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엽편주一葉片舟
높은 파도가 조각배를 때렸다. 왜소하고 가벼운 조각배는 속절없이 휘말려 밀면 밀리고 흔들면 흔들렸다.
장구한 세월 동안 흙과 자갈을 쓸어버리고 바위를 갉아먹으며 꺾이지 않는 위세를 자랑했던 한강은, 위태위태하나 침몰하지 않는 조각배에 화났는지 더 큰 파도를 보냈다.
'꼭 내 신세 같아.'
조각배에 탄 구후영이 속으로 한탄했다.
'먼저 덮친 파도가 채 잦기도 전에 새 파도가 덮치는구나.'
다행히 유구한 세월을 거쳐 거듭 개선된 기술로 만든 조각배는 한강의 거친 파도에도 잘 버텨냈다.
"조카. 무슨 걱정이 있는 건가?"
마주 앉은 연무쌍이 걱정스럽게 질문했다.
"거센 바람과 거친 파도에도 끄떡없으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작은 배는 작은 풍랑에 맞서고, 큰 배는 큰 풍랑에 맞선다. 당면한 풍랑을 이기려고 하면 더 큰 풍랑을 만나게 될 뿐이다."
"그렇다고 이 조각배처럼 평생 쓸려 다닐 순 없잖습니까."
"네 할아버지와 아버지, 내 아버지 모두 파도에 쓸려갔다. 홍엽산장의 장주는 대대로 양양 내지는 호북 무림과 백성의 우러름을 받았고, 내 아버지는 비록 사대신협에 미치진 못하나 권왕으로 불리던 분이다."
"덕이 있고 힘이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까?"
"덕이 아무리 높고 커도 이익 관계를 이길 수 없고, 힘이 아무리 강해도 강호의 파도를 넘을 수 없다. 천마처럼 강한 자도 결국엔 마교에 얽매이지 않았느냐."
연무쌍의 말에 구후영은 문득 커다란 의문이 들었다.
'천마는 왜 마교 교주가 되었을까?'
당시 천강구절의 실력과 명성이면 문파 하나 만들어 무당처럼 키우는 게 일도 아니다. 굳이 다 망해가는 명교의 교주 자리를 탐낼 필요가 전혀 없었다.
"파도에 맞설지 순응할지 매 순간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
구후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연무쌍이 한 마디 더 보탰다.
"홍엽산장을 지켜보며 내가 내린 결론이다. 내가 세상의 풍파를 다 겪은 게 아니어서 정답이라곤 못 하겠지만, 흘려듣진 말아라."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래. 이젠 잡념을 털고 철혈대회에 집중하자. 저기가 바로 구산龜山이다."
말을 마친 연무쌍이 경공을 펼쳐 강변으로 뛰었다. 구후영 역시 바로 운기하여 연무쌍의 뒤를 따랐다.
둘뿐이던 승객을 잃은 조각배는 물결에 떠밀려 외롭게 하류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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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을 현지 사람들은 구궁산九宮山으로 부른다. 그래선지 철혈방의 총단이 있는 산꼭대기에 세운 장원의 이름도 구궁산장이다.
사실상의 실권은 금검당과 은도당이 나눠 가졌고, 철혈방을 찾는 손님도 홍엽산장에서 접대했기에 구궁산장이 철혈방의 총단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강호에 드물었다.
심지어 철혈방 소속도 절반 정도는 구궁산장의 존재를 몰랐었다.
그러다 십여 년 전에 구후율이 의문의 죽임을 당하고부터 손님을 접대하는 일을 구궁산장에서 맡게 되었고, 그래선지 새로 지은 건물이 많았다.
'근래에도 토목공사를 했나 보다.'
코를 찌르는 생나무 냄새에 구후영의 걱정이 깊어졌다.
"뭔가 조짐을 발견한 거니?"
구후영의 얼굴이 굳은 걸 발견한 연무쌍이 질문했다.
"최근 장원을 증축한 것 같습니다. 홍엽산장을 구심점으로 삼으려고 했다면 여기에 쓸데없는 돈을 쓰지 않았겠죠."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연무쌍은 아직 강호 전체가 커다란 소용돌이에 휘말렸음을 절실하게 느끼지 못했다. 최대한 철혈방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구후영과 달리, 연무쌍은 철혈방과 적대 관계만 아니면 된다고 가볍게 생각했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파도가 배를 쓰러뜨리는 건 아니다. 가끔은 위태로운 배를 일으키는 '착한' 파도도 있다.
짧은 대화를 마친 둘은 장원의 대문으로 갔다. 홍엽산장의 대문보다 반 배는 큰 총단의 문 위엔 철골쟁쟁鐵骨錚錚 네 글자를 새긴 커다란 편액이 있었다.
[저거 처음 보는 편액이다. 왠지 조짐이 좋지 않구나.]
아직 전음을 익히지 못한 탓에 구후영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둘은 어느새 대문 앞에 이르렀다.
"연 대협께서 왕림하셨군요. 외람되지만, 일행분은 누구십니까?"
연무쌍을 본 접객 담당자가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홍엽산장 장주 구후영이오."
구후영의 대답을 들은 접객 담당이 갓 편 허리를 다시 숙였다.
"장주께서 직접 왕림하셔서 대회를 빛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송구하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접객 담당의 눈치를 받은 무인 한 명이 안으로 달려갔다.
"새벽에 출발했더니 피곤하군. 어서 쉬고 싶소."
구후영이 편한 미소를 유지한 채 접객 담당을 은근히 닦달했다.
"홍엽산장의 장주와 여의경천 연 대협이 왕림하셨는데 방주께서 직접 나와 영접해야죠. 발이 특별히 빠른 자를 보냈으니 오래 기다리지 않을 겁니다."
'오늘은 길보다 흉이 많겠구나.'
접객 담당은 아무한테나 맡기지 않는다. 그러나 하찮은 일로 여겨져서 중요한 사람이 맡는 경우도 드물다.
구후영은 접객 담당의 여유 넘치는 태도와 주변 사람들이 접객 담당을 조심스럽게 대하는 모습에서 불길한 냄새를 맡았다.
"어허. 귀한 손님이 오셨군."
약 반 각이 흐르고 안에서 구레나룻이 허연 노인이 달려 나왔다.
"홍엽산장의 구후영이오."
구후영은 예에 따라 먼저 자기 신분을 밝혔다.
"철혈방의 방주 동엽이오. 소문만 무성한 구후 장주를 만나게 되어 실로 반갑소. 혹시 기다리느라 무료했다면 주인 된 자로서 정중히 사과하오."
"별말씀을. 편액의 멋진 글씨를 감상하느라 무료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소."
'괜히 걱정했구나.'
구후영이 동엽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는 걸 본 연무쌍은 오는 내내 걱정했던 자신이 우스웠다.
'낙화문의 장문 승계식 때도 담진웅에게 한마디 안 지고 팽팽하게 맞섰던 아인데. 평소 모습에 내가 현혹됐구나.'
"그랬소? 하하. 구후 장주가 학문에도 조예가 깊은 줄은 미처 몰랐소. 나도 서예에 관심이 많은데, 결례가 아니라면 저 네 글자에 대한 구후 장주의 고견을 묻고 싶소."
구후영은 뒷짐을 지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나서 편액의 글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고견이라긴 부끄럽고, 그저 얕은 소견으로 들어주셨으면 하오. 철골쟁쟁 네 글자 중에 가장 어려운 건 골자요."
구후영의 말이 의외였는지 동엽이 고개를 갸웃했다.
"철과 쟁은 모두 금자변金字邊이 있어 글자 자체에 기세가 있소. 유독 골이 금자변이 없어서 왜소해 보이오."
"오호. 참으로 독특한 견해요."
"편액을 보면 철골쟁쟁 네 글자가 차지한 크기가 똑같소. 필자는 골을 넓게 쓰는 거로 남은 세 글자보다 획이 적고 구조가 다른 문제를 해결했소."
철과 쟁 모두 좌우 구조인데, 골만 상하 구조다.
"이는 필자가 골을 남은 세 글자와 똑같이 중요시한다는 뜻이오."
동엽은 구후영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필자가 의기를 중요시하고 정의를 위해 선뜻 나서는 성인군자라면 굳이 골자를 과시하듯이 저리 크게 쓰지 않았을 거요. 저 골자는 본인의 성정을 나타낸 게 아니라 편액을 받은 자에게 꾸며서 보인 거요."
동엽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편액의 필자가 방주와 어떤 사인지 모르나, 저자가 방주에게 함께 뭔가를 도모하고자 하면 단호하게 거절하시오. 자신을 꾸며 보이고 입에 발린 소리만 하는 위선자일 가능성이 아주 크오."
"걱정해줘서 고맙소. 아쉽게도 편액을 쓴 분은 이미 작고하여 세상에 없소."
"아쉽게 됐소. 비록 군자는 아니나, 철과 쟁의 획이 간결하고 흔들림 없는 걸 보면 난세에 입신양명할 사람으로 보이는 데 말이오."
"하하. 이것 좀 보게. 내가 주책없이 귀한 손님을 계속 밖에 세워뒀군. 어서 안으로 드시오."
[내용은 모르나 누군가의 전음을 받았다.]
[들립니까?]
갑자기 구후영이 전음을 하자 연무쌍은 깜짝 놀라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삼촌이 가르친 방법으론 안 됐는데, 방금 동 방주가 받은 전음을 흉내 내니까 잘됩니다.]
'절세의 기재라는 게 이런 아이를 말하는 거구나.'
연무쌍은 현재 적진이나 다름없는 곳에 가고 있음도 잊고 기쁘게 웃었다.
[편액의 출처를 알아보려 했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래도 방주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으니 허탕은 아니군요.]
[잘했다. 뭔가 결정을 내리면 의견을 묻지 말고 네 생각대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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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엽이 한 걸음 정도 앞장서고, 구후영과 연무쌍이 뒤를 따랐다.
[우릴 경계하는 것 같지?]
[자신이 꿍꿍이가 있으면 다른 사람도 있어 보이니깐요.]
동엽은 둘 앞이 아닌 좌측에서 길을 안내했다. 한 걸음 앞서긴 했으나 둘에게 등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사실 손님을 안내할 때 동엽처럼 걷는 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무공 경지가 동엽보다 훨씬 높은 둘에겐 상대의 몸짓에 어떤 생각이 깃들었는지 훤히 보였다.
'이 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동엽은 철혈방 내에 자신의 세력이 전혀 없다. 당연히 혼자 힘으로 철혈대회를 열 수 없다. 게다가 장선의 말로는 철혈방에 전혀 애정이 없고 그저 떨어지는 떡고물에만 관심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자가 나서서 철혈대회를 연 저의가 궁금했었는데,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 듯한 모습에 걱정이 커졌다. 지시한 자가 금검당이나 은도당이어도 골치 아프고, 둘 다 아니면 더더욱 문제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섣부른 추측은 일을 그르칠 뿐이다.'
하지만.
"아직도 자리를 내지 않은 거요?"
방에 도착해 동엽이 난감해하는 얼굴을 보니 또 머리가 복잡해졌다.
거기엔 상이 딱 여덟 개 있었다.
'아예 자리도 안 준비한 거였어?'
홍엽산장이 안 올 거로 생각해서 자리 여덟 개만 만들었다고 생각하기엔, 철혈대회가 동네잔치가 아니다.
안 오는 게 확실하더라도 구설에 오르지 않기 위해선 자리를 준비하는 게 상식이다.
'내가 상상했던 최악의 상황이구나.'
구후영은 알은체도 안 하는 공형선을 보고 다른 가능성을 다 지워버렸다.
'금검당과 은도당이 손을 잡았구나.'
금검당과 은도당이 손을 잡으면 홍엽산장이 필요 없다. 이들이 여태까지 홍엽산장을 필요로 했던 건 금검당과 은도당의 모순으로 철혈방이 와해할까 봐 걱정해서였다.
할머니와 동생을 피신시키고 장선과 단아가 남아서 홍엽산장을 지키기로 한 것 모두 이러한 가정에서 출발했지만, 최악의 경우와 수많은 가능성에 대비하여 가장 훌륭한 대처이기 때문이지, 금검당과 은도당이 손잡았다고 확신해서 내린 결정은 아니다.
그러나 점점 추측이 현실이 되어가는 듯하여 보이자 마음이 답답했다.
'굳이 부른 건 선을 확실히 그으려고 했거나.'
구후영은 최악의 경우가 떠올랐다.
'홍엽산장의 피를 제물로 삼아 새로운 동맹을 강화할 생각이거나.'
어느 경우든 딱히 반가운 일이 아니다.
'지금은 고민 말고 결단이 필요하다.'
구후영은 단아와 상의했던 대책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어찌 하는 게 맞는지 신중히 고민했다.
'일단 후퇴하자.'
고민을 멈춘 구후영이 소리 내 웃었다.
"하하. 다들 반기지 않는 것 같으니 본 장주는 이만 돌아가겠소."
- 작가의말
고충을 토로하니 컨디션이 일부 돌아왔습니다. 역시 혼자 속에서 썩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닌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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