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황거류洪荒巨流
혼돈混沌이 초개初開한 원고遠古 시대를 홍황이라고 부른다.
산해경에 따르면 홍황의 시대에 인간은 한낱 미물이었는데, 하루가 멀다고 터지는 홍수와 지진과 산사태를 비롯한 천재지변에 괴롭힘을 당했다.
개중 세상을 다 쓸어버릴 것 같은 거대한 홍수가 몇 번이나 있었는데, 인간은 이를 홍황거류라고 칭했다.
"정가장엔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대단한 아가씨가 있었소."
내공이 실린 덕분에 소곤거리는 듯한 원경의 말이 연무장 모든 사람의 귀에 똑똑히 전달됐다.
"미모가 얼마나 뛰어났으면 채 열 살이 되기도 전에 드나드는 매파들 때문에 대문의 문턱이 닳을 정도였고, 재기도 뛰어나서 아가씨가 지은 시를 본 선비들이 하나같이 여인으로 태어난 게 아쉽다며 탄식했소."
원경은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무림대회의 참석자들한테 질문을 던졌다.
"혹시 개봉에서 오신 분이 계시오? 내 말이 진실인지 얘기해 주셨으면 하오."
그에 검은 두건이 나섰다.
"정가장 소장주 정해원이오. 당신이 말한 아가씨는 내 고모인데, 오래전에 괴질로 돌아가셨소."
"소승은 괴질이 아니라 자살한 거로 아는데."
원경의 말에 정해원이 발끈했다.
"허튼소리! 고모는 어려서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약을 입에 달고 사셨소. 이십여 년 전에 개봉부에 괴질이 돌아 수백 명이 죽은 일이 있는데, 고모도 그때 돌아가신 거요."
"아가씨한테 첩신아환貼身丫鬟(종일 붙어 다니는 전용 시녀)이 있는데, 혹시 그때 괴질로 함께 죽었소?"
원경의 말에 정해원이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글쎄요. 내가 거기까진 알지 못하오."
"소승이 열 살 정도 됐을 때 장난이 심해 크게 사고를 친 적 있소. 일을 저지르곤 겁에 질려 찾는 사람이 없는 절간의 불상 뒤에 숨었소. 그때 정가장 아가씨의 첩신아환이 부처께 하는 얘기를 엿들었는데, 지금 여러분께 알려드릴까 하오."
공유의 죽음, 무림대회, 소림, 이 모든 것과 무관한 듯한 이야기가 서서히 홍황의 거류를 만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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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숙, 둘을 제거할 게 아니라면."
십팔동인진은 이제 없다. 총 열여덟 개의 동인 중 반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서졌고, 나머지도 최소 팔다리 하나는 온전치 않았다.
복구하는 방법을 모르는 건 둘째 치고, 복구한다고 해도 원래의 단단함을 잃어 진법의 위력이 예전 같지 않다.
백팔나한진도 당분간 없고 십팔동인진은 영원히 사라졌으니 원경이 사칙을 들먹이며 환속하겠다고 나서면 소림은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다.
"원경을 붙잡아야 합니다."
사숙들이 방장의 뜻대로 움직일 의향이 전혀 없어 보이자 접객화상은 원경을 붙잡는 쪽으로 설득하기로 했다.
"내가 열네 살이 될 즈음이었나."
접객화상은 소림의 미래를 걱정하며 애가 타서 재가 될 지경인데, 사숙은 엉뚱한 얘기를 꺼냈다.
"그때 소림은 지금처럼 풍족하지 않았다. 불타고 허물어진 절간을 재건하려고 다들 허리띠를 졸라매던 시절이었지. 배고픈 나머지 우리 사형제들은 개를 잡아 삶아먹기로 했다. 그때 앞장선 게 네 사부였지."
"제 사부님이요?"
자비심이 넘쳐 개미 한 마리 못 밟던 사부가 개를 잡으려 했고 그것도 앞장섰다고 하니 접객화상은 전혀 믿기지 않았다.
"당시 절간을 짓느라 잡부들이 많이 드나들 때라 발각돼도 그놈들한테 뒤집어씌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늘어놓던 사숙이 갑자기 실소했다.
"네겐 별로 재밌는 이야기가 아니겠구나. 결론만 말하자면, 우린 개를 잡았으나 먹지 못했다."
"들킨 겁니까?"
"개가 너무 커서 가마에 들어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구워 먹기로 했는데, 연기 때문에 들켜서 회초리를 맞고 덤으로 사흘 굶는 벌까지 받았지."
말하던 사숙이 껄껄 즐겁게 웃었다.
"이제야 생각난 건데. 그때 우릴 잡은 사숙은 그게 개를 구울 때 나는 연기라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그게 원경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답답한 나머지 접객화상은 불경을 무릅쓰고 사숙의 말을 끊었다.
"그때 우리가 닭을 잡았으면 배는 안 부르더라도 들키지 않았을 거다. 당시 배고픈 나머지 생각이 짧았던 거지."
사숙이 탄식했다. 접객화상은 문득 사숙이 당시 개고기를 못 먹은 게 아쉬운 건지 들켜서 벌 받은 게 아쉬운 건지 궁금했다.
"소림의 그릇이 원경을 담을 정도가 되는지 모르겠구나. 억지로 담으려다간 그릇이 깨질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묘가 작으면 큰 부처를 모시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원경을 잡아두는 게 소림에 꼭 좋은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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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더운 여름이었소. 아가씨는 물놀이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만 횡액을 당하고 말았소."
원경이 작게 탄식하고 말을 이었다.
"미색을 탐한 무도한 자가 아가씨를 납치해 겁탈했소."
"그만! 정가장과 작고한 내 고모의 명예를 더 이상 더럽히지 마시오."
정해원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말했다.
"정 공자는 달콤한 거짓과 아픈 진실 가운데 달콤한 거짓을 택하려는 거요?"
"당신이 아픈 거짓을 꾸며낸 건 아니고?"
"다시 말하지만, 나는 불상 뒤에 숨어서 첩신아환이 부처께 하는 넋두리를 엿들은 거요. 첩신아환은 절간 안에 자신밖에 없는 줄 알았을 테니 굳이 거짓을 꾸며낼 이유가 없지 않소?"
정해원은 잠깐 호흡을 고른 다음 원경의 말에 반박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정가장은 그저 쉬쉬하고 지나치지 않았을 거요. 내 조부가 고모에 대한 총애는 현 가주인 내 부친이 지금도 섭섭하다고 외울 정도요. 어디 떠들고 다닐 일은 아니지만, 불미한 일이 있었다면 반드시 복수했을 거고, 소가주인 내가 모를 리 없소."
정해원의 말에 원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정가장은 소문을 막기 위해서라도 첩신아환을 입막음했을 거요. 돈을 두둑이 준다든가, 멀리 시집보낸다든가."
혹은 영원히 입을 못 열게 한다든가.
"맞는 얘기요. 그러나 정 공자는 아주 커다란 가능성 하나를 빠뜨렸소. 상대가 너무 대단해서 정가장이 참을 수밖에 없었다는 가능성 말이오."
"오만하다고 비웃어도 괜찮은데, 개봉에서 정가장의 눈치를 전혀 안 보는 인간은 지금도 없고 예전에도 없었소."
한나라 때 대사농을 지낸 정당시를 시조로 하는 개봉의 정씨는 당나라 때 무려 열두 명의 재상을 배출한 명문이다. 명에 이른 지금엔 한나라나 당나라 때의 성세가 없지만, 개봉에 한해서는 왕 부럽지 않은 가문이다.
"그자가 소림의 고수라면?"
원경이 툭 던진 말에 연무장 여기저기에 난리가 났다.
"그저 고수도 아니고 나한당 당주라면?"
그러나 이어진 폭로엔 놀란 나머지 모두 잠잠해졌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뜻밖의 지목에 멍해졌던 원병이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한테 쏠린 걸 느끼고 화나서 고래고래 외쳤다.
"아까 원호가 내가 나한당에 불을 세 번 질렀다고 했잖소. 내가 아무리 취해도 다른 곳은 놔두고 괜히 나한당에만 불을 지른 게 아니었소."
"이놈이 어디서 함혈분인含血噴人(입에 머금은 피를 뿜어 상대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감)하는 거냐?"
원병이 시뻘건 얼굴로 우레처럼 우렁차게 호통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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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은 단순한 아입니다. 천년 소림이 그 아이를 못 품는다곤 생각지 않습니다."
접객화상은 여전히 사숙을 설득하려 했다.
그에 사숙이 딴 얘기를 꺼냈다.
"십여 년 전에 자개봉과 약당봉과 탁검봉에 산불이 연이어 난 일이 있는데, 그게 네 짓이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접객화상이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제자가 잘못했습니다."
"그때 왜 그랬냐?"
"죄송합니다."
"왜 그랬냐고 묻잖느냐."
접객화상은 겁먹은 나머지 벌벌 떨리는 손을 소매 안에 숨기며 말을 더듬거렸다.
"소, 속이 갑갑해서, 아마도, 정신이."
"불을 지르고 반년 뒤에 네가 접객원 원주가 되었지?"
"맞습니다."
사숙이 탓하려는 뜻이 없어 보이자 접객화상도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우리도 다 겪은 일이다. 무공을 익히는 것과 불경을 깨우치는 건 모순되는 행동이니까."
접객화상이 배우기론 무공으로 몸을 단련하고 불경으로 정신을 닦아 부처의 뜻을 깨우친다. 그러나 감히 사숙의 말에 반박할 엄두가 나지 않아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너 정도면 다 양호한 거다. 원철은 벽을 느꼈을 때 산채를 돌아다니며 백 명이 넘은 산적을 죽였다."
접객화상은 자신이 방화한 사실을 들켰을 때보다 더 놀랐다.
"그리고 원철보다 더한 짓을 저지른 아이들도 있지. 이게 다 역근경과 세수경을 버린 탓이다."
소림의 칠십이절기는 법여대사가 만든 거로, 부처의 가르침을 오롯이 따랐다. 문제는 역근경과 세수경에 뿌리를 둔 탓에 불심이 깊고 부처의 가르침을 깊이 깨닫지 않으면 높은 성취를 이룰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송나라에 이르러 소림은 결국 역근경과 세수경을 버렸고, 칠십이절기를 포함한 대부분 무공을 바뀐 심법에 알맞게 개조했다.
그때부터 소림의 무공은 부처의 가르침과 방향이 어긋났고,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도저히 해소할 수 없는 모순 때문에 크고 작은 심마가 필연적으로 오게 되었다.
접객화상은 그 심마를 방화로 해소했고, 원철은 살인으로 해소한 듯했다.
'살인보다 더한 짓이라면.'
비록 소림이 살인은 물론 살생도 금하고 있으나, 악인을 죽이는 일은 크게 주저하지 않는다. 소림이 살인하느냐 마느냐로 전전긍긍했으면 애초에 무림에서 태산북두의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다.
'뭐가 있지?'
접객화상이 경악했던 것도 원철이 죽인 산적의 숫자 때문이지, 원철이 살인한 것에 놀랐던 게 아니다.
그 탓에 사숙이 말한 더한 짓이 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공유는 다 알고 있었으니, 원경도 너희의 약점을 알지 모르겠구나."
"원경이 그걸 무림대회에서 폭로하면!"
"큰 문제가 되지. 그러니 이 일은 사백께 부탁할 수밖에 없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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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인 거요?"
옥무영이 원경에게 속삭여 질문했다.
"조만간 증인이 도착할 거요."
술과 고기를 탐하고 불손한 언행을 일삼고 나한당에 방화하는 등 비행이 알려진 탓에 원경의 말이 힘을 잃었었다.
원경은 똑같은 수법으로 소림의 발언을 무력화하는 거로 구후영을 구하는 동시에 겸사겸사 사부의 시신을 훼손한 것에 복수하기로 했다.
"그럼 막 나가도 괜찮은 거요?"
옥무영의 말에 원경은 물론이고 구후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오히려 사건이 커져 사람들이 회자할수록 소림의 보복을 덜 걱정할 수 있다.
"풍옥문 소문주 옥무영이 나한당 당주 원병한테 대결을 청하오."
맑은 목소리로 외쳐 사람들의 주의를 끈 옥무영은 원병에게 거절할 틈도 주지 않았다.
"거절하면 여인을 겁탈한 후안무치한 폭도임을 인정한 거로 알겠소."
"내가 이기면?"
가뜩이나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었던 원병이 거칠게 반문했다.
"이긴다고 진실이 바뀌진 않겠지. 대신 변명할 기회 정도는 드리겠소."
소림이 구후영에게 하려던 짓을 그대로 돌려주며 옥무영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술을 먹었을 때보다 더 행복한 기분을 느꼈다.
- 작가의말
옥무영의 작고 소중한 행복.
이제 심판의 망치는 달마원의 원로들 손에 들어갔네요. 이대로 마무리할지 아니면 일을 더 키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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