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우의혈潰于蟻穴
한비자韓非子·유로喩老에서 이르길.
천장지제千丈之堤(천 장 길이의 제방)도 궤우의혈潰于蟻穴(작은 개미구멍으로 붕궤)하고, 백척지실百尺之室(백 척 크기의 건물)도 돌극연분突隙煙焚(굴뚝 틈으로 샌 불찌에 전소)한다.
"화산 검종이 낙화문 장문께 예를 올리오."
화산 검종의 두 제자가 구후영을 향해 포권하며 고개를 숙이는 반례半禮를 올렸다. 구후영은 가만히 선 채 포권으로 답례했다.
"사형이 내상만 안 입었어도."
예를 마친 젊은 사내가 자리로 가며 작게 중얼거렸다. 다섯 걸음만 떨어져도 못 들을 정도로 작은 소리지만, 귀가 밝은 구후영에겐 똑똑히 들렸다.
"화산은 낙화문이 상석에 앉는 데 이견이 없는 거로 알겠소."
배산의 말에 화산 제자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분란이 그대로 종식된 건 아니었다.
"육엽당 부당주 원칠이오. 낙화문 장문께 한 수 가르침을 청하오."
"왜? 낙화문 장문이 너한테도 예를 올리라 하드나?"
흑 장로가 호통쳤다. 같은 백련교 출신인 데다가 배분 차이도 까마득하기에 원칠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아꼈다.
'내가 경솔했다.'
구후영은 자신이 개미구멍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때.
"차라리 육엽당주께서 교주 하시지 그러오."
배산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용 모는 그럴 의향이 전혀 없소."
용전향이 다급히 말했다. 천마가 없는 틈을 타 교주 자리를 되찾고 이름을 명교로 회복하려는 면에선 여러 세력이 같은 마음이지만, 누가 교주가 될지는 아직 결론이 없다.
괜히 용전향이 교주 자리를 탐낸다는 소문이 퍼지면 자중지란이 일어 배산한테만 좋을 노릇이다.
"고작 부당주 따위가 교주의 장원에서 자리 배치에 이러쿵저러쿵하는데, 용 당주의 말을 어찌 믿소?"
그제야 아차 싶은 용전향이 벌떡 일어나 배산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내가 부덕해 수하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소. 원칠, 부당주 직을 박탈하고 석 달 동안 면벽하는 벌을 내린다. 당장 시행하라."
현재 상황은 육엽당의 부당주가 임시 교주를 맡은 배산의 장원에 손님으로 와서 좌석 배치에 간섭한 모양새다. 손님으로서도 수하로서도 절대 보여선 안 될 모습이다.
그걸 알기에 원칠도 시커멓게 죽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배산과 흑 장로와 용전향에게 차례로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린 뒤 군말 없이 쾌활당을 떠났다.
덕분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일의 진행을 지켜보던 구후영이 한시름 놓으려던 찰나에.
"무당도 자리 배치에 이견이 있소."
무당을 대표하여 온 배가 불룩 나온 게을러 보이는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배산의 이마가 다시 찌푸려졌고 구후영의 이마에도 주름이 생겼다.
"무당에서 이 자리를 원한다면 기꺼이 내드리겠소."
용천이 적절히 끼어들었다. 이에 구후영은 물론 배산도 기쁜 얼굴이 되었다.
무당이 상석에 앉으면 불만을 표할 사람이 없다. 배산 편은 굳이 무당을 건드려 분란을 일으킬 일이 없고, 배산에 적대하는 자들도 같은 편인 무당을 건드리기가 그렇다.
거기에 구후영이 화산의 고수를 이겨 실력을 증명했기에 중석에 가는 것에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다.
'내가 이김으로써 상황이 바뀌었다.'
화산이 트집을 걸었을 땐 배산의 체면이 걸렸기에 자리를 순순히 내주면 안 되었지만, 지금은 구후영이 화산을 이겨 실력을 증명한 후여서 뺏기는 게 아닌 양보가 되었다.
낙화문과 무당이 자리를 바꾸면 그 즉시 모든 분란이 종식된다.
하지만.
"그건 아니 될 말이오."
무당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괜히 무당이 낙화문을 겁박했다는 소문만 퍼질 거요. 그러니 무당과 낙화문 장문이 대결해서 누가 상석에 앉을지 정하는 게 공평하다고 보오. 이 방식이 질서를 강조하는 배산 공자의 뜻에도 부합하는 것 같고."
무당이 쉽게 물러나지 않자 구후영의 수심이 깊어졌다.
'두 번의 요행은 없다.'
무당의 양의검법은 근래에 현묘함과 어마어마한 위력으로 강호에 명성을 떨쳤다. 구후영이 비록 화산의 절정 고수를 이겼지만, 상대가 내상 때문에 전력을 다하지 못한 것과 구후영이 상대 초식을 완전히 파악한 덕분이 컸다.
"무당은 명교의 잔치에서 피를 볼 생각이 없소. 화산 검종이야 낙화문과 뭔가 연원이 있어 검으로 겨뤘겠지만, 무당은 무기를 들지 않겠소."
겉으론 양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숨통을 조이는 발언이었다.
[소형제, 아는 권법이 있는가?]
용천의 전음에 구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육합은 크게 동서남북과 천지이고 작게는 전후좌우와 상하네. 소형제는 길치여서 전후좌우가 있으나 동서남북이 없네. 다른 사람은 큰 육합과 작은 육합을 다 고려해야지만, 소형제는 그저 작은 육합만 생각하면 되네.]
구후영은 용천이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 몰라 눈을 연신 껌뻑거렸다.
[핵심만 말하지. 소형제는 자신 혹은 상대를 중심으로 보고 작은 육합을 쉽게 만들 수 있네. 대부분 사람은 큰 육합이 있어 그러지 못하지.]
구후영은 머리가 커다란 망치에 맞은 듯 멍해졌다.
'여긴 건물 안이어서 벽이 있다. 상대는 건물 때문에 방위를 잡음에 있어 자유롭지 못하다.'
두 사람이 대결할 때 동북과 남서 방향에 서는 일은 드물다. 무의식적으로 한 명은 동쪽에 서고 한 명은 서쪽에 서거나, 한 명이 남쪽에 서고 한 명은 북쪽에 선다.
구후영은 일부러 이상한 방위를 잡아 상대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 구후영 역시 영향을 전혀 안 받진 않겠지만, 길치인 덕분에 상대보단 훨씬 덜하다.
[동과 서가 태극이고, 남과 북이 태극이고, 천과 지가 태극이네. 세 태극이 한 점에서 만나 일여一如가 되면 그게 바로 무극無極이네.]
용천의 말에 수많은 깨달음이 구후영의 뇌리를 스쳤다. 그걸 빨리 잡고 싶은 마음에 구후영은 벌떡 일어나 무당의 도인에게 포권했다.
"낙화문 장문 구후영이 무당에 한 수 가르침을 청하오."
무당 도인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순식간에 스치고 사라졌다.
비록 구후영이 화산의 전중광을 이기긴 했으나 경지는 일류에 불과하고 전중광도 내상이 있는 몸이다. 그럼에도 구후영의 승리가 의외긴 하지만, 무당 도인는 구후영이 어떻게든 대결을 피할 거로 판단했고, 본의는 구후영을 빌미로 배산을 끌어들이려는 것이었다.
'마교의 사술로 경지를 속인 건가?'
구후영이 너무 당당하게 대결에 응하자 무당 도인는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고 배산이 안배한 함정이라는 의심까지 생겼다.
"한 수 가르침을 청하오."
무당 도인이 가만히 있자 구후영이 목청을 높였다. 그에 자신의 실태를 알아차린 무당 도인은 고개를 돌려 눈으로 사형에게 도움을 청했다.
"무당 장로 현현자가 낙화문 장문께 한 수 가르침을 청하오."
그에 깡마른 체형의 노인이 대신 대답했다.
구후영은 천천히 걸어서 중석에 갔다. 현현자는 얼굴이 북쪽으로 향하게 자리를 잡은 채 운기하며 구후영을 기다렸다. 어떻게 봐도 일류의 경지인 상대지만, 뭔가 숨긴 게 있다는 의심으로 경각심을 하나도 늦추지 않았다.
그런 현현자를 상대로 구후영은 태극권의 기수식을 취했다. 아는 맨손 무공이라곤 태극권밖에 없어 무심코 한 건데, 보는 현현자의 머리는 더없이 복잡했다.
'무슨 꿍꿍이지?'
생각할 게 많지만, 여기서 망설이면 괜히 구후영이 두려워 움츠리는 거로 비칠 수 있다. 현현자는 고민을 멈추고 무당 장권으로 구후영의 어깨를 노렸다.
비록 대뜸 심장을 노린 전중광과 달리 경우가 있어 보이지만, 변초로 심장과 목과 명치와 머리를 모두 노릴 수 있어 마냥 점잖은 공격은 아니었다.
구후영은 상대가 자신의 왼쪽 어깨를 노리자 급히 보법을 밟으며 백학량시白鶴亮翅의 자세를 펼쳤다. 공격과 수비의 전환이 자유로운 백학량시는 현현자가 어떻게 변화하든 모두 대처할 수 있는 초식이다.
그런데 구후영의 예상과 달리 현현자는 공격을 이어가지 않았다.
"본파의 태극권이오?"
"그렇소."
"아무리 삼풍 조사께서 태극권을 익히는 데 제한을 두지 않았다고 해도, 무당 상대로 태극권을 펼치는 건 좀 아니지 않소?"
"장 진인께서 태극권을 만들 때 세상의 모든 음양이 조화를 이뤄 다툼과 살육이 사라지길 바랐다고 들었소. 평화를 위하는 일에 태극권을 쓰는 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소."
구후영은 태극권을 빼면 검법밖에 모른다. 그래서 현현자의 추궁에 어떻게든 변명한 건데, 듣는 현현자 입장에선 얼굴이 달아오르고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일부러 날 조롱하려고 태극권을 펼쳤구나. 과연, 마교 놈들은 심성이 악랄하구나.'
구후영은 분명히 태원부의 낙화문에서 왔다고 밝혔으나, 현현자는 마교 종자가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내가 일말의 자비를 품었거늘.'
마음을 굳힌 현현자는 운기 방식을 장권 대신 십단금으로 바꿨다.
[조심하게. 상대가 살심을 품었네.]
용천의 전음이 아니어도 감각이 예민한 구후영은 상대의 기세가 확연히 변한 걸 알아차렸다.
"실례하겠네."
무당의 무공은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기는 걸 뿌리로 삼는다. 유독 십단금만 다른데, 십단금은 부드러움마저 이기는 특별한 무공으로, 대성하면 펄럭이는 천을 손바닥으로 때려 때린 부분만 사라지게 한다.
현현자는 십단금을 대성하진 못했으나 현재 무당에서 경지가 가장 높은 자다. 지금도 봄바람 불듯 부드러운 움직임이지만, 어마어마한 경력勁力을 품었다.
'위험하다.'
구후영은 급히 보법을 밟아 귀퉁이를 등졌다. 동시에 허보압장虛步壓掌으로 상대의 공격을 견제했다.
십단금의 좌마사평坐馬四平으로 구후영을 공격하던 현현자는 상대가 피하자 물 흐르듯 몸을 움직여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그런데 왠지 내지르는 장법이 평소처럼 자연스럽지 않았다.
귀퉁이를 등진 구후영과 마주 서며 현현자의 손발 위치가 조금씩 어긋났는데, 구후영의 꿍꿍이를 몰라 그저 오늘이 가끔 있는 무공이 잘 안 풀리는 날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초식이 마음에 안 들어도 회수하지 않았다.
구후영은 좌우천사左右穿梭의 초식으로 조금 흐트러진 현현자의 공격을 양쪽으로 흘렸다. 현현자는 평소처럼 반듯한 방위가 아니어서 초식이 흐트러졌고 구후영은 아무 영향도 받지 않았으나,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는 실력의 차이로 구후영은 정말 힘겹게 좌마사평을 막아냈다.
"태극권을 누구한테 배운 건가?"
현현자가 이어서 공격했으면 구후영은 못 버텼을 것이다. 그만큼 둘의 내공과 경지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설사 구후영이 천공교검을 들고 현현자가 빈손이어도 구후영의 패배가 최소 구 할이다.
다행히 구후영의 수준 높은 태극권에 현현자가 공격을 거뒀다.
구후영은 잠깐 고민하다가 솔직히 대답하기로 했다. 괜히 거짓말을 해서 후환을 남기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 답변하는 게 낫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무당의 정학 진인께 잠시 가르침을 받았소."
구후영의 대답에 현현자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신이 쇄악곡에 찾아가서 그렇게 태극권의 진수를 가르쳐달라고 빌었건만 거들떠보지도 않던 정학이 생판 남인 자에게 이리 높은 수준으로 가르쳤다고 생각하니 화가 몹시 치밀었다.
"그럼 태극권만으로 승부를 내보지."
- 작가의말
현현자 : 잘 봐. 이제부터 훈남들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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