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고동맹書庫同盟
자금성의 모든 건물은 나무로 지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벽과 바닥과 천장 모두 돌로 된 봉천전 지하의 황궁서고는 유일한 석조건물이다.
서고는 지하에 지었기에 지붕을 만들고 벽을 세우는 수고를 덜었다. 대신 기둥이 무척이나 많은데, 약 삼분의 일이 돌기둥이고, 삼분의 이는 나무 기둥이다.
그중 돌기둥은 천장에 가로로 댄 도리를 받치는 역할이고, 나무 기둥은 주로 책장을 고정하는 용도로 쓰였다.
"왜 서고를 지하에 짓는 수고를 했을까요?"
구후영의 질문에 단아가 대답했다.
"다른 용도로 지었는데 그냥 서고로 한 게 아닐까요?"
비밀 문을 두 개나 만든 걸 보면, 원래는 그저 만일에 대비한 도주로로 쓰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비밀통로와 출구를 만든 사람들은 어찌 됐을까요?"
"공자가 생각하는 게 맞을 겁니다."
"황제의 목숨이 정말 이리도 중요할까요?"
어차피 나라를 다스리는 데 관심도 없는 황제다. 옥새는 장인태감 유근이 찍고, 사무는 대신들이 본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런 황제를 살린 대가로 홍엽산장과 철혈방 모두 강호의 풍파에서 벗어날 수 있다.
"태산보다 무거운 삶이 있고, 깃털보다 가벼운 삶도 있죠."
"예전엔 황제를 살리려는 일념이었는데, 일이 순조로우니 온갖 생각이 다 드네요."
"아는 게 많으면 보이는 게 많고, 보이는 게 많으면 생각할 게 많고, 생각할 게 많으면 모르는 게 많습니다."
"아는 게 많을수록 모르는 게 늘고, 모르는 게 늘수록 더 많이 알아가고. 이 역시 태극이군요."
진지하게 대화하던 중에, 구후영이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누가 있습니다."
구후영은 그간 이룬 성취와 비교해 이론적인 부분이 극히 취약했다. 글공부를 열심히 하고 자질도 출중해 머리는 깨어 있었지만, 무공에 관한 배움이 적어 자신이 뭘 이뤘는지조차 명확히 알지 못했다.
그나마 취화봉에 있을 때 풍불지한테서 도움이 되는 말을 꽤 듣긴 했으나, 전혀 체계적이지 않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다행히 무당에서 태극혜검을 해독하는 석 달 기간에 수많은 지식과 다양한 해석을 접하며 서서히 부족한 부분을 충실히 채웠다.
게다가 침술 분야에서 절정을 이룬 신한천의 방대한 지식과 독특한 견해 덕분에 안계를 한층 넓혔고, 어릴 때 듣고도 미처 몰랐던 숨은 뜻을 깨우치며 혈도에 대한 인식이 깊어졌다.
거기에 황제의 오장육부를 치료하면서 명확하진 않으나 꽤 큰 깨달음을 얻어 무공 성취가 뜻밖의 비약飛躍을 보였다.
"네?"
"확신은 어려우나, 서고 안에 누군가가 있는 듯합니다."
조용히 속삭이던 구후영이 갑자기 경공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들켰군."
일행과 삼 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상체가 크고 팔이 긴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며 구후영의 공격을 받아 흘렸다.
'고수다.'
구후영은 홍엽산장에 있을 때 연무쌍과 장선의 성화에 못 이겨 수많은 대결을 벌였다. 덕분에 고작 두 합만 섞고도 상대가 연무쌍이나 장선보다 훨씬 고수임을 알아챘다.
"공자. 적이 아닙니다."
단아의 말에 구후영이 뒤로 물러나며 사내를 관찰했다.
키는 구후영보다 큰데, 상체가 크고 팔이 길어서 오히려 작아 보였다. 얼굴은 검은 복면으로 가렸으나, 옷은 일반 백성이 입는 평상복이었다.
'얼굴을 가린 걸 보니 우리처럼 떳떳하지 못한 자구나.'
"그간 알면서도 모른 척한 건가, 아니면 오늘 처음 발견한 건가?"
사내의 목소리는 낮으나 힘 있었다.
"오늘이 세 번째로 서고에 들어온 거 맞습니까?"
단아의 질문에 사내가 몸을 흠칫 떨었다.
"기척을 발견한 건 아닙니다. 소녀는 대협이 책을 건드린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단아의 말에 사내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여협은 내가 누군지 아시오?"
"황궁에서 금의위 열여섯 명을 죽인 침입자를 찾으려고 경계를 최고로 강화했는데도 황궁서고를 자기 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 더 있습니까?"
서고에 쭉 있는 거야 일단 들어오면 되는 일이지만, 사내처럼 드나드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데요?"
어느새 다가온 우호법이 궁금함을 못 참고 질문했다.
'누구지?'
구후영 역시 상대가 누군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여협의 탈출을 도울 수 있다는 것도 알겠군."
"그렇다는 건, 우리도 대협을 도울 능력이 있단 말이군요."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내가 올 때마다 쉬지 않고 서고를 뒤지던데, 혹시 여협도 찾는 물건이 있소?"
단아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찾는 물건과 대협이 찾는 물건은 아마 겹치지 않을 겁니다."
'황궁서고에 무슨 보물이 있어 저 사내가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찾는 걸까?'
둘의 대화를 듣던 구후영은 참기 힘든 궁금증이 일었다.
"내가 그 물건을 찾기 시작한 건 이십육 년 전부터고, 여기 서고에서 찾기 시작한 건 십이 년째요."
"그럼 소녀도 돕기 어려울 것 같군요."
단아의 말에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난 한 달에 여길 서너 번 오고, 한 번에 일각 정도만 머물 수 있소. 가끔은 몇 달 동안 여길 오지 못하는 일도 있었소. 여협과 여협의 수하는 종일 여기 있으니 당연히 나보다 낫지 않겠소?"
"아쉽지만, 저자는 글을 모릅니다."
뜻밖의 폭로에 우호법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찾는 건 서창이 사십 년 전에 만든 계획서요. 무림말살지계武林抹殺之計라고, 무공을 익힌 무인을 일정 숫자 이하로 줄이는 거로 결국엔 무림을 없애겠다는 악랄한 음모요. 무림말살지계 여섯 글자만 익혀도 찾을 수 있소."
사내의 말에 구후영이 깜짝 놀랐다.
"무림을 없애다니. 그게 가능한 일이오?"
"당연히 어렵지. 그러니까 지금까지 실행되지 않은 게 아니겠소?"
"그럼 그 계획서는 왜 찾으려는 거요?"
사내는 잠깐 고민하다가 얼굴을 가린 복면을 벗었다.
"이미 여협한테 정체를 들킨 마당에 더 숨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겠군. 난 신장 홍기영이오. 구후 소협의 얘긴 악불형한테 들었소. 옳고 그름이 확실한 요즘 보기 드문 청년이라지."
깜짝 놀란 구후영이 신장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후배가 홍 선배께 인사드립니다."
"시간이 넉넉지 않으니 간단히 말하겠소. 이십여 년 전에 천강구절이 찾아와서 서창이 천하무림을 말살할 끔찍한 계획을 세웠다고 했소. 그 계획이 성공할 경우 천하 무인의 숫자가 극도로 줄고, 그로 인해 수많은 무공이 사라질 거라고 했소."
무인은 대체로 무식하여 많은 무공은 비급 따위 없이 사부가 제자한테 직접 가르치는 게 일반적이다.
비급이 있는 운룡대구식도 수백 년이나 익혀낸 자가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천마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당시 천강구절이 어찌 알았는진 모르나, 나와 악불형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했소. 그때 악불형은 거절했고, 난 천강구절의 말에 따라 관에 투신했소."
'대협이다.'
수많은 사람의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세상을 위하는 일에 자신을 던지는 자가 대협 아니면 누가 대협이겠는가.
"서창의 계획을 방해하기 위해 천강구절은 명교로 가서 실력을 과시하고 교주가 됐소. 교의 이름을 마교로 바꾼 것도 명 황실의 심기를 덜 거스르기 위함이지."
이립도 안 된 나이에 소림의 백팔나한진을 파하고 장삼풍과도 무공을 겨뤘던 천마다. 그런 대단한 무력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바를 마음껏 이루진 못했다.
'인사불성이 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황제가 깨서 무림말살지계를 멈추라고 한마디만 하면 서창을 제지할 수 있다. 그런데 황궁을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천마는 안 된다.'
구후영은 불쑥 떠오른 의문에 가슴이 갑갑했다.
"다행히 악불형도 뒤늦게 천강구절의 뜻에 동참해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나 대신 많은 수고를 했지. 작년에 와서 보기 드문 청년을 만났다고 나한테 밤새 자랑했는데, 이렇게 만나서 반갑기 그지없소."
"제가 더 영광입니다."
친하기는 풍불지가 제일이고, 믿음직한 거로 따지면 악불형이 최고다. 그러나 사대신협 중 누굴 가장 존경하냐고 물으면 구후영은 서슴없이 홍기영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예전에 무식했던 난 천마한테 황제를 협박하라고 했소. 그때 천마가 안 된다고 날 설득했는데, 뭐라 했던지는 잘 기억나지 않소. 다만, 관에 이십 년 넘게 몸을 담그고 있으면서 황제도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님을 절실히 깨달았소."
홍기영이 말의 말미에 작게 탄식했다.
"다들 장법이 어렵다고들 하는데, 세상보다 더 어려운 것 같진 않소."
"천축에서 건너온 이야기가 있습니다. 초원의 왕이 자신이 키우는 소와 양을 늑대가 자꾸 먹어 치우자 늑대를 없애라고 명합니다. 초원의 난다 긴다 하는 사냥꾼들이 몰려와서 늑대를 잡아 왕한테서 푸짐한 포상을 받아 갑니다."
단아가 불쑥 끼어들어 이야기했다.
"문제는 늑대가 사라지자 토끼가 번성합니다. 토끼는 숫자를 급격히 불려 풀을 다 먹어 없앱니다. 결국, 늑대가 먹어 치우는 것보다 훨씬 많은 소와 양이 굶어 죽습니다."
단아의 이야기에 구후영은 깨닫는 바가 컸다.
"황제도 한낱 늑대라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늑대 한두 마리를 죽이는 거론 해결이 안 되고, 모든 늑대를 없애야 합니다. 그런데 늑대가 사라진 세상은 과연 더 완벽할까요?"
"이 홍기영이 지금까지 헛살았군. 훌륭한 가르침에 감사드리오."
단아의 이야기도 명확한 답이 되진 않았으나, 구후영 역시 안개에 갇힌 듯한 막막하던 기분이 어느 정도 사라졌다.
"서로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은데, 연맹을 맺는 건 어떻습니까?"
단아가 뜻밖의 제안을 하자 홍기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연맹이라면?"
"신장께선 계획서를 찾아 확인한 후 어떻게든 방해하려는 목적 아닙니까? 그걸 저희가 최대한 도울 테니, 저희가 하려는 일에 도움을 주시죠."
"여협이 하려는 건 어떤 일이오?"
"유근을 죽이는 겁니다."
유근이란 이름을 듣자 구후영은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놈은 나도 죽이고 싶으나, 천강구절의 당부 때문에 참고 있었소."
홍기영이 미지근하게 대답하자 구후영이 입을 열었다.
"후배가 황제 폐하를 치료하고 있습니다. 치료에 성공하면 면사금패를 포상으로 요구할 작정인데, 그게 있으면 어떤 후환도 없이 놈을 죽일 수 있습니다."
원래는 단아를 위해 면사금패를 얻으려 했는데, 홍기영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유근을 죽이는 데 써도 무방하다.
"후환 때문이 아니오. 그자도 극악무도하긴 하나 황제에 대한 충정만큼은 진실한 자요. 일을 벌이기 전에 그게 황제의 기분을 거스르거나 심기를 상하게 하지 않을지 주저하는 일이 많아 그나마 예전 창공보단 낫소."
"그놈도 늑대 같은 놈이군요."
구후영이 탄식했다.
"그런데, 죽여도 딱히 상관없소. 새 창공이 마음에 안 들면 또 죽이면 그만 아니겠소?"
"네?"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안 죽일 건 아니잖소. 어차피 가는 길이 같은데 이 정도 편의는 서로 봐주는 게 좋지 않겠소?"
관에 이십 년 넘게 몸을 담근 덕분에 홍기영은 꽉 막혔던 성격이 많이 변했다.
- 작가의말
세상을 바꾸려면 시스템을 바꿔야지, 부품 한두 개를 망가뜨리는 거론 어림도 없죠.
황제가 중요한 역할이긴 하나 대체 불가능한 부품은 아닙니다. 대체 불가능한 부품이 있는 시스템은 완벽하지 않아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절로 무너질 거고요.
개인적인 생각으론.
시스템을 바꾸려는 자 - 혁명가.
시스템을 망가뜨리려는 자 - 테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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