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중지세伯仲之勢
황하지수천상래黃河之水天上來
황하의 물은 하늘에서 내려와,
분류도해불복회奔流到海不復回
바다로 흘러 다시 돌아오지 않누나.
가랑잎 부서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릴 정도로 연무장이 고요해진 가운데.
"혹시 대결을 기다리는 스님이 몇 분 계시는지 알 수 있겠소? 내공을 얼마나 아껴야 하는지 몰라서 말이오."
구후영이 차갑고 거만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실수했다.'
속은 간장과 식초를 섞어 사발째 들이켠 것처럼 쓰렸다.
'좋은 마음으로 한 말이 꼭 좋게 들린다는 법이 없는데.'
유수형을 간단히 이겨 실력 차이를 보인 거나 오명을 망신 안 주고 이긴 건 잘한 일이나, 대결이 끝난 다음 일지선에 관해 왈가왈부하지 말았어야 했다.
구후영의 행동을 누군가는 호의로 여길 수 있지만, 누군가는 자존심이 상할지도 모른다.
바로 원철처럼.
"내가 마지막이오."
원철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방장이 시킨 건 아닌 듯하구나.'
구후영은 귀로 원철의 대답을 들으며 눈으론 방장의 표정을 살폈다. 결과, 원철이 나선 게 소림 방장의 뜻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지만.'
"사제, 침착해야 한다."
구후영의 걱정이 겉으로 드러났는지 옥무영이 위로의 말을 꺼냈다.
"네."
대답은 태연하게 했지만, 구후영의 속은 쓸개를 삼킨 것처럼 썼다.
구후영이 아무리 신검과 신창과 현현자와 관련해 온갖 소문이 무성하다고 쳐도, 필경 강호에 이름을 알린 지 오래되지 않은 갓 약관의 청년이다.
소림으로선 오명처럼 배분이 적당하고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고수를 대결 상대로 내보내는 게 최선이었는데, 불필요한 호의가 거만으로 오해받아 현현자와 비슷한 고수로 평가받는 원철이 직접 나섰다.
그나마 위안으로 삼을 만한 부분은 원철이 마지막 대결 상대라는 것이다.
이기든 지든.
"보신保身이 먼저고 승부는 나중이다. 위험하면 그냥 패배를 인정해."
끝까지 걱정을 못 놓는 옥무영에게 미소를 지어준 구후영은 마음을 다스리며 연무장 중앙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는 원칠을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더 대단하구나.'
그냥 기세만 따지면 원철이 신검이나 신창보다 더 강하게 느껴졌다. 다행히 구후영은 타고나길 성정이 단단하여 크게 위축하거나 하진 않았다.
'사형 말을 명심하자. 이기고 지는 것보다 내 한 몸 지키는 게 우선이다.'
일 장 거리를 두고 멈춘 구후영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원철과 눈을 맞췄다.
"시작하겠네."
뭐가 그리 급한지 구후영이 채 자세를 잡기도 전에 원철이 소매를 떨쳤다.
그에 수십 개의 손바닥 환영이 순식간에 나타나 허공을 꽉 채운 채 구후영을 엄습했다.
불광보조佛光普照.
'위험하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구후영이 등의 전대모검을 뽑아 신속히 휘둘렀다.
홍엽만산紅葉滿山.
구후영이 낙화검법과 난화검법을 합쳐 만든 첫 번째 초식으로, 전대모검이 순식간에 수십 개로 늘어났다.
"큰소리칠 만하군."
허공을 꽉 채운 채 그물처럼 구후영을 조여가던 손바닥들이 단 하나의 초식에 말끔하게 사라지자 원철이 살짝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장법은 크게 내력장內力掌과 외력장外力掌으로 나뉜다. 외력장은 손바닥을 돌처럼 단단하게 단련해 육체를 타격하고, 내력장은 내공으로 내부를 타격한다.
그러나 현재는 순수한 외력장이나 순수한 내력장이 없어 이런 구분은 사라지다시피 했고, 대신 넓은 범위를 타격하는 산장散掌과 위력을 좁은 범위에 집중한 첩장疊掌으로 나누는 게 일반적이다.
천수여래장은 산장과 첩장을 모두 극한으로 품은 대단한 장법인데, 불광보조는 산장에 속했다.
살상력은 구후영 정도의 고수에게 타격을 입힐 정도로 세진 않으나, 초식의 정교함은 강호에 알려진 장법 초식 중에 세 손가락에 들 만하다.
"내가 펼친 건 천수여래장의 세 번째 초식인 불광보조네. 자네의 초식이 궁금하군."
"홍엽만산이라고, 몇 달 전에 만들었소."
구후영은 한때 풍불지를 따라 초식을 잊으려 했으나, 무당 장로들과 태극혜검의 구결을 토론하는 과정에 각자 알맞은 방식이 따로 있음을 깨달았다.
사대신협의 예만 봐도 신창은 공간을 제압하고 힘을 한 점에 모으는 방식을 선호했고, 풍불지는 폭주족에 어울리는 간결한 공격을 선택했다. 신장은 확실치 않으나, 가볍게 나눈 대화로는 심후한 내공과 뛰어난 인내심으로 상대를 소모하는 전투 방식인 듯했다.
구후영은 이들과 비교해 자신의 장점이 뭔지 깊이 고민했고, 복잡하고 어려운 초식을 정확하게 구현하는 부분에서 대부분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때부터 구후영은 낙화검법과 난화검법의 초식을 참조하여 강한 초식을 만드는 데 전념했는데, 홍엽만산이 개중 하나다.
하지만.
"흥."
불광보조에 대적할 만한 초식을 직접 만들었다고 하자 원철은 소림의 체면을 깎으려고 구후영이 일부러 꾸며낸 말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선지 두 번째 초식에는 힘을 좀 더 실었다.
황룡배불黃龍拜佛.
홍엽만산을 견식하고 초식의 정교함으론 상대를 제압할 수 없음을 파악한 원철은 첩장의 하나인 황룡배불을 펼쳤다.
'이건 어렵다.'
산장은 힘을 분산하고 첩장은 힘을 집중한다. 불광보조로 분산했던 힘이 하나로 모이자 아까처럼 초식으로 파훼할 수 없었다.
'일단 받아보자.'
횡도입마橫刀立馬.
구후영은 전대모검을 가로로 하여 원철의 황룡배불을 받아냈다.
'잘됐다.'
황룡배불은 십팔 가지 변화를 품어 상대가 어떻게 피해도 쫓아가는 장법으로, 피한다고 능사가 아니다.
그러나.
'재능만 뛰어난 애송이였어.'
장법은 변화가 많을수록 위력이 준다. 황룡배불의 초식에 관해 들어본 적 있거나 안목이 높은 자라면 당연히 최대한 피하며 초식의 위력을 줄인 다음 힘으로 맞서는 선택을 한다.
피하거나 흘리는 대신 초식의 위력이 가장 강한 시점에 검으로 막는 구후영은 최악의 선택을 한 셈이다.
그런데.
"어?"
원철의 예상과 달리 검은 멀쩡했고, 상대 역시 멀쩡했다.
물론, 구후영도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마냥 편하진 않았다.
'어떡하지?'
불가사의한 단단함 덕분에 검은 멀쩡했지만, 검을 통해 구후영의 몸에 침투한 원철의 내력은 쉽게 해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니구나."
놀라움에 빠졌던 원철은 어느새 구후영의 어려움을 알아차리고 새로운 초식을 펼쳤다.
영불헌화迎佛獻花.
존경하는 부처한테 꽃을 바치는 듯한 조심스러운 동작이지만, 위력은 황룡배불과 비교해도 크게 손색없는 첩장의 초식이었다.
그에 구후영도 결단할 수밖에 없었다.
"핫!"
구후영은 몸에 들어온 원철의 거대한 내력을 자신의 내공과 섞어서 용천혈로 유도했다. 상황이 다급한 데다가 원철의 내력이 워낙 묵직해 완벽히 성공하진 못했으나, 대부분 내공을 배출하는 데 성공했다.
대신.
"허!"
구경꾼들의 경탄 속에서 구후영의 몸이 허공으로 쏜살같이 솟아올랐다.
'이겼다.'
구후영의 몸이 솟구치자 원철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죽이진 말아야지.'
괘씸하다곤 하나 황제를 치료한 의원이다. 단전을 다치게 하거나 팔을 부러뜨리는 건 안 되고, 다리 하나 정도가 적당하다.
짧은 사이에 결정을 마친 원철이 경공으로 몸을 띄우며 서영불조西迎佛祖의 초식을 펼쳐 추락을 시작한 구후영을 공격했다.
'끝났군.'
원철의 낙승을 예견한 방장은 구후영의 개입 때문에 망가진 계획을 어찌 살릴지 고민에 빠졌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연무장에 경탄이 연신 터졌다. 깜짝 놀란 방장은 고개를 들어 허공에서 만난 둘의 모습을 확인했다.
'어쩌다 저렇게 됐지?'
소림 방장이 딴생각하는 사이, 원철이 예상대로 구후영에게 접근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 원철의 예상대로 된 일이 하나도 없었다.
먼저, 최고점을 찍고 추락하던 구후영의 몸이 갑자기 허공에 멈췄다.
너무나 의외의 상황에 원철은 서영불조의 초식을 펼치던 양손을 거둬 눈을 비비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음, 허공에 잠깐 멈춘 구후영이 전대모검을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딱히 무슨 초식인 것 같진 않은데, 원철은 온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전율했다.
다행히.
동자배관음童子拜觀音.
오랜 기간 성실히 수련한 효과가 나타났다.
원철은 머리가 하얗게 질린 상태에서 나한권의 동자배관음을 펼쳤다. 상대를 향해 고개를 숙인 채 양손을 합장해 머리 위로 올리는 동작으로, 일류의 경지만 이르러도 실전에서 전혀 효과가 없다며 버리는 초식이었다.
'다행이다.'
목숨이 걸린 상황이라 부지불식간에 어마어마한 내려치기를 펼쳤던 구후영 역시 내심 안도했다.
이대로는 구후영의 검에 원철의 몸이 쪼개지고 사태는 수습이 어려울 정도로 흐를 예정이었는데, 경지는 아득히 높았으나 엉겁결에 펼치면서 미처 기운이 실리지 않은 검은 원철의 귀신도 울고 갈 대응으로 손바닥 사이에 멈췄다.
바로 이때, 소림 방장이 고개를 들었다.
중간 과정을 전혀 모르는 탓에, 방장은 필승을 자신했던 원철이 어찌하여 양손 사이에 검을 끼운 채 낭패한 얼굴로 추락하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난놈이다.'
구후영의 몸이 허공으로 솟자마자 판관필 두 자루를 잡고 경공을 펼쳐 연무장으로 달렸던 옥무영은 뜻밖의 진행에 멍한 얼굴이 되었다.
"계속하시겠소?"
바닥에 안착한 구후영이 울렁이는 속을 몰래 다스리며 태연한 척 질문했다.
그에 원철이 허리와 발목에 힘줘 흔들리던 신형을 고정하고 반문했다.
"여래신장如來神掌이 남았는데."
금강인이 다섯 개 무공으로 나뉜 것처럼, 여래신장 역시 천수여래장과 불심인佛心印으로 나뉘었다.
원철은 둘 다 높은 경지로 익힌 덕분에 여래신장을 오 할 정도의 위력까지 내는 수준에 이르렀다.
"받아볼 텐가?"
'어떡하지?'
원철의 도발로 구후영은 진퇴양난의 지경에 빠졌다.
지금까지의 대결은 누가 봐도 구후영의 우위다.
구후영이 선보인 운룡대구식을 연상케 하는 경공과 감히 경지조차 가늠하기 힘든 내려치기 덕분에 판단 실수로 부득이하게 몸을 띄운 행동마저 일부러 원철을 유인하는 계책으로 보였다.
'여래신장이면 내가 질 텐데.'
문제라면 구후영은 공격의 여파를 말끔히 해소하지 못한 데 반해, 원철은 낭패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타격을 입지 않아 아예 멀쩡하다.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고.'
원철은 구후영의 마지막 대결 상대다. 그렇기에 여기서 멈춘다고 해도 딱히 문제가 되진 않는다.
그러나 구후영의 승리로 대결을 마무리하는 것과 원철의 승리로 대결을 마무리하는 건 명분상 커다란 차이가 있고, 이 차이로 소림과 무당이 싸우느냐 아니냐가 갈릴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대결을 이어가야겠지?'
수많은 고민 끝에 대결을 이어가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던 그때.
다부진 몸매의 사내가 연무장으로 뛰어 들어왔고, 뒤엔 옅은 붉은색 가사를 걸친 네 명의 계율원戒律院의 계도승戒導僧이 쫓아왔다.
"수상한 사람 아니라니까."
해진 회색 옷에 비싼 가죽 신발을 신고 얼굴을 검고 두꺼운 천으로 가린, 누가 봐도 수상한 차림의 사내가 고래고래 외쳤다.
"내가 바로 강남제일포두 최종필이야!"
신분을 밝힌 사내는 복면을 내려 얼굴을 드러냈다.
- 작가의말
“불광보조!”
“이병 구두쇠!”
“오늘 양이 많다. 괜찮나?”
“괜찮지 말입니다.”
구두닦이 무형문화재 구씨 집안에서 태어나 세 살부터 구두를 닦으며 용돈을 벌어온 불광의 달인 구두쇠!
앞에 놓인 수십 켤레의 전투화를 두고도 전혀 위축한 기색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흥분했다고 해야 할까?
“불광도 전투의 일부분이다. 보조 업무라고 여기지 말고 성심과 성의를 다하기 바란다.”
“충성!”
“황룡배불?”
“이병 황룡. 배가 불렀습니다.”
“그럼 가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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