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지술四象之術
장안춘색귀長安春色歸 선입청문도先入靑門道
장안의 봄은 청문 옆길에 먼저 찾아오는데,
녹양부자지綠楊不自持 종풍욕경도從風慾傾倒
푸른 버들이 줏대 없이 바람 따라 쓸리누나.
취연의 건강을 걱정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였지만, 빼어난 경공과 출중한 체력 덕분에 일행은 봄바람보다 조금 늦은 사월 초에 서안부에 도착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구후영은 우선 은도당을 찾았다. 은도당은 서안부와 낙양부 그리고 소주부에 사람을 뒀는데, 약재의 수요량을 확인하고 가격 변화를 예측해 귀주에 알리는 역할이었다.
은도당 소속들은 예고도 없이 찾아온 구후영을 조상님 받들 듯 지극정성으로 모셨고, 자신들의 인맥을 총동원해 안물과의 당일 만남을 주선했다.
정사품의 고관도 기별을 넣고 며칠씩 순서를 기다려야 함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만난 안물은 구후영의 용건을 듣기 바쁘게 다짜고짜 맞교환을 제안했다.
"초면에 예의 아닌 거 아는데. 우리 서로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게 어떤가."
안물은 구후영과 초면이 아니다. 구후영은 초면이지만.
그러나 안물은 신검의 등에 업혀 인사불성이 된 채 찾아왔다가 한 달도 안 되어 임초현의 마차에 실려 떠난 환자와 눈앞의 구후영이 동일인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어떻게 말이오?"
"사상보신탕四象補神湯의 처방을 알려주지. 대신 내 두통을 치료해주게."
"사상보신탕은 어떤 처방이오?"
"소양少陽이 보補하고 노양老陽이 치治하고, 소음이 양養하고 노음이 화和하는 천하제일의 보약이지. 환자의 체질에 상관없이, 몸이 품은 기운에 따라 네 가지 약재의 양만 조절하면 되네. 요행으로 찾아낸 신이 내린 처방이라고나 할까."
소양으로 기운을 북돋고 소음으론 몸을 건강히 하고, 노양으로 아픈 데를 치료하고 노음으론 부작용을 최소화한다는 말이다.
안물의 말대로 신이 내린 처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소. 머리는 어떻게 아픈 거요?"
"나도 모르겠네. 그저 추측인데, 아무래도 벌레가 귀를 통해 머리에 들어간 게 아닌지."
"머리에 벌레가 들어갔는데 어떻게 산 거요?"
안물의 말에 깜짝 놀란 옥무영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심장에 벌레가 들어가고 골수에 독이 들어가도 살 사람은 사는 게지."
의원이어서인지 아니면 원래 간이 큰 인간인지, 안물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머리라서 약을 못 쓴 거요?"
"알면서 뭘 물어."
"침으로 벌레를 죽이는 것도 말이 안 되니, 약 기운을 벌레가 있는 곳에만 가게 인도해야 한다는 거군. 내 말이 맞소?"
"과연. 황제를 치료한 건 신한천이 아니라 자네였군."
대부분 사람은 신한천이 치료를 주도하고 구후영은 그저 침만 놓은 줄 안다. 그러나 안물 정도면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시키는 대로 침놓는 거로 황제처럼 귀문관 앞을 어슬렁거리며 여차하면 문을 두드릴 환자를 살리기 어려움을 안다.
"약은 내가 지을 테니, 자넨 침을 어찌 놓을지나 고민하게."
뭐가 급한지 안물은 구후영의 확실한 대답을 듣지도 않고 거래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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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물의 호통에 제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발가벗은 안물이 대들보에 고정한 천에 묶여 허공에 매달렸다.
이어서 구후영이 대나무들로 천을 감아 안물이 함부로 못 움직이게 했고, 백 개가 넘은 침을 안물의 전신에 꽂았다.
곁에선 안물의 제자 십수 명이 입을 헤벌린 채 신의 경지에 근접한 구후영의 침놓는 솜씨를 넋 놓고 감상했다.
"기운의 흐름을 완벽히 통제하기 위함인가?"
안물은 알몸을 하고 허공에 매달아졌지만, 그 와중에도 호기심을 감추지 않았다.
"맞소. 이만 치료를 시작할 테니 마음을 다스리시오."
구후영의 눈짓을 받은 제자들이 적절히 식힌 탕약을 안물의 입에 연속 부었다. 안물의 머리에 들어간 벌레를 죽이기 위한 약인데, 몇 가지 약재를 섞음으로써 절대 머리 쪽으로 안 가도록 막아버렸다.
"서두르게."
십수 개 탕약을 모두 마신 안물이 재촉했다.
"약이 몸에 너무 퍼지면 안 좋으니까."
약이 약하면 몸에 흡수되는 과정에 성질이 변할지도 모르기에 강하게 했는데, 아무리 몸을 보호하는 약재를 섞었다고 해도 시간이 길어지면 건강을 크게 해칠 우려가 있다.
"호흡을 중단하시오."
구후영의 말에 안물이 숨을 멈췄다. 집중력 향상을 위해 의원과 선비 모두 토납법을 익히는데, 덕분인지 안물은 숨을 참으면서도 전혀 힘든 기색이 아니었다.
'단숨에 끝내야 한다.'
심호흡 한 번으로 긴장을 다스린 구후영이 열 손가락으로 연신 침들을 튕겼다. 그에 따라 약 기운이 순한 양처럼 원하는 방향으로 적절히 흘렀다.
톡, 톡톡.
토납법만 익혔기에 단전과 멀어질수록 닫힌 혈도가 많았다. 그러나 구후영이 침을 통해 주입한 내공으로 길이 술술 뚫리며 약 기운은 딱 원하는 양만큼 안물의 머리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네?'
구후영이 훌륭한 자질을 타고났다지만, 경험은 턱없이 부족하다.
신검 등은 일정 경지에 이르렀을 때 천마를 상대하며 목표를 확실히 세웠지만, 구후영은 태극혜검을 통해 바라본 거여서 확고하진 않았는데.
백팔나한진을 상대하며 목적지가 훨씬 또렷해졌다.
덕분에 내공과 침술을 결합한 어려운 치료를 하면서도 여유가 넘쳤다.
톡.
확신에 찬 마지막 탄지가 끝나자 안물이 입으로 피를 울컥 토했다.
"대단하군."
구경하던 제자들은 사부의 토혈에 깜짝 놀라 허둥댔지만, 정작 당사자는 감탄한 기색뿐이었다.
"그저 죽여만 줘도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이렇게 밖으로 빼내다니."
그제야 사람들은 안물이 토한 피에 섞인 가느다란 실 같은 벌레의 모습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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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물은 침을 뽑기 바쁘게 옷 입을 생각도 없이 설사약을 잔뜩 마셨다. 사람 머리에 파고들 정도로 생명력이 강한 벌레를 단번에 죽인 약을 최대한 빨리 그리고 많이 체외로 배출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안색이 핼쑥해진 안물이 일행과 다시 마주 앉은 건 반 시진이 지나서였다.
"이게 처방이오."
구후영은 먹물이 채 마르지 않은 처방을 받아 내용을 확인했다.
"약재 중 어느게 소음이고 어느게 노양인지 설명 부탁하오."
그에 안물이 무릎을 탁 쳤다.
"자네는 침술만 배운 모양이군."
구후영을 대단한 의원으로 생각했던 탓에 안물은 처방만 간단히 적어주는 실수를 범했다.
"백년하수오百年何首烏가 소음이고 칠 년근 설련雪蓮은 소양이네. 삼십 년근 고려삼이 노양이고, 오각 영지가 노음이네."
"꼭 삼십 년근이어야 하오?"
백년하수오는 백 년이 넘은 하수오를 뜻한다. 꼭 백 년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설련의 뿌리는 나이가 명확해 칠 년근인지 아닌지 판단이 쉽다.
문제는 고려삼이었다.
"이십팔 년에서 삼십이 년까지 다 괜찮네. 대신 잔뿌리가 많아야 해. 잔뿌리가 적으면 효과가 반감되네."
"오각 영지는 또 뭐요?"
"영지는 드물게 몇 년씩 자라는 놈이 있는데, 개중에도 음지에서 말리면 각이 다섯 개 생기는 놈이 간혹 있네. 하수오야 백 년만 넘으면 상관이 없는데, 남은 세 약재는 꼭 알맞게 써야 하네. 설련을 잘못 쓰면 약효가 약해지고, 고려삼과 영지는 환자의 건강을 해칠 수도 있네."
안물의 말에 구후영은 속이 갑갑해졌다.
"이런 약재들은 어디서 구하는지 아시오?"
"백년하수오야 철혈방에도 있을 텐데."
약초를 취급하는 은도당이라면 백년하수오를 구하는 게 딱히 어렵지 않을 거다.
문제는 마교가 있는 천산에 나는 설련이나 관동에 나는 고려삼과 영지다.
"다행히 내가 칠 년근 설련이 있는 곳도 아네."
"어디에 있소?"
"전진교."
안물의 말에 구후영은 일시에 반응하지 못했다.
"맞다. 종남파라고 해야지. 서안 사람들은 아직도 전진교라고 부르는 게 습관이네."
"고려삼과 영지는 어디서 구하는지 모르시오?"
"순천부만 가도 고려삼 파는 곳이 여럿 있지. 영지도 마찬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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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후영은 약재를 구하는 일을 은도당에 부탁하기로 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구후영의 설명을 들은 서안부의 책임자가 눈짓으로 부하에게 지시했고, 곧 약관도 안 된 의원 차림의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칠 년근 설련과 삼십 년근 고려삼, 오각 영지를 그림으로 그려라."
지시받은 어린 의원이 종이 석 장에 세필로 그림 세 개를 그렸다. 곧, 설련의 뿌리와 고려삼과 영지가 종이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 의원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약재의 색과 향과 맛, 어떠한 효용이 있고 어떤 약재와 섞지 말아야 하는지 그림 옆에 작은 글씨로 자세히 적었다.
"백년하수오는 제가 방주께 얘기해 홍엽산장으로 보내겠습니다."
안물의 말대로 은도당엔 백년하수오가 있었다.
"문제는 나머지 셋입니다."
"뭔가 문제요?"
"우선, 설련은 천산에만 납니다. 다른 곳이라고 설련이 없는 건 아닌데, 약효가 없습니다."
회남의 귤이 회북에 가면 탱자가 되듯이, 약초도 자란 땅에 따라 효능이 다르고 심한 경우엔 독초가 되거나 약효가 사라진다.
은도당이 약초 사업을 크게 할 수 있던 것도 이들이 공급하는 약초의 효능이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마교의 동향이 심상치 않아 그쪽으로 약초 구하러 가는 상인이 없습니다. 최대한 애써 보겠지만,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설련을 구할 방법은 알아냈으니 고려삼과 영지를 최우선으로 구해주시오."
"고려삼과 영지도 문젭니다."
"순천부만 해도 고려삼과 영지를 취급하는 약방이 여럿 있다고 들었소."
"지난겨울에 전쟁이 있었지 않습니까."
"이 일이랑 무슨 상관이오?"
"일단, 전쟁이 일면 약재값이 오릅니다."
전쟁이 일면 오르는 게 약재값뿐이 아니다.
"전쟁 소식을 백성보다 며칠 빠르게 접하는 고관대작들이 순천부 약방의 약재들을 모조리 사들였습니다."
'나쁜 쪽으론 머리가 참 잘 돌아가는구나.'
논어나 맹자를 비롯한 성현의 책에선 이런 걸 절대 안 가르친다.
"그리고 금족령禁足令을 내리죠. 괘씸한 관동의 무리를 벌하는 의미에서 모든 교역을 중단합니다."
금족령은 중원의 상인들이 관동으로 못 가게 막고, 관동의 상인들도 중원으로 못 들어오게 막는다는 얘기다.
"당연히 고관대작 나리들이 창고에 쌓아둔 약재를 비싸게 팔기 위함입니다. 이들이 약재를 모두 팔아 횡재하기 전엔 금족령이 풀리지 않습니다."
대화하는 사이, 어린 의원이 똑같은 그림을 수십 장 그렸다.
"최대한 사람을 풀어 구할 거지만, 너무 큰 기대는 안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직접 관동으로 가서 구하면 되는 거 아니오?"
원경의 말에 책임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좋은 방법이긴 합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책임자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을 이었다.
"손재주가 뛰어난 자들이 삼에 잔뿌리를 붙이는 거로 가격을 몇 배로 올립니다. 말리기 전에 테두리를 잘라서 오각 영지인 것처럼 속이는 경우도 종종 있고요. 일반 경우라면 그저 돈 좀 손해 봤다고 여길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잖습니까."
구후영과 원경은 꼬박 반나절을 투자해 고려삼과 오각 영지의 진위를 구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 작가의말
돼지 쓸개 표면에 곰 쓸개를 발라 비싸게 파는 양심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진위를 확인할 때 표면을 긁어서 검사하기에 잘 걸리지도 않죠.
참, 위 이야기는 절대 경험담이 아닙니다. 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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