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화검법蘭花劍法
매梅는 차디찬 눈에 피어 고결한 지사志士와 같다. 난蘭은 심산유곡에 조용히 피어 세상을 통달한 현자와 같다. 죽竹은 청아하고 담백하여 겸손한 군자와 같다. 국菊은 서리에 맞서 표일하게 피어 세상 밖으로 은거한 선비 같다.
그리하여 넷이 함께 사군자四君子로 불렸다.
"자, 여길 보게. 봄바람이 죽림을 지나는 것 같다고 했지? 이건 등의 풍문혈風門穴이야."
쌍둥이 자매가 언제 칼 들고 찾아올지 몰라 불안이 컸던 구후영은 기름종이로 감싸서 품에 고이 간직했던 음서를 꺼내 풍불지의 가르침을 청했다.
과연, 구후영이 고작 열한 개밖에 못 찾은 혈도를 풍불지는 벌써 서른 개 넘게 찾아내고 있다.
"귀에 바람을 넣었다고 했잖아. 이건 풍이혈風耳穴이야."
"그런 혈도도 있습니까?"
"외이혈, 중이혈, 내이혈 중에 내이혈에 속한 혈도지. 난 풍이혈이란 이름밖에 몰라."
"이중이혈 말씀하시는 거군요."
도가에서 부르는 이름이 다르고 의원들이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게다가 무공 유파에 따라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임의로 혈도 이름을 바꾸는 일도 허다해서 같은 혈도를 다른 이름으로 아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각이나 영생과 같았다. 이건 영대靈臺야. 영대를 뚫으면 영생한다는 말이 있네."
풍불지의 도움으로 총 서른일곱 혈도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이게 연기법이 확실한가? 서로 연결이 안 되고 혈도 순서도 뒤죽박죽이고."
엉덩이에서 갑자기 귀로 갔다가, 귀에서 등으로 왔다가, 등에서 머리로 간다.
"혹시 이어주는 혈도가 따로 있는 게 아닐까요? 이 글을 거꾸로 읽는다든가."
구후영이 한참 기다렸으나 풍불지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뭘 보는 거지?'
구후영은 조용히 움직여 풍불지가 뭘 보는지 확인했다. 풍불지의 시선은 마지막 몇 장에 붓으로 대충 그린 선들에 고정되어 있었다.
"젊은 친구. 내가 벽결劈訣이랑 요결撓訣이랑 도결挑訣까지 다 가르치지."
벽결은 내려치기고 요결과 도결은 올려 치는 공격이다. 다른 점이라면, 요는 아래에서 위로 베고, 도는 힘으로 상대를 들어 중심을 흔든다.
"네?"
"내가 여기서 검법 하나 찾았네. 이게 너무 대단한 검법이라서 내가 익힌 무공을 다 전수해도 모자란데, 내공심법은 일인전승이고 내게 이미 제자가 있다 보니, 게다가 형제도 사부가 있잖은가. 그러니까 내 남은 검결이랑 방금 찾은 검법을 알려줄 테니 우리 비긴 거로 하세."
격동한 나머지 풍불지가 횡설수설했다.
"어디서 검법을 찾으셨습니까?"
"여기 써 있잖은가. 이렇게, 이렇게."
풍불지가 침을 튕기며 양손을 마구 휘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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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후영은 아무리 봐도 붓으로 대충 그은 선에서 풍불지는 초식도 아니고 무려 완전한 검법을 발견했다.
"이건 난화검법이라고 이름을 지어야겠어. 쇠로 만든 검으로도 이리 부드러운 검법을 펼칠 수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긴다 하면 떠오르는 게 무당이다. 그러나 무당도 맨손이나 짧고 굵은 무기로 이유극강을 펼치지 검으론 해내지 못했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려면 상대의 힘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는 게 관건인데, 그렇다고 해도 아예 피하는 건 어렵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의 힘은 견뎌야 하는데, 대부분 세 근도 안 되는 검으로 펼치면 무기가 부러지기 일쑤다.
"정말 대단한 검법이야. 마치 바둑 두는 거 같아."
풍불지의 말에 따르면 난화검법은 바둑처럼 상대가 아무 곳이나 공격하지 못하게 제한한 다음, 예상한 공격을 되받아쳐 이득을 보는 방식이다.
'머리 비우고 일단 무조건 수용하자.'
구후영은 결국 이해를 포기하고 풍불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흥분한 풍불지가 횡설수설하는 것도 있지만, 구후영의 경지로는 단지 귀로 들어서 난화검법을 이해하는 건 힘들었다.
"자네, 내가 가르친 검결들은 잘 수련하고 있나?"
구후영은 검을 휘둘러 풍불지가 가르친 것들을 최대한 자세히 펼쳤다.
"참결과 자결과 벽결은 내 예상보다 뛰어나군. 다른 둘은 부족함이 보이는데, 급할 건 없어. 검술 경지가 높으니 언젠간 괜찮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거야. 그럼 이제부터 난화검법을 익히지."
며칠째 붓으로 친 난만 들여다보던 풍불지가 갑자기 구후영의 성취에 관심을 가진 건 이유가 있었다.
부러진 다리 때문에 움직임을 조심해야 하는 풍불지는 직접 난화검법을 수련하지 못한다. 한시라도 빨리 난화검법의 실체를 확인하고픈 생각에 결국 못 참고 자신이 말하고 구후영이 초식을 펼치는 특이한 수련 방법을 고안해 냈다.
"미심혈眉心穴이 건이고 회음혈이 곤이네. 참결로 팔괘의 건에서 진의 방위로 빠르게 가다가 바로 멈추고, 진에서 이로 조금 느리게 가세. 거기에서 벽결로 밑으로 칠 푼 정도 내려왔다가 꺾어서 아까 팔괘의 손으로 가. 거기에서 자결로 반쯤 찌르다가 검을 회수해서···"
마음이 급한지 풍불지가 빠르게 말했다.
"펼칠 수 있지?"
곁에서 지켜보던 약초꾼이 혀를 찼다. 방금 풍불지가 한 말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그 말을 이해해서 초식 하나를 뚝딱 펼치라니. 약초꾼 입장에선 이건 시비 거는 거나 다름없다.
"한 번 해볼게요."
구후영이 풍불지가 가르친 적 없는 보법까지 섞어서 방금 설명 들은 초식을 완전하게 펼쳤다.
"세 곳이 틀렸어. 여섯 번째 베기에서 검을 조금 더 눕히고···"
곁에서 지켜보던 약초꾼은 동굴 벽에 머리를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려서부터 몸에 좋은 약초를 자주 섭취했고 자질도 나쁘지 않은 덕분에 내공이 심후하다. 거기에 싸움도 타고나서 비록 절정에 이르진 못했으나 강호 어디에 가도 고수 소리를 듣는 수준이다.
그런데 붓으로 그은 줄을 보고 검법을 찾아내는 풍불지나, 한 번 듣고 완전한 초식을 구사하는 구후영을 보니 자괴감이 태산처럼 무겁게 짓눌렀다.
혼자만의 생각에 깊이 빠진 약초꾼은 몰랐지만, 자괴감에 짓눌리는 건 구후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좋아. 다음 초식."
'선 하나에 초식 하나라고? 어떻게 초식을 선 하나에 담지?'
무공에서 가장 중요한 건 육합六合이다. 육합은 전후좌우와 상하를 말하지만, 무공에선 눈과 손, 발과 몸, 생각과 힘의 육합을 뜻하기도 한다.
이는 모든 권법의 기초이기도 한데, 손이 가는 곳에 눈이 가야 하고 발의 움직임은 늘 몸의 균형을 생각해야 하며 발경은 항상 머리로 생각했던 대로 이뤄져야 한다.
그렇기에 무공은 입체적이고, 생각과 힘을 빼더라도 눈과 손과 발과 몸 이렇게 네 개 요소가 있다.
그걸 선 하나로 표현하는 건 구후영이 아무리 머리 터지게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걸 또 알아보고 초식을 일일이 지도하는 풍불지가 있으니 안 믿으려야 안 믿을 수 없다.
"마음을 다스리게. 최소 검 잡았을 땐 무애의 경지에 들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가."
"송구합니다."
마음을 다잡은 구후영은 잡념을 지우고 풍불지의 지시대로 초식을 하나하나 구현했다.
"자넨 일단 요결과 도결을 수련하게. 난 난화검법을 좀 더 생각해야겠어."
모든 초식을 본 풍불지가 다시 책에 집중하며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의원. 도대체 무슨 도깨비놀음이오?"
좌절감에 허덕이던 약초꾼이 정신을 차리고 구후영에게 질문했다.
"선에서 초식을 찾아냈고 저더러 시연하게 했습니다. 모든 초식을 확인했으니 이젠 검의를 고민할 차롑니다. 검의劍意의 고민이 끝나면 그에 맞춰 초식을 수정할 거고, 수정한 초식을 통해 다시 검의를 고민합니다. 그렇게 초식과 검의가 일치해지면 검법을 대성한 겁니다."
구후영의 설명에 약초꾼이 입을 딱 벌렸다.
"명문정파는 다 이런 식으로 수련하는 것이오?"
"아닙니다. 풍 대협이 대단한 것이지요."
구후영이 흠모 가득한 눈으로 풍불지를 바라봤다.
'의원도 대단해.'
약초꾼이 비슷한 눈으로 구후영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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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식 수정을 십수 번 반복한 후, 풍불지가 갑자기 눈을 감고 명상에 들었다. 가슴의 기복이 전혀 없어 이대로 죽는 게 아닌지 걱정도 했었지만, 얼굴에 점점 혈색이 도는 게 송장은 절대 아니었다.
"의원. 여길 나가면 염치없지만 내 아들을 낙화문에 보내고 싶소. 아이 자질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의원이 어떻게 힘 써줄 수 있소?"
"저희 문파는 사부와 저 그리고 열 명의 어린 제자만 남았습니다. 제 동생을 찾더라도 고작 열세 명입니다. 거기에 산서 무림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용호표국과 척을 진 상태입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허허. 내가 서른 몇 해를 헛살진 않았소. 잎 하나만 봐도 가을을 안다는 말도 있잖소. 의원만 보면 낙화문이 얼마나 훌륭한 문파이고 앞날이 얼마나 창창한지 알 수 있소."
일엽지추一葉知秋는 단풍 하나만 봐도 가을이 왔음을 안다는 말이다.
'일엽으로 지추하는데, 선 하나로 초식을 알아낼 수도 있지.'
약초꾼의 무심한 말이 그간 구후영의 가슴에 답답하게 쌓였던 걸 한 방에 뚫어줬다.
비록 그간 어떻게든 잡념을 지우고 풍불지가 알려준 대로 초식을 펼치려 애썼지만, 어쨌든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초식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런데 약초꾼 덕분에 걸리적거리던 게 사라지자 난화검법이 다르게 다가왔다.
"의원, 무슨 일이요?"
구후영이 대화하다 말고 갑자기 검을 들고 달려가자 약초꾼이 놀라 외쳤다.
자신만의 세상에 깊이 빠진 구후영은 약초꾼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 난화검법의 초식을 차례대로 펼쳤다.
전과 달리 초식을 이룬 베기와 찌르기 등 기본 동작의 연결이 훨씬 부드러웠고, 다음 초식으로 넘어가는 것도 구렁이 담 넘듯 자연스러웠다.
혹시 쌍둥이 자매가 온 게 아닌지 걱정하던 약초꾼도 모든 걸 잊고 구후영의 검에 취했다.
'생기가 느껴진다.'
난의 이파리처럼 시원시원하게 뻗는 획들이 모여 아름답고 청초한 난꽃을 피워냈다. 작고 조용하고 아름다운 난꽃들이 만발하더니 서로 닮아갔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달라지며 한결 아름다워졌다.
"제가 얼마나 검을 휘둘렀습니까?"
검을 멈춘 구후영이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질문했다. 비록 볕이 거의 안 드는 동굴이라서 날씨에 비해 춥긴 하지만, 저리 짙은 입김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두 시진은 될 거요."
약초꾼이 한껏 질린 얼굴로 말했다. 자신도 귀한 약초를 캐려고 한두 시진씩 절벽에 붙어 있기도 하지만, 천천히 움직이고 지치면 쉬기도 한다.
구후영은 두 시진 내내 단 한 순간도 안 쉬고 검을 계속 휘둘렀다.
그때, 풍불지가 쿨럭 하더니 검은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풍 대협, 무슨 일입니까?"
"젠장. 초식 세 개를 못 잊어서 내상을 조금 입었네."
풍불지는 검의만 남기고 초식을 지우려고 명상에 들었다. 그런데 초식 세 개가 끝까지 버틴 바람에 실패하고 작게나마 내상을 입고 말았다.
"진짜? 일부러 날 속이는 건 아니지?"
두 시진 내내 검을 휘두르느라 지쳤던 구후영이 아픈 허리를 억지로 폈다. 약초꾼도 손에 거위알 크기의 돌멩이를 잡은 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럼. 피 토한 거 봤잖아. 그러니까 의심하지 말고 어서 와."
- 작가의말
구후영 : 후, 드디어 뽕을 뽑았구영.
요새 맞춤법 검사기가 접속이 안 되든가 작동이 제대로 안 되든가 말썽이네요. 오타 보이시면 지적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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