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산지옥他山之玉
시경詩經·소아小雅·학명鶴鳴에 이르길.
타산지석他山之石은 가이공옥可以功玉이다.
다른 산의 흔한 돌도 나의 옥을 갈아 다듬는 데 쓸 수 있다는 말로, 타인의 평범하거나 하찮은 언행이 내게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이른다.
그렇다면, 다른 산의 옥은 내게 어떤 쓸모가 있을까?
축기로 기운을 끊임없이 보충하고 있음에도 구후영의 내공은 빠르게 소모되었다. 현현자의 내공은 가을바람이 되어 구후영의 내공을 가랑잎 몰 듯 쓸어버렸다.
게다가 몸도 현현자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야 했다.
유일하게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생각인데, 생각만으론 현재 상황을 타개하지 못한다.
다행히 절망밖에 없는 상황에 구후영이 습관적으로 웃었고, 웃음을 짓는 동시에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무리 손님이 주인 행세를 해도 주인은 주인이고 손님은 손님이다.'
어차피 이대로는 파국밖에 없음을 인정한 구후영은 평소 꿈에도 떠올린 적 없는 모험을 했다.
'내가 강해지지 못하면 상대를 약하게 바꾼다.'
마음을 굳힌 구후영은 자기 몸에 들어온 현현자의 내공을 단전으로 끌어간 다음 십이경맥으로 보냈다.
축기로 자기 기운을 보충하는 거론 해결이 안 되자 몸에 들어온 상대 기운을 운기로 소모해 약화하기로 한 것이다.
'이놈 뭐지?'
축기와 연기는 평범해도 운기 재능이 뛰어난 구후영은 자신의 것도 아닌 현현자의 기운으로 운기하는 데 성공했다. 현현자는 비록 구후영의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지만, 뭔가 변화가 생겼음을 감지하고 마음 한편에 불안의 씨앗이 심어졌다.
'뭘 어떻게 한 거지?'
거스르면 충돌하여 내상이 생기고, 따르면 내공의 유실이 점점 빨라질 뿐이다. 현현자는 아무리 머리가 터지게 고민해도 구후영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에 불안의 씨앗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나도 변화를 줘야 하나?'
구후영의 환한 웃음을 보지 않았다면 의심은 있어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정학과 꼭 닮은 해맑은 미소 때문에 현현자의 불안이 급속도로 자랐다.
'흐름을 바꾸면 나도 내상 위험이 있다.'
강호인들이 내공 대결을 자제하는 이유다. 경지가 높다고 무조건 이기는 게 아니고, 이겨도 곱게 끝나지 않는다. 현현자와 구후영은 내공 경지에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지만, 이미 흐름이 형성된 지금 뭔가를 바꾸려면 현현자도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럼 힘을 키울 수밖에.'
현현자는 불안한 마음에 내공 흐름을 두 배로 강하게 키웠다.
그에 구후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구후영은 현현자의 기운으로 운기하는 중이기에 갑자기 두 배의 양이 몰려오자 휘둘리지 않을 수 없었고, 평소 경험하지 못한 막대한 양의 기운에 십이경맥이 터지려 했다.
'이판사판이다.'
단순히 십이경맥만 터지면 구후영은 폐인이 될지언정 목숨은 부지할 수 있다. 허나 지금은 현현자의 내공이 계속 몰려오고 있기에 십이경맥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대로 진행되면 화타와 편작이 동시에 와도 자신을 살릴 수 없음을 알기에 구후영은 더 큰 모험을 결심했다.
인체는 십이정맥正脈과 팔기맥奇脈으로 나뉜다. 팔기맥은 기경팔맥이라고도 부르는데, 임맥·독맥·충맥·대맥·음유맥·양유맥·음교맥·양교맥의 여덟이다.
기경팔맥은 십이경맥과 혈도가 겹치기에 절정에 이른 고수도 기경팔맥으로 운기하는 건 몹시 신중해야 한다. 괜히 기경팔맥으로 운기하다가 십이경맥의 흐름과 충돌이라도 생기면 치유가 어려운 내상을 입기 쉽다.
물론,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구후영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
구후영은 바로 현현자의 기운을 기경팔맥으로 유도했다. 대맥과 충맥은 쉬웠고 임맥과 독맥은 기운이 거의 흐르지 않았다. 남은 네 개의 맥은 십이경맥과 비슷한 양의 기운이 흘렀다.
그에 구후영의 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공인가?'
인간은 풀리지 않는 의문을 맞닥뜨렸을 때 보통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의문을 외면하는 유형이고, 하나는 어떻게든 자신의 지식 범위에서 답을 찾아야 직성이 풀리는 유형이다.
현현자는 후자로, 자신의 흐름이 다시 약해지자 구후영이 마교의 사이한 마공으로 수작을 부렸다고 추측했다.
'그렇다면.'
이를 살짝 악문 현현자는 태극권을 펼치던 걸 멈추고 내공의 흐름을 더 강하게 했다. 덕분에 안목이 부족한 하석의 무인들도 현현자와 구후영이 내공 대결을 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허. 어떻게 일류의 경지가 저리 버티지?"
둘의 대결이 길어지자 덩치 큰 사내가 고개를 저으며 감탄했다.
"본 궁의 청풍불의공이라면 근근이 버틸 수 있으나, 일류의 경지로는 힘든데."
현월궁 여인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가 생각나는군."
흑 장로의 중얼거림이 한없이 낮았으나 상석에 앉은 자들은 귓가에 천둥이라도 울린 듯 하나같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천강구절이 떠오른 탓이다.
천마는 내공을 전혀 안 쓰고 완숙한 절정에 이른 무인과 반나절이나 대련한 적이 있고, 일 갑자 이상의 내공을 품은 마교 장로 열여덟 명과 동시에 내공 대결을 벌인 일도 있다.
열여덟 명의 내공을 합치면 스무 갑자는 넘기에 모두 천마가 반드시 진다고 생각했지만, 천마는 손쉽게 이겼을 뿐만 아니라 대결 상대인 열여덟 장로까지 내상을 안 입게 배려했다.
"아니오."
용전향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영약으로 내공을 키웠는지 단전 크기보다 기운이 많긴 하나 검법과 권법을 보면 절대 아니오."
상석에 앉은 자들이 분분히 고개를 끄덕여 구후영이 천마의 제자가 아니라는 용전향의 견해에 동의했다.
물론, 속마음은 제각각이었다.
'만에 하나 맞는다면?'
배산의 얼굴이 수심에 찼다.
천마는 친자식에게도 무공을 전수하지 않았다. 자질이 부족해 자신의 무공을 익히다간 주화입마가 와서 단명할지도 모른다는 이유였다.
그 탓에 배산은 정통성의 부재를 겪어야 했다. 배산이 그저 천마의 자식이 아니라 제자이기까지 했다면 지금쯤 교주 대리가 아닌 정식 교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제자가 갑자기 나타나는 일이 절대 반갑지 않다.
'내 지지 세력이 깎일 수 있다.'
구후영의 출현으로 마교 정통 세력들과 비교조차 안 되는 미약한 지지 세력이 둘로 나뉠 위험이 있다.
물론, 구후영의 도움을 받으면 배산은 큰 힘을 얻는다. 그러나 모든 걸 잃을 각오로 도박할 정도로 궁지에 몰린 건 아니어서 배산은 구후영의 출현이 반갑기보단 걱정되었다.
'저자가 옳다면?'
용전향 역시 입으론 아니라고 했으나 일말의 우려가 남았다.
'배산과 한패로 보이는데 큰일이다.'
구후영은 처음부터 배산의 편에 서서 화산파와 맞섰고, 무당의 대결 요청도 거절하지 않았다.
'아니면 참 좋은데.'
용전향의 머리엔 구후영을 천마의 제자로 소문내서 배산의 지지 세력을 둘로 찢을 계획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누굴 도울지 판단이 어려웠는데, 일이 재밌게 흐르는구나.'
현월궁에서 온 여인이 즐겁게 웃었다. 반면, 덩치 큰 사내와 마교의 쌍둥이 호법은 이마를 잔뜩 찌푸린 게 고민이 깊어 보였다.
그렇게 상석의 사람들이 구후영과 천마의 관계를 유추하며 복잡하게 머리를 굴릴 때.
구후영의 머리는 순수하기 그지없어 그저 버틴다는 일념뿐이었다.
'호흡이 안정되고 있다.'
그와 반대로 현현자는 점점 애가 타들어 갔다. 상대가 일류의 경지에 불과하고 내공의 양도 현현자 입장에선 한 줌밖에 안 되기에 확신을 가졌었는데, 경과는 처음만 빼곤 현현자의 예상을 전부 벗어났다.
'마공이 이토록 현묘하다면 배우고 싶구나.'
갑갑한 나머지 현현자는 구후영의 마공이 탐나기까지 했다. 질투에 농도 짙은 탐념까지 섞이자 가슴 한편에서 자라던 불안이 거대하게 성장했다.
'이대로는 내가 진다.'
인정하기가 백 번 싫었지만, 현현자는 솔직하기로 했다.
축기에 재능이 있어 많은 내공을 품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운기 재능이 부족해 막대한 내공을 제대로 써먹지 못한다.
장방선생이 그랬고, 현현자도 그렇다. 비록 현현자의 단전에 아직도 많은 내공이 있지만, 운기는 이미 한계에 이르러 더 강한 흐름을 만들지 못한다.
'지금 변화하지 않으면 필패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현현자와 구후영 사이에 형성된 흐름이 완전히 고착화된다. 그때는 현현자도 그저 운에 맡기고 버티는 수밖에 없다.
'차라리 아까 흐름이 약할 때 할걸.'
후회막심한 마음을 애써 수습한 현현자는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내공의 흐름을 반대로 바꿨다.
양의심공에서 가장 위험하면서도 효과적인 운기법이 바로 음양전도陰陽顚倒인데, 현현자도 아직 경지가 부족해 몸 상태가 특별히 좋은 날에만 조심스럽게 수련하는 게 다였고.
'제발.'
실전에서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허!"
음양전도를 감지한 상석의 고수들이 하나같이 감탄을 뱉었다. 생사가 걸려 집중력이 높아진 덕분인지 현현자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완벽히 성공했다.
'됐다.'
현현자의 내공은 마치 원래부터 그랬다는 듯이 순식간에 반대로 흘렀다.
동시에 구후영이 입으로 선혈을 확 뱉었다. 순식간에 흐름이 바뀌며 몸 곳곳에서 충돌이 생긴 탓이었다.
'내상을 입었으니 오래 못 버틸 것이다.'
그러나 현현자의 예상은 반만 맞았다.
구후영은 비록 바로 대처하지 못해 내상을 입긴 했으나, 늦지 않게 단전의 세 구궁을 재배열했다.
건과 곤이, 이와 감이, 진과 손이, 태와 간이 자리를 바꿨다.
세 개의 구궁이 모두 반전한 뒤, 구후영의 단전은 바뀐 흐름에 완벽히 적응했다.
현현자가 머리를 싸매며 구결을 해석해 이십 년 이상 수련하고도 위험을 무릅쓰며 겨우 성공한 일을 구후영은 단지 의념을 보내는 거로 손쉽게 해낸 것이다.
다행히 이러한 사실을 구후영만 안 덕분에 현현자가 화를 못 참아 피를 토하며 즉사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진 않았다.
"허!"
구후영이 피를 토하자 끝났다고 여겼던 자들은 구후영의 하얗게 질렸던 얼굴에 다시 홍조가 돌자 기가 막힌 나머지 쓴웃음을 지었다.
내공 대결은 초식 대결과 달리 일단 열세에 처하면 뒤집기가 하늘의 별을 따는 게 더 쉬울 정도다.
"하긴. 무당 장로가 모험을 한 건 다 이유가 있어서겠지."
덩치 큰 사내가 중얼거렸다. 현현자가 갑자기 내공 성취를 자랑하고 싶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흐름을 바꾼 게 아니라면, 겉에서 보는 것과 달리 내공 대결은 청년의 우위였다는 뜻이다.
"그럼 저 청년도 내공 흐름을 순식간에 바꿨단 말인가?"
현월궁의 여인이 태평스럽게 말했다. 그에 상석과 중석에 앉은 자들 모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여기서 현현자와 내공 대결을 벌여 우위를 차지할 자신이 있는 자가 몇 없고, 현현자의 아무런 전조도 없이 진행된 음양전도의 수법에 대처할 방도가 있는 자는 아예 없다.
그런데 약관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 대결에서 우위를 점했을 뿐만 아니라 음양전도의 수법에도 제때 대처했다.
모두 아까 강력히 부인했던 천마와의 연관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작 모두의 오해를 산 구후영은 현현자의 막대한 내공으로 자신의 혈도를 단련하며 내공의 경지를 급격히 끌어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 작가의말
위기는 기회다. 단, 주인공한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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