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상초원北上草原
서산으로 지던 해가 골짜기에 마지막 빛을 뿌렸다. 노을을 투과하느라 붉어진 그 빛에 골짜기가 음울하게 아물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해와 노을이 갑자기 사라지며 순식간에 땅거미가 졌다.
다행히 이 정도 어둠에 곤란해할 사람은 없었다.
"구해주셔서 고맙소."
뒤늦게 감사 인사를 한 모용용이 고개를 돌려 모용연을 바라봤다. 원경의 곁에 무릎 꿇은 이복 여동생은 퀭한 눈을 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야효와 양달이 들것을 보강할 재료를 구하러 가면서 쉴 틈이 생긴 구후영이 말했다.
"흑철이란 자와 무슨 대화를 나누셨소?"
모용용이 살짝 목청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골짜기 어구에서 낙화문의 구후영을 아냐고 물었소. 유근은 미처 누군지 모르는 눈치였고, 난 그자가 자신을 마교에서 왔다고 해서 혹시 구후 대협과 같은 편이 아닐까 판단해 알은체했소."
유근은 구후영을 의원 그리고 홍엽산장 장주로 알았다. 맨날 다른 편뿐이 아닌 같은 편과도 정치 싸움을 해야 하는 유근이기에 자신과 별 상관이 없는 구후영의 신상을 달달 외울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낙화문의 구후영이라고 하자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구후영이 자기 목숨을 노린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딱히 유근이 잘못한 것도 아니었다.
여기서 흑철은 총명한 자들이 흔히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유근이 뒤늦게 구후영이 누군지 떠올린 눈치였지만, 모용용의 대답을 듣고 아는 척한 거로 판단한 거였다.
그래서 상자를 빼앗고 유근을 버린 다음, 모용용만 데리고 골짜기 깊은 곳으로 왔다.
"놈은 여기서 뭘 준비한 거요?"
구후영의 질문에 모용용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소."
잠깐 고민한 구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놈의 목표는 내가 아닌 형님이었던 모양이군.'
아무리 대단한 외공 고수여도 단련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눈, 입안, 울대, 숨구멍, 항문, 고환, 오금, 발꿈치.
노릴 게 많은 사람보다 노릴 게 적은 사람이 당연히 상대하기 어렵다. 일정 수준까지는 외공 고수가 훨씬 상대하기 성가신 이유다.
문제는 흑철이 웬만한 고수가 아니란 거다.
'입에 침으로 눈이나 목을 노리려 했던 거겠지.'
목표에 관한 판단은 틀렸으나, 흑철이 원한 바는 정확히 맞혔다.
흑철은 모용용 혹은 상자 안의 책자를 핑계로 돈을 원하는 척하면서 구후영을 기습해 죽일 작정이었고, 원경은 입 안의 침으로 죽일 계획이었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이고, 운 좋으면 둘 다 죽여 황금 만 냥을 벌려 했다.
굳이 골짜기에 유인한 건 경공에 자신 있기 때문이었다.
평야에서 원경과 구후영이 따로 도주하면 둘 다 잡을 자신이 없지만, 이 깊은 골짜기라면 입구를 틀어막은 것과 같은 효과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단아가 내민 은자 천 냥에 마음을 바꿔 구후영을 죽이려 함을 밝혔다.
흑철 입장에선 외공을 익힌 원경이 더 어렵게 느껴진 탓이었다. 자신이 정한 원칙 때문에 둘 중 하나를 밝혀야만 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만만하다고 생각한 구후영을 언급한 것이었다.
대화하는 사이, 야효와 양달이 적당히 굵은 나뭇가지와 얇고 질긴 나무 속껍질을 들고 돌아왔다.
구후영은 생각을 멈추고 들것을 완성하는 데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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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골짜기 어구에서 잠깐 멈췄다.
"유근이 사라졌습니다."
모용용과 모용연이 있었기에 단아는 시체라는 말을 뺐다.
"금의위가 와서 데려간 건가?"
장선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조금 더 걸은 일행은 그런 게 아님을 깨달았다.
투구와 갑옷이 부서진 흑갑호위 둘이 널브러져 있었고, 멀쩡한 흑갑 네 개가 바닥에 곱게 놓여 있었다.
"과연 마교 이인자답네요."
딱 봐도 흑철이 팔 하나 잃은 상황에 흑갑호위 두 명을 죽이고 도주한 모양새다.
흑갑호위들이 고작 일류라곤 하나 경공 실력이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흑갑까지 벗어던지고 추격한 걸 보면 최소 여섯 명을 상대하고도 멀쩡했다는 뜻이다.
'뭔가 하늘이 굽어살핀 것 같구나.'
흑철이 일행의 목표가 유근임을 알고 함정을 꾸몄다면 진짜 구후영이나 원경 중 한 명이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비록 원경이 모용연을 구하려다가 생명이 위급한 상태가 되긴 했지만.
'형님은 무사할 거야.'
환속한 다음 원경은 고기와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화산에서도 강석하고만 싸우며 사람을 죽이기는커녕 다치게도 하지 않았다.
유근의 무리를 상대할 때도 어린 환관을 살려두자고 주장했고, 죽은 금의위들을 위해 극락왕생경을 낭독했다.
'그게 아니면 세상에 부처는 없는 거겠지.'
간절한 나머지 구후영은 부처한테 책임을 전가했다.
"흑철이란 자가 살았으니 또 우릴 노릴지도 모릅니다."
단아가 흑갑을 뒤적거리던 걸 멈추고 말했다.
"모용 가주는 어찌할 생각입니까?"
단아의 질문에 모용용은 눈을 살짝 감고 고민했다.
그러나 자신의 다섯 살 된 아들을 떠올리자 모든 고민이 사라졌다.
"내가 허망한 생각 때문에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소. 급히 가봐야 해서."
모용용이 눈길을 돌려 모용연을 잠깐 쳐다봤다.
"염치없지만, 내 동생을 부탁드리겠소."
동생이란 호칭에 모용연이 몸을 움찔하며 모용용을 쳐다봤다.
"이제부터 세가는 없고 가주도 없다. 그러나 네 오라비는 여기 있구나. 난 북산에서 처자식과 함께 조용히 살 생각이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오거라."
모용용은 사냥꾼의 딸이란 미천한 신분 때문에 집에 들이지 못한, 그러나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인, 그리고 여인과 낳은 아들과 함께 세상의 풍파와 떨어진 평온한 삶을 살 작정이었다.
"모용 소저는 우리가 잘 돌보리다."
구후영의 말에 모용용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모용연에게 마지막 눈 인사를 하고 바로 떠났다.
"예전엔 영 별로였는데, 이젠 좀 괜찮아 보이네."
청월의 행적을 말하면서 눈알을 굴리던 모용용을 떠올린 야효가 말했다.
단아는 모용용이 멀리 가길 기다려서 입을 열었다.
"흑철이 언제 접근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것보단 북쪽으로 가서 말을 구해 초원을 달리는 게 좋겠습니다."
시야가 확 트인 초원에선 몰래 접근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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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것은 키를 맞춰 구후영과 야효, 장선과 양달, 모용연과 단아가 번갈아 가며 들었다.
일행 중에 모용연과 단아가 체력이 가장 약했으나, 단아는 내공으로 모용연은 악으로 채웠다.
덕분에 고작 이틀 만에 유목민이 잔뜩 모인 '마을'에 도착했다.
"두 달에서 석 달 정도 생겼다 사라지는 마을입니다. 여기선 철천지원수를 진 부족도 싸움을 멈춥니다. 관동에서 가장 큰 시장이거든요. 여기서 필요한 물건을 못 얻으면 일 년 내내 힘들어집니다."
야효가 설명했다.
"내가 이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낳은 어미가 죽자 아비가 날 팔았는데, 운 좋게도 현월궁에서 사 갔습니다."
그때 주요도 함께 팔렸는데, 현월궁에서 나온 사람이 생각보다 값을 후하게 치르자 곁에서 구경하던 자가 자기 딸과 야효가 부부가 되기로 했다면서 억지를 부렸던 탓이었다.
다행히 주요도 근골이 꽤 좋아 보여 현월궁 사람이 흔쾌히 주머니를 열었고, 그 덕분에 둘은 부부가 되었다.
"고향에 온 셈이군."
구후영의 말에 야효가 고개를 저었다.
"태어난 곳이 고향인 건 아니죠. 가장 좋아하고, 힘들 때 돌아가고 싶은 곳이 고향이죠."
마을 밖에 서서 잡담하던 일행은 끝내 나타난 근처를 지나는 사람을 잡고 말을 붙였다.
"혹시 말을 파시오?"
야효의 질문에 가죽옷을 입고 털모자를 쓴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말 장사꾼을 불러주겠소? 그러면 사례금을 드리지."
"굳이?"
사내가 의문을 품자 야효는 들것에 실린 원경을 가리켰다.
"아픈 사람이 있어서 그러오."
야효의 말에 사내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쳤다.
"역병이요?"
"역병이 아닌데, 사람들이 역병으로 오해할까 봐 이러는 거 아니오. 괜한 말썽을 일으키기 싫어서 이렇게 부탁하는 거요."
만에 하나 흑철이 마을 안에 매복해 있으면 누구 하나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특히 혼수상태에 빠진 원경을 노리면 도무지 막을 방법이 없다.
그래서 일행은 말 장사꾼을 밖으로 부르기로 했다.
"알겠소."
마을로 들어간 사내는 잠시 후 다른 사내 두 명과 함께 나왔다.
그런데.
"아이고, 여기서 은인을 뵙는군요."
함께 나온 사내 중 한 명이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절을 올렸다.
"왜 저러는 거요?"
사내의 말을 못 알아들은 구후영이 질문했다.
"건주의 부족인가 봅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가서 족장을 부르겠습니다."
말을 마친 사내가 벌떡 일어나 마을 안으로 달려갔다. 그러곤 명나라 말을 아는 사내 중 한 명과 함께 나타났다.
"누군데 이러는 거요?"
소개비를 받을 생각에 흐뭇해하던 사내가 뜻밖의 전개를 궁금해하며 질문했다.
"이분들이야. 단오독端午毒 치료하는 처방을 주신 신의."
"아이고, 내가 은인을 몰라뵈었네."
원경이 역병에 걸린 게 아닌지 의심하면서 거리를 잔뜩 뒀던 사내가 앞으로 달려와 넙죽 절했다.
"내 아이도 약을 먹고 살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 이후론 일사천리였다.
건주의 부족은 임시 마을에 와서 처방을 배포했다. 구후영의 부탁에 충실히 따른 것인데, 처방이 효과가 있음을 확인한 부족들이 말과 양 그리고 여인을 건주의 부족에 선물했다.
건주 부족의 대부분은 여인과 양과 함께 건주로 먼저 돌아갔고, 족장과 몇몇 부족원만 남아서 넘치다 못해 부담되는 말을 가죽이나 그릇 등 필요한 물건으로 바꿀 목적으로 남았다.
일행의 부탁을 받은 사내는 처방을 얻은 고마움에 보답하려고 건주의 부족을 이어준 건데, 덕분에 구후영 일행은 안목이 뛰어난 전문가가 성심성의껏 고른 말 여섯 필을 공짜로 얻었고.
초원 부족이 즐겨 먹는 마른 전병煎餠과 말린 말고기 그리고 냄새는 역하나 잘 상하지 않는 마유주 등도 잔뜩 받았다.
"날도 어두운데 저희 천막에서 하루 머무시죠."
말은 겁 많은 짐승이라 밤에 달리지 않는다. 사람이 앞에서 고삐를 끌면 그럭저럭 따라오긴 하나, 그럴 거면 말을 구할 이유가 없다.
이틀 내내 흑철이 언제 덮칠지 걱정하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달린 것으로 꽤 피곤했던 일행은 사내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혹시 남는 천막이 있으면 저기 언덕에 쳐줄 수 있소?"
"그리하겠습니다."
사내는 이유도 묻지 않고 구후영이 원하는 바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구후영은 감개무량했다.
황제를 치료하고 온갖 포상을 받았을 땐 그저 일이 끝나 황궁을 떠날 수 있어 후련하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이들을 돕고 보답받는 일은 마음이 무척이나 뿌듯했다.
'정체를 숨기고 의원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강호를 은퇴하고 그저 어딘가에 숨어 지내는 것보단 병을 연구하고 처방을 만드는 의원이 되어 세상에 이롭게 사는 게 훨씬 보람찰 것 같았다.
정체를 숨겨야 하기에 지금처럼 누가 알아주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사실 고독을 치료한 후부터 늘 생각하던 거였지만, 드디어 결심이 확고하게 선 덕분에 구후영은 기분이 상쾌해졌다.
- 작가의말
외공 고수인 원경은 스트라이크존이 다른 타자의 10% 정도밖에 안 되는 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상대하기 껄끄럽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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