자리를 마련해야 할 것 같은데."
"이분은 내 사부요."
옥무영의 뜬금없는 말에 현영자의 눈알이 정신없이 굴러가던 그때.
구후영 일행이 안에서 나왔다. 옥무영의 도착에 처음엔 다들 기뻤으나, 혹시나 함정일 경우의 대책을 논의하느라 이제야 나온 것이었다.
"젊은 친구."
옥무영과 함께 온 중년이 구후영을 향해 반갑게 외쳤다.
"풍 대협께서 여긴 어인 일로."
옥무영이 사부라고 소개한 사람은 다름이 아닌 풍불지였다.
"그간 무척이나 고심했음에도 검법에 관한 고민이 풀리지 않아 이렇게 찾아왔네."
말을 마친 풍불지가 품에서 천하검보가 적힌 두루마리를 꺼내 구후영에게 돌려줬다.
"혹시 젊은 친구는 그간 깨달은 게 없었나?"
지난해 구 월 십오 일에 풍불지가 일지봉을 찾은 건 우연이 아니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 은거하여 난화검법의 초식을 마저 잊으려고 엄청나게 노력했음에도 거듭 실패한 풍불지는 답답한 마음에 서안부에 갔다가 두전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물에게 맡긴 서신을 읽고 태원부에 갔는데, 마침 그날이었다.
풍불지가 당시 구후영을 찾은 건 난화검법을 품은 줄을 다시 확인하기 위함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음서가 이미 불타서 재가 된 후였고.
안타까움에 몸서리치는 풍불지가 보기 안쓰러워 구후영이 천하검보를 빌려줬다.
지금 나눈 대화의 진실은 풍불지가 반년이 지난 시점에 찾아와 전혀 도움이 안 된 천하검보를 구후영에게 반환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한 것이 전부다.
그러나.
'신검이 구후 장주에게 검법을 묻는다고?'
전후 사정을 모르는 자들에겐 신검이 비급을 들고 와서 가르침을 구하는 모습으로 비쳤고.
"안 그래도 아주 결정적인 걸 찾았습니다."
거기에 구후영이 쐐기를 박았고.
'뒈질.'
예상 밖의 전개에 현영자가 절망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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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하자면, 무당이 내 사부한테서 날 뺏은 것이오."
옥무영이 거만한 얼굴로 현영자의 발악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우리 풍옥문風玉門은 일인전승으로 수백 년 이어진 문파요."
풍옥문은 풍가와 옥가의 핏줄로 이어지지만, 일인전승인 특이한 문파였다.
"풍가는 양기가 강하고 옥가는 음기가 강하오. 육전신공六轉神功을 익히기엔 최상의 조합이었소."
육전신공은 아주 특이한 심법이다. 이 심법을 익힌 자는 경지가 절정에 이른 다음 모든 내공을 타인에게 양도하고 처음부터 다시 수련해야 한다.
문제는 육전신공의 내공을 받은 사람 가운데 구 할 이상이 막대한 기운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잃었고,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며 육전신공을 익힌 자들은 마인으로 몰려 강호의 추살령을 받았다.
그렇게 마공이 강호에서 사라지나 싶었는데, 우연히 풍가와 옥가가 육전신공의 구결을 손에 넣었다.
둘은 구결을 면밀히 검토하고 해석한 뒤, 몰래 익히기로 했다.
이들은 먼저 풍가가 육전신공을 익혀 절정에 이른 다음, 내공을 옥가에게 넘겼다. 한 명은 양기가 강하고 한 명은 음기가 강한 덕분에 내공을 받은 옥가는 전혀 위험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주 빠르게 절정의 경지에 이르렀다.
절정의 경지에 이른 옥가는 풍가의 아들에게 내공을 넘겼고, 풍가의 아들은 절정에 이른 다음 옥가의 아들에게 내공을 넘겼다.
이런 식으로 수백 년이 지나 풍불지까지 무사히 이어졌고, 열네 살이던 풍불지가 절정의 경지를 밟고 여섯 살이던 옥무영에게 내공을 넘겼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소. 내 사부가 사내 구실을 못 할 줄이야."
"애가 안 생겨서 그렇지, 구실은 정말 잘한다니까."
강호에 괜히 풍불지가 경박하다고 소문난 게 아니었다.
풍옥문의 특성상 제자가 자기 사부의 동생일 때도 있어 관계가 애매하다. 나이 차이도 적어 사부와 제자가 친구처럼 지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풍불지는 사람을 대함에 격이 없었다.
이게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소탈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데, 옥무영을 위해 어떻게든 아이를 낳으려고 이 여인 저 여인 건드린 바람에 평판이 나빠져 경박한 거로 결론 났다.
"열두 살 때 내 두 번째 사부가 나타났소."
풍불지의 내공을 전해 받은 옥무영은 아주 빠르게 절정의 경지에 이르렀다. 비록 육전신공의 특성상 절정 초입에 계속 묶일 테고 내공도 적어 보이겠지만, 당시 나이를 생각하면 누구라도 절세의 기재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옥무영이 우연히 무당 제자의 눈에 띄었고, 싫다는 옥무영을 반 납치하다시피 무당으로 데려가 제자로 삼았다.
"사부께서 그간 몇 번이나 무당에 죄를 물으려 했으나, 다 이 옥무영이 온몸을 던져 필사적으로 막았소. 안 그랬으면 사부 손에 무당 장로들이 다 죽는 건 둘째고, 무당산이 강호 동도들이 뱉은 침에 잠겨 사라졌을 거요."
'이런 개 놈의 자식이.'
힘에서 밀리고 명분에서도 밀린 현영자는 그저 속으로 욕할 방법밖에 없었다.
"직인은 이미 원래 자리에 돌려놨고, 방금 수백 명이 보는 앞에서 계약을 체결한 사실을 인정했소. 괜히 애쓰지 마시고, 호북 무림의 평화에 기여하시오."
의기양양한 얼굴로 승리를 선언한 옥무영은.
"사제. 내가 돈을 요구했다고 섭섭해하지 마. 나도 어쩔 수 없는 고충이 있었다. 양기가 아주 강한 아이를 찾는 데 이만 냥이나 썼어."
잠시도 쉬지 않고 구후영에게 말을 걸었다.
"아직은 시일이 부족해서 비실비실하지만, 반년 정도만 있으면 강호에 신필神筆의 명호가 진동할 거야."
옥무영은 검 대신 한 쌍의 판관필을 무기로 골랐다. 어차피 풍옥문은 내공만 내리 전하고 무공은 본인이 알아서 익히는 거기에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도 그간 꽤 노력했는데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돈이 더 필요한 건 제자를 위해 미리 정보료를 마련하려는 사부의 애정이랄까."
양기 혹은 음기가 강한 사람은 단명한다. 대부분이 열 살을 넘기기 힘들고, 오래 살아도 이립이 한계다.
그렇기에 미리 찾아두는 건 소용없고 절정에 이른 후에 수소문해야 하는데, 거기에 드는 돈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얼마 안 된 사이에 옥무영이 원하는 아이를 찾아낸 걸 보면, 돈값은 한 듯했다.
"필요한 얘기가 다 끝났다면 내 용건을 좀 보자."
풍불지가 참다못해 옥무영의 수다를 끊었다.
"무공 얘기라면 자리를 피하겠소."
현영자는 현재 가시방석에 앉아 불타는 숯덩이를 안은 기분이어서 어서 뜨고 싶었다.
"괜찮소. 무당 대장로면 무공에 독특한 견해가 있을 테니 듣고 좋은 의견을 내시오."
풍불지의 눈치 없는 행동에 옥무영이 몰래 고개를 비틀고 고소하게 웃었다. 현영자는 자리를 뜨고 싶었으나, 괜히 풍불지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억지로 궁둥이를 의자에 붙였다.
"난화검법의 검의는 유와 현입니다."
"맞아. 그건 나도 느꼈어."
"검법을 창안한 자는 팔이 하나입니다."
구후영의 말에 풍불지가 눈을 크게 뜨고 입도 커다랗게 벌렸다.
'이놈 진짜 물건이다.'
현영자는 단 두 마디로 풍불지를 무아지경에 빠뜨린 구후영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정학 사숙한테 태극권을 배우고, 풍불지와 검법을 토론하고, 신창과도 인연이 있고.'
현영자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구후영이 아까웠다.
'철혈방 방주만 아니었어도 어떻게든 손잡았을 텐데.'
그러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헛웃음이 나오려 했다.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 상황이 달라진 걸 이제야 깨닫다니.'
명분·이익·인맥·권모·술수 등 온갖 것으로 싸우는 강호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엔 결국 칼부림이다. 방금까지 무당은 그 칼부림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했는데, 풍불지의 출현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이젠 무당도 최악의 경우를 두려워해야 한다. 여전히 무당이 질 가능성은 없지만, 상대 숨통을 끊는 대신 자기 팔다리를 잘리고도 좋아할 바보는 세상에 없다.
있다면 그건 바보 말고 미친놈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끝낼 순 없지.'
조조는 동탁을 암살하러 갔다가 들킬 것 같으니 칠성검을 바치는 거로 위기를 모면했다. 칼을 뽑았다고 반드시 휘둘러야 하는 게 아니다. 가끔 칼을 돌려 상대에게 손잡이를 건네는 게 훨씬 나을 때도 있다.
'태극혜검만 해석하면 신검쯤이야.'
현현자가 죽기 전에 태극혜검은 자신이 새로 깨달은 게 아니라 그간 미처 몰랐던 삼풍 조사의 말씀들을 이제야 깨우친 거라고 했다.
태극혜검만 제대로 해석하면 무당이 풍불지를 넘는 건 단지 시간문제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득이나 최대한 챙기자.'
현영자의 머리에 새로운 계획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 작가의말
풍1 : 옥1 이 멍청한 새끼. 물 떠와.
옥1 : 풍2 이 멍청한 새끼. 물 떠와.
풍2 : 옥2 이 멍청한 새끼. 물 떠와.
옥2 : 풍3 이 멍청한 새끼. 물 떠와.
사이가 좋을 수밖에 없는 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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