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십이절七十二絶
소림의 무공은 역근경과 세수경에 뿌리를 뒀는데, 몸을 단련하는 역근경은 하나의 자세를 오래 유지하는 정공靜功이고 기를 단련하는 세수경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동공動功이다.
이는 가만히 앉아서 내공을 수련하고 외공은 계속 움직여야 하는 중원의 무공과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그 탓에 소림은 절간으로서 세인의 존경을 받았으나, 강호에선 이단아로 취급받았다.
이 상황이 타개된 건 송나라 때인데, 소림은 과감히 역근경과 세수경을 버리고 중원의 내공심법을 채택했다.
그때부터 소림은 전통 강호인 아미와 신흥 강자인 전진교와 함께 무림의 거두로 거듭났고, 원이 들며 아미가 몰락하고 명이 들며 전진교가 잠잠해진 틈을 타 무림의 태산북두 자리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소림에도 커다란 고충이 있었다.
소림은 역근경과 세수경을 버리고부터 고수를 끊임없이 배출했지만, 법여대사法如大師가 남긴 칠십이절기의 대부분이 위력을 잃었다.
이에 소림은 달마원을 만들어 칠십이절기를 연구했으며, 기존 무공을 개조하거나 새로운 절기를 만들어 위력을 잃은 무공을 대체하려 했는데.
만드는 건 물론이고 작은 수정조차 절대 쉽지 않았다.
명나라에 이르러 소림이 금강인을 다섯 개의 무공으로 나눈 것도 결국엔 칠십이라는 숫자를 채우려는 방편 중 하나였다.
일지선은 역근경과 세수경을 버리고도 위력을 유지한 얼마 안 되는 절기 중 하나로, 방장이 구후영의 대결 상대로 오명을 지목하며 오랜만에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슉!
위험을 감지한 구후영이 경공을 펼쳐 오명의 공격을 피했다.
동시에 연무장이 크게 술렁였다.
'무슨 무공이지?'
구경꾼들뿐이 아니라 소림의 스님들도 놀라서 웅성거리는 걸 확인하며 구후영이 의문에 잠겼다.
'탄기공彈氣功인가?'
육맥으로 기검氣劍을 뿜어낸다는 전설의 육맥신검을 논외로 치면 지법 중 최고의 경지로 여겨지는 탄기공은, 암기술인 탄지신통彈指神通에서 나온 무공으로 암기 대신 기를 뭉쳐 발사한다. 형체가 보여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암기와 달리 무형의 내공으로 공격하기에 기감이 뛰어난 사람 아니면 대처가 어렵다.
'일단 거리를 벌리자.'
상대가 암기술을 익혔을 땐 신속히 접근해 제압하거나 거리를 벌려 암기가 소모되길 기다리는 방식이 있다.
현재 오명의 일지선은 내공을 암기로 쓰기에 거리를 좁히는 게 맞지만, 구후영은 오히려 뒤로 물러났다.
슉! 슈슉!
'나는 왜 거리를 두는 게 옳다고 판단했지?'
오명의 공격을 어렵게 피한 구후영이 고민했다. 오명의 일지선을 견식 하자마자 거리를 벌리는 게 정답이라고 여겨져 망설임 없이 물러났는데, 여전히 속수무책인 상황에 왠지 자신이 실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빠르게 결정한 구후영은 불시에 경공을 펼쳐 오명에게 접근했다.
그런데.
슉!
상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왼손으로 기환氣丸을 발사했다.
'오른손으로 공격하고 왼손은 접근을 대비하고.'
서우망월犀牛望月의 자세로 기환을 피한 구후영이 뒷걸음질로 거리를 벌리며 고민했다.
'해법이 없네.'
구후영이 철포삼鐵布衫이나 금종조金鐘罩와 같은 외문기공外門氣功을 익혔거나 내공의 경지가 오명보다 몇 단계 높다면 몸으로 버티며 접근하겠으나, 둘 다 해당 사항이 없다.
'검을 쓸까?'
전대모검을 뽑아 기환을 막는 방법이 있긴 한데, 기환을 막느라 구후영의 전진이 느려지는 동안 오명이 거리를 벌리면 그만이다. 게다가 가까운 거리에선 기환을 피할 자신이 없으니 완전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사질. 잠시 멈추게."
구후영이 진퇴양난의 지경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때.
"이번 대결은 비긴 거로 하는 게 어떻소? 구후 소협은 경공이 뛰어나 오명의 일지선에 당하지 않겠으나, 마찬가지로 접근할 방법이 전무하오."
소림 방장이 끼어들었다.
'왜지?'
구후영의 경공이 뛰어나다곤 하나 오명 역시 느림보가 아니다. 경공과 일지선으로 적절히 압박하며 구후영을 연무장 구석으로 몰면 이길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반면, 구후영은 오명을 상대할 방법이 전혀 없다.
'오명의 내공이 부족해서는 아닌 것 같고.'
소림 방장이 왜 대결을 멈추려 하는지 고민하던 구후영은 문득 자책하는 마음이 생겼다.
'방장이 무의미한 대결이라고 여겨 순수한 마음으로 저런 말을 할 수도 있잖아.'
소림 스님들이 의심이 많다고 비웃던 자신이 떠올라 구후영은 얼굴이 살짝 상기됐다.
그때.
[사제. 오명의 승복을 봐라.]
옥무영의 전음이 구후영의 귀에 울렸고.
동시에 소림 방장의 얼굴이 크게 꿈틀거렸다.
말은 입에서 나와 사방으로 퍼져 일정 거리의 사람에게 모두 들린다.
전음은 말과 달리 상대의 귀 근처에 소리를 만든다. 고수일수록 소리를 상대 귀에 가깝게 만들고 멀리 안 퍼지게 할 수 있기에, 아무리 귀가 밝은 사람이어도 그 범위 안에 들지 않는 한 엿듣는 게 불가능하다.
단아가 경지가 오르며 오히려 전음을 보내지도 받지도 못한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청풍불의공은 기를 외부로 끊임없이 돌리기에 상대가 귀 근처에 소리를 만들 수 없다. 보내는 법은 경지의 변화에 따라 본인이 새로 깨우쳐야 하는데, 단아는 아직 깨닫지 못한 상태다.
그러나 만사에 예외가 있다고, 신창은 창법을 익히며 힘을 한 점에 모으는 법을 깨달았다. 덕분에 소리가 생기는 점을 포착해 엿듣는 방식을 터득했고, 소림 방장 역시 나름의 방법을 찾아냈다.
[뭔지 모르는데, 승복에 먼지가 많다.]
이어지는 전음에 구후영이 안력을 돋워 오명을 다시 살폈더니 옥무영의 말대로 승복에 먼지가 묻어 있었다.
한편.
'다행이군.'
두 번째 전음까지 엿들은 방장이 편한 얼굴이 되었다.
'들킨 줄 알았는데'
그러나 안도하는 것도 잠시.
"대결을 속행하겠소."
구후영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겨우 가라앉힌 걱정을 도로 끌어올렸다.
"오시오."
오명이 아무런 동요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에 구후영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경공을 펼쳐 오명에게 빠르게 접근했다.
슉!
"대단한 경공이군."
구후영이 접근하던 것과 비슷한 속도로 물러나며 일지선의 공격을 피하자 구경하던 누군가가 못 참고 입을 열어 감탄했다.
"경공은 뛰어난데, 혈기가 과해."
일행으로 보이는 자가 말했다.
소림 방장의 말처럼 구후영은 뛰어난 경공에도 불구하고 오명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오명은 양손의 여섯 손가락으로 일지선을 펼치며 구후영이 일 장 이내로 접근하지 못하게 완벽히 봉쇄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의 생각과 달리 객기가 아니었다.
"잠깐 쉬는 게 어떻소?"
수십 번의 접근 시도를 연속 실패한 구후영이 말했다.
"벌써 지친 거요?"
오명이 살짝 실망한 얼굴로 질문했다.
"스님의 승복이 더러워진 것 같은데, 먼지를 털고 대결을 재개하는 건 어떻소?"
경공을 펼쳐 전후좌우로 움직이면서 난리를 피운 건 구후영인데, 정작 승복에 먼지가 잔뜩 묻은 건 오명이었다.
"혹시."
오명이 오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아챈 거요?"
질문은 구후영에게 했으나, 정작 눈길은 방장에게 향했다.
"그렇소."
구후영의 대답에 옥무영은 갑자기 자신에게 짜증이 치밀었다.
'단서는 내가 잡았는데.'
뭣도 몰랐으면 차라리 괜찮겠으나, 오명의 승복에 먼지가 생긴 걸 먼저 발견한 건 옥무영이다. 그런데 여전히 갈피를 못 잡는 자신과 달리 구후영은 개중에 숨겨진 현기玄機를 알아챈 듯하여 보이자 자신의 멍청함에 화났다.
"더 대결하는 것도 의미가 없겠군. 소승은 승복하오."
말을 마친 오명이 구후영에게 합장례를 올리고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혹시."
몸을 돌리는 오명을 불러 세운 구후영이 잠깐 고민하고 입을 열었다.
"스님이 하려는 게 이거요?"
말을 마친 구후영이 양손을 들어 하늘로 기환을 연신 쏘아냈다.
"어떻게!"
구후영이 펼친 탄기공은 소리가 미약하고 위력도 보잘것없지만, 오명과 달리 전혀 수작을 부리지 않고 순수하게 내공으로 해낸 진짜배기였다.
"유좌宥坐가 뭔지 아시오?"
구후영의 질문에 오명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불경 공부에 집중한 스님도 알기 힘든 유좌를 무공에만 전념한 오명이 알 리가 만무했다.
"유좌는 오른쪽으로 기운 그릇이오. 이 그릇은 비어있을 때 오른쪽으로 기울고, 물을 절반 채우면 똑바로 서며, 물을 가득 채우면 넘어진다고 하오."
구후영의 말에 오명은 여전히 오리무중인 표정이었다.
"비면 기울고 반만 차면 바로 서고 넘치면 아예 넘어지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요."
유좌의 방법은 구후영이 깨우친 거다. 일지선의 방법은 다를 수 있으니 더 자세히 말하는 건 오히려 독이다.
"아미타불."
구후영의 뜻을 알아차린 소림의 스님들이 연신 염불을 외워 구후영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나, 고맙소."
일지선만 사십 년 가까이 익힌 자신도 실마리를 못 찾았는데 이제 스물인 구후영이 탄기공을 해내자 오명은 경외의 마음이 들었다. 거기에 비록 알아듣진 못했으나 조언이 분명한 말을 들었기에 감사하는 마음이 유달리 컸다.
"양보해주셔서 고맙소."
승자의 예를 마친 구후영은 무당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사제,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헤어진 지 십 년 넘은 친형제를 다시 만난 듯이 반기는 무당 제자들과 달리, 옥무영은 구후영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다그쳐 질문했다.
"돌멩이였습니다."
"돌멩이?"
"작은 돌멩이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다음, 부스러질 때까지 내공을 주입합니다. 그리고 발사하는 거죠. 딱 잘라 탄기공이 아니라고 할 순 없으나, 탄기공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편법이죠."
오명은 기환을 만들어 발사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다. 대신 돌멩이에 내공을 주입한 다음, 돌멩이가 터질 때 그 기운을 밖으로 쏘는 방식을 찾아냈다.
오명이 패배를 인정한 건 돌멩이가 몇 개 남지 않아 더는 탄기공을 펼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평생 일지선에만 몰두하여 다른 무공은 평범하기에 돌멩이 없인 구후영과 대적하기 힘들었다.
"그럼 발사 시기를 어떻게 정하는 거야?"
"적절한 내공을 주입하고 있다가 발사할 때 추가하는 거죠. 편법이라곤 하나, 쉬운 방식은 아닙니다."
구후영이 감탄을 섞어 말하자 옥무영은 기가 찼다.
'새삼스럽지만, 재수 없다.'
소림의 칠십이절기 가운데서도 위명이 자자한 일지선을 익힌 오명마저 편법을 써야 했던 일을 보자마자 이뤄낸 구후영이 겸손함까지 장착하니 달라는 게 없이 미운 기분이었다.
그러나 재수 없는 건 없는 거고.
"그럼 허즉기虛卽欹 중즉정中卽正 만즉복滿卽覆은 무슨 뜻이지?"
궁금한 건 궁금했다.
"그게 말입니다."
구후영이 금방 깨달은 탄기공을 간략하게나마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늙수그레하나 힘 있는 목소리가 둘의 대화를 방해했다.
"소림의 원철이 구후 소협께 한 수 가르침을 청하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공유대사와 나한당 당주 원병과 함께 소림 삼대 고수로 불리는 반야당般若堂 당주 원철이었다.
"부족하나마 칠십이절기 중 하나인 천수여래장千手如來掌을 익혔소."
- 작가의말
그간 무협을 쓰면서 소림이 여러 번 언급됐으나 겉돈 느낌이 강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소림에 관한 저의 설정을 최대한 자세히 펼쳐 보일 생각입니다.
Comment '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