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명지중冥冥之中
해도 달도 없는 깊은 지하. 광원이 없음에도 시야가 보장되는 괴이한 공간.
고르던 숨이 거칠어지며 구후영이 눈을 떴다.
가장 먼저 구후영의 주의를 끈 건 귀연이 코로 내는 쌕쌕 소리였다. 일행이 진법에 진입하고부터 청빈이 위종을 죽이기까지 꼬박 이틀 기간 눈 한 번 제대로 붙이지 못했던 탓인지 귀연은 차가운 바닥에 몸을 착 달라붙인 채 숙면을 하고 있었다.
'삼형.'
생각이 청빈에 미친 구후영은 갑자기 정신이 드는 느낌이었다.
'어찌 된 일이지?'
기혈이 왕성한 덕분에 차가운 바닥도 깊은 잠도 구후영의 몸을 굳게 하지 못했다. 구후영은 가볍게 상체를 일으켜 수정벽 너머를 바라봤다.
청빈이 태극권을 펼치고 있었다.
구후영은 멍한 얼굴로 청빈이 태극권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아무런 깨달음도 얻을 수 없었다.
청빈의 태극권은 분명히 완성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로 능숙하고 대단했다. 그러나 구후영은 아무런 깨달음도 얻지 못했다.
본디 깨달음은 완벽에 가까운 것에서 발견하는 작은 흠결이다. 모든 게 당연한 가운데 당연하지 않은 게 있으면 깊은 인상을 받게 되고, 거기에서 뭔가 끄집어내면 그게 바로 깨달음이다.
그러나 청빈의 태극권은 완벽이라는 말이 전혀 안 아까웠다.
그 탓에 구후영은 아무런 깨달음도 얻지 못했다. 모든 움직임이 극도로 자연스럽고 당연한 탓에 그저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깼구나."
똑같은 태극권을 계속 반복하던 청빈이 상체를 일으킨 구후영을 발견하고 반갑게 외쳤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구후영의 질문에 청빈이 뒤통수를 긁었다.
"정학 진인이 내 몸을 빌려 뭔가를 하셨다. 그게 뭔진 기억이 안 나지만."
말을 마친 청빈이 벽에 가서 기관을 눌렀다. 수정벽이 서서히 올라가자 구후영은 몸을 일으켜 안으로 들어가 천공교검을 살폈다.
여전히 단단하나 바위나 쇠를 두부처럼 자르던 예기는 어느새 사라졌다. 구후영은 천공교검의 손잡이와 검날을 다시 조합한 다음 허공에 몇 번 휘둘렀다.
이미 무기에 구애받는 경지가 아니지만, 익숙하던 감각이 아니어서 왠지 마음 어딘가가 허전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얘기 좀 해봐."
청빈은 구후영이 천공교검을 수습한 후에 자신이 궁금한 바를 질문했다.
구후영은 간단히 청빈이 한 일을 설명했다.
"아쉽구나. 내가 저기 이형의 금강부동과 같은 대단한 신법을 펼쳤다는 건데. 뭐든 알았으면 너한테 알려줄 텐데."
"괜찮습니다."
청빈이 진심으로 아쉬운 표정을 짓자 구후영이 웃었다.
"제겐 제 길이 따로 있습니다."
그에 청빈이 아쉬운 표정을 거두고 대견하다는 듯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어."
둘이 대화하는 사이 원경이 깼다. 청빈은 정학이 자신한테 빙의해서 뭔가 했다는 얘기를 한 번 더 했고, 이어서 깬 풍불지한테 똑같이 반복했다.
약 일각 뒤, 모든 사람이 깼다.
"진짜 개운해. 이렇게 푹 잔 적이 근 십 년 동안 있었나 싶구나."
팽창회가 기지개를 쭉 켜며 말했다.
"이제 어쩔 생각이지?"
풍불지가 질문했다.
"우선 이 안을 살펴 진법 위치와 가동하는 방법에 대한 단서를 찾아야지."
악불형이 대답했다.
넷 모두 무공에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나 악불형과 팽창회는 그 정도가 심했다. 그렇기에 언젠간 무공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예사롭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 그게 좋겠다."
일행은 건량으로 허기만 채운 다음 밖으로 나가서 수많은 건물을 일일이 살폈다.
'지하도시.'
'귀검동.'
구후영은 수많은 건물 중에 지하도시와 귀검동을 방불케 하는 건물 두 개를 발견했다.
귀검동을 연상케 하는 건물은 일행이 나온 건물과 비슷한 크기였고, 지하도시를 연상케 하는 건물은 서른 개에 육박하는 작은 건물로 이뤄졌다.
"제기랄. 영약이나 신병이기는 바라지도 않았어. 그래도 비급 쪼가리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지치지도 않고 모든 건물을 뒤진 풍불지가 툴툴거렸다.
자신이 익힌 무공의 끝을 미처 보지 못한 셋과 달리 풍불지는 한계에 이르렀고, 자신에게 영감을 줄 높은 수준의 깨달음이 시급했다.
#
일행은 오던 길을 그대로 밟아 진법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진법은 밖으로 나가는 일행을 괴롭히지 않았다.
"잠깐."
걷는 내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악불형이 갑자기 큰소리로 일행의 주의를 끌었다.
"아까 지하에 있던 건물 중 하나를 곤륜의 서쪽 끝에서 본 적이 있어. 조금 다른 부분이 있긴 한데, 왠지 느낌이 거기가 맞는 거 같아."
그에 풍불지가 눈을 반짝였다.
"가볼까?"
수호자들은 자신이 지키는 진법에서 무공 혹은 술법을 깨달았다. 그렇지 못한 자가 훨씬 많았지만, 서불과 귀검자는 그랬다.
특히 위종은 귀검자일 적에 육십 개가 넘은 진법을 봤다. 원래대로라면 서불보다 훨씬 강해야 하지만, 인간이란 종의 한계 때문에 그러하지 못했다.
"그래. 한 번 가보자."
풍불지가 약관이 되기 전, 남은 셋이 약관일 때.
네 사람은 의기투합해 함께 강호를 종횡하는 꿈을 꾸었었다.
이십 년이 넘게 흐른 지금. 일행은 끝내 젊은 시절의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그래. 오랜만에 술도 마시고 기루도 가고."
풍불지의 말에 넷 모두 한 십 년은 젊어진 느낌이었다. 그런데 팽창회가 거기에 초를 쳤다.
"난 팽가부터 들러야 해."
팽창회는 초식과 심법이 적힌 책자를 팽가에 전달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했다.
"그래. 잠깐 팽가에 들렀다가 가자."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기에 강자 한 명이라도 더 있는 게 나았다.
"너희도 함께 가자."
그런 의미에서 풍불지가 구후영 등에게 동행을 요청했다.
"그건 어렵습니다."
구후영은 단아를 찾는 일이 최우선이다. 원경은 현월궁에서 출발하기 전에 받은 서신으로 모용연의 임신 소식을 알았다. 옥무영은 청성파의 일도 일이고, 둘째를 만드는 일도 일이다.
"젊은 놈들이 풍류를 몰라."
셋의 거절에 삐친 얼굴로 꾸중하듯 한 마디 던진 풍불지가 경공을 펼쳐 사라지자 남은 셋도 그대로 떠났다.
#
일행은 남쪽으로 쭉 가다가 강을 만나자 뗏목을 만들어 탔다.
뗏목은 구후영 일행을 모용세가가 있던 궤룡까지 실어다 줬다.
"귀연은 괜찮을까?"
일행은 뗏목을 버리고 육로를 선택했다. 이대로 강을 타면 바다에 이르고 만다. 차라리 여기서 내려 경공으로 산해관에 가는 게 훨씬 가깝고 빠르다.
"무공을 안 익혔다지만 간단한 진법만으로도 웬만해선 위험한 일이 없을 거야."
귀연은 이틀 전에 사부의 유언을 지키러 가야 한다면서 일행과 작별했다. 다들 걱정이 태산이었으나 정작 귀연 본인은 자신의 안전을 십분 자신하는 눈치였다.
한편.
"하늘의 안배는 참으로 놀랍구나."
간단한 봇짐을 멘 귀연은 백두산 모처의 기운이 맑은 곳에서 발길을 멈췄다.
"이제 모든 게 끝났겠지?"
귀연이 자신의 바람을 중얼거리며 백 개의 점괘를 하늘에 던졌다. 모든 점괘가 바닥에 떨어졌고, 세 개의 점괘만 몸을 세웠다.
"아직 끝이 아니라고?"
점괘를 해석한 귀연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 추측이 틀린 건가? '의무'는 '지식' 때문이 아닌가?"
수호자는 진법을 수호할 '의무'가 있다. 이러한 '의무'는 죽음으로도 벗을 수 없는 굴레였다.
간장과 막야는 '영면'으로 의무를 벗어났다. 그러나 영면은 죽음과 다르지 않았다.
죽기 싫었던 서불은 다른 방도를 모색했다.
'의무'는 '지식' 때문이다. '지식'을 버리면 '의무'도 사라진다.
서불은 '지식'을 버렸고, 그 뒤로 '자유'를 얻었다.
"여긴 기운이 부족해."
점괘 결과에 불만을 표한 귀연은 기운이 훨씬 맑은 곳을 찾아 발길을 옮겼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 하늘의 뜻을 읽지."
원하는 곳을 찾은 귀연은 옷매무시를 단정히 하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점괘를 힘껏 던졌다.
과연, 아까와는 다른 점괘가 나왔다.
"제길."
그러나 점괘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제시했다.
다행히 이번 점괘는 좀 더 많은 걸 알려줬다.
"천마가 이래서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였구나."
위종은 만일에 대비해 모용건을 준비했다. 천마가 잠들지 않았거나 다시 깰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러나 천마한테 간파당했고, 모용건이 죽음으로써 대비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런데 세상에 공청석유로 불사의 몸을 이룬 자가 하나 더 있었다. 결국 천마는 여전히 절반의 힘을 잃어야 했다.
절반의 힘으로 싸워 이긴다는 보장이 없고, 점괘마저 죽어야 복수가 이뤄진다고 했기에 천마는 저항을 포기했다.
"공청석유의 힘을 얻은 자가 자수정을 찾으면 수호자가 부활한다고?"
귀연이 깊이 탄식했다.
"오늘 특별히 점괘를 한 번 더 봐야겠어."
세상의 흐름은 무작정 정해진 게 아니다. 천기를 엿보고 뭔가를 하면 소위 말하는 운명이 바뀐다.
가끔은 그저 엿보는 것만으로 흐름이 달라지기도 하고.
그렇기에 귀연은 웬만해선 점괘술을 사용하지 않으려 했으나 사안이 하도 중대하여 확인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느리게 숨을 고른 귀연이 백 개의 점괘를 허공으로 던졌다.
세 개의 점괘가 섰다.
"오백 년. 조선. 끝."
점괘를 해석한 귀연이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향해 외쳤다.
"이 똥통에 처박혀 뒈질 호로새끼야."
'의무'를 벗어나기 위해, '자유'를 위해, '지식'을 버렸다. 그런데도 하늘이란 양심 없는 놈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진법을 수호하는 '의무'는 사라졌으나 그에게 훨씬 큰 '책임'을 씌웠다.
"오백 년 뒤에 조선의 땅에서 이 모든 게 끝난다라. 상고의 힘이 다시 세상에 드러나는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인가?"
상고의 힘이 다시 드러나면 인간은 멸망한다. 그러면 끝이라는 점괘에 부합한다.
마찬가지로 상고의 힘이 영원히 사라지면 귀연의 '책임'이 끝난다. 귀연이 진심으로 알고 싶었던 게 자신이 언제 진정으로 '자유'롭게 되는지이기에 상고의 힘이 아예 사라진다는 해석도 맞는다.
"네놈은 늘 이래. 언제 한 번 제대로 알려주는 법이 없어."
하늘을 향해 구시렁거리던 귀연이 갑자기 이마를 찌푸렸다.
"그럼 구후영이 모든 걸 끝낸다는 점괘는 틀린 건가?"
그 점괘를 철석같이 믿었기에 구후영 곁에 찰싹 붙어서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그저 흐르는 대로 행동했다.
괜히 자신의 의지가 섞이면 일이 이상하게 흐를까 봐 '한계' 이상의 힘이나 지식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내가 실수한 적 있는가?"
한참 고민해도 딱히 실수한 부분을 찾아내지 못한 귀연은 바닥의 점괘를 수습해 봇짐에 쌌다.
"조선이라. 거긴 어떤 곳일까? 진정 그곳에서 내 빌어먹을 '숙명'이 끝을 보는 걸까?"
점괘는 틀리지 않는다.
그저 해석이 틀릴 뿐.
어쩌면 오백 년 뒤 조선에서 귀연이 영원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괘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으면 또 어떠하리.
진시황도 한무제도 영생을 탐했다.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 건지도 모르고.
"고작 수십 년을 사는 애새끼들이 뭘 알겠어."
나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태연히 뱉은 귀연이 봇짐을 다시 메고 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작가의말
이번 화에서 보여드린 귀연과 관련한 설정은 차원 이동물과 현대물의 기초 설정이 됩니다. 만유기와 운명의 협주자 역시 다른 글을 염두에 두고 설정을 짠 거긴 한데, 언제 글을 시작할지는 아직 계획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글의 설정과 관련한 두 개의 글은 차후 쓸 3개의 글 중 2개가 될 것입니다. 남은 하나는 스포츠 장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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