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장성세實張盛勢
철벽으로 격리된 공간에 싸늘한 기운이 흐르는 가운데.
누군가는 이를 갈고 누군가는 억울함에 눈을 부릅뜨고 누군가는 무심한 눈으로 냉소한다. 누군가는 깊은 생각에 잠기고 누군가는 태연하게 할 일을 하고, 누군가는 억지로 마음을 추스른다.
"그럴 시간이 없소."
잠깐 흐른 정적을 동엽이 깨뜨렸다.
"지금쯤이면 마 단주의 수하가 홍엽산장에 닥쳤을 거요. 장선이 대단한 무인인 건 인정하지만, 혼자서 수십 명을 막을 순 없을 거요."
"그 정도 대비는 하고 왔으니 걱정할 거 없소."
구후영이 연무쌍의 등에 꽂은 침의 깊이를 조절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 흔들림 없는 모습에 철혈방 사내들이 감탄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그 치료가 한 번에 한 명만 되는 거요?"
"두 명까지 되오."
"그럼 나도 해주시오."
왕경초의 말에 구후영이 고개를 저었다.
"삼촌을 먼저 해독한 다음, 왕 당주와 공 당주 두 분을 동시에 할 거요."
구후영은 양쪽의 균형을 맞춰 괜한 사달이 더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럼 우린 일단 간세부터 찾아야겠군."
공형선이 이를 갈며 말했다. 함께 역모까지 거론할 정도로 믿었던 마 단주의 배신에 화가 잔뜩 쌓여서 어떻게든 풀고 싶었다.
"근데, 구후 장주는 왜 괜찮은 거요?"
은도당 쪽 사내가 불쑥 질문했다.
"백독불침이오."
"우선 구후 장주가 청백함을 증명하고, 다음엔 동엽의 말이 진실인지 가리고, 그다음이 간세를 찾는 거라고 보오."
그에 구후영은 은도당과 금검당 쪽에 놓인 술단지를 번갈아 가며 들어 자신의 입에 술을 콸콸 부었다.
"이젠 믿겠소?"
"이걸 복용하면 믿겠소."
은도당 사내가 품에서 보라색 도자기 병을 꺼냈다.
병을 받아 냄새를 맡은 구후영이 피식 웃었다.
"꽤 강한 독으로 보이오."
그에 은도당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그걸 먹으면 내 목숨은 당신 거요."
구후영은 독단을 한 알 집어 모두가 보게 입에 넣고 오독오독 씹어 삼킨 후, 술로 입을 헹구기까지 했다.
"진짜 백독불침인가?"
구후영은 몸에 들어온 단장초의 독을 바로 운기하여 제압했다. 덕분에 입술이 까맣게 질리거나 호흡이 거칠어지는 등 중독 증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은 당신 차례요. 은도당에 간세가 있는 게 확실하오?"
질문을 받은 동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행사는 매우 은밀하오. 홍엽산장의 일은 전대 마 단주와 육비나타가 진행해서 마 단주도 모르오. 반대로 은도당의 간세와 접촉한 건 마 단주뿐이어서 난 모르오. 그러나 마 단주가 은도당의 간세를 통해 필요한 정보를 제때 얻어온 건 확실하오."
"그럼 왜 그 간세가 오늘 이 자리에 있다고 확신하오?"
"내가 며칠 전에 마 단주의 소매 안쪽에 특별한 향을 묻혔소. 마 단주가 손으로 만져야만 향이 옮게 말이오. 오늘 은도당 쪽에서 줄곧 그 냄새가 났소. 자기들끼리 옮겨서 한 명을 콕 집긴 힘들지만."
적대하는 자가 자신의 몸에 함부로 손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상대가 절정에 이른 고수라면 더욱더 그렇다.
은도당에 간세가 있는 건 거의 확정이다.
"좋소. 당신의 말도 믿겠소."
연거푸 질문을 쏟던 사내가 말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내 목숨은 구후 장주에게 맡겼소. 날 간세로 의심하여 죽으라면 웃으며 죽겠소."
말을 마친 은도당 사내가 구석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장기간 은도당 쪽 정보를 유출했다면, 철추당은 아니겠군. 그럼 남은 게 나랑 왕 당주인데, 왕 당주는 절대 아닐 테니."
구레나룻이 무성한 사내가 피식거리며 말했다.
"난 양 단주와 조 단주 둘 다 믿소."
묵묵히 듣기만 하던 왕경초가 말했다.
"만약에 진짜 마 단주에게 소식을 흘렸다고 해도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있어서라고 생각하오. 마 단주와 함께 우리 모두를 해할 잔악무도한 짓을 벌일 사람은 절대 아니라고 보오."
바닥에 누운 양 단주와 구레나룻 조 단주 모두 감격으로 눈물을 글썽였다.
"저 둘로 인해 철혈방과 여러분이 손해를 본다면 이 왕 모가 목숨으로 책임지겠소. 그러니 이 일은 묻읍시다."
"젠장. 여기서 반대하면 나만 좀생이 되는 거잖아."
공형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구후 장주의 생각은 어떻소?"
"여러분 모두 절정의 경지에 이른 무인으로 알고 있소."
구후영이 차분히 말했다.
"아마 내가 등장했을 때 누구나 경지를 가늠하려 했을 거요. 혹시 내 경지를 정확히 측정한 분이 계시오?"
구후영의 눈길을 받은 사람 모두 고개를 저었다.
"난 두 달 전에 절정에 이르렀소."
구후영의 말에 가장 놀란 건 공형선이었다. 석 달 전에 일지봉의 연회에서 상대가 일류 초입의 경지임을 확인한 적이 있기에 유일하게 구후영의 말을 의심했다.
"낙화문의 장문검은 세 번에 한해 화산 검종의 모든 제자를 부려먹을 수 있소.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안 썼는데, 현재 장문검이 내 손에 있소."
말을 마친 구후영이 연무쌍의 몸에서 침을 뽑았다.
"반 각 뒤면 내공이 돌아올 겁니다."
"알았다."
연무쌍과 짧게 대화한 구후영이 다시 공형선 등에게 말했다.
"내가 신검 풍불지 대협과 인연이 있는 건 공 당주께서 잘 아실 거고."
신검 풍불지는 다소 경박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사람과 쉽게 친해진다. 그래서 공형선도 크게 마음에 두진 않았는데, 구후영의 말을 아니라고 하기도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신창 악불형 대협과도 인연이 있소."
"무슨 얘긴지 알겠소. 이대로 덮어는 두는데, 혹시라도 딴마음 먹지 말라는 거 아니오?"
양 단주의 말에 구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혈포규찰대가 현재 홍엽산장에 있소."
말하던 중에 구후영의 눈에서 파란 불이 타올랐다.
"마 단주와 그 배후가 얼마나 대단한지 난 모르오. 어쩌면 동창이나 서창, 심지어 황실이 있는지도 모르오. 그러나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장담할 수 있소."
불시에 나타났던 파란 불이 사라지며 구후영의 눈이 한층 깊어졌다.
"난 위협이 되는 적은 절대 살려둘 마음이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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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사람을 치료하는 사이, 연무쌍의 내공이 돌아왔다. 내공을 회복한 연무쌍은 사방과 천장의 철판을 일일이 두드려 확인했다.
"잠깐. 철판이 따뜻한 거 같은데?"
철은 여름에 뜨겁고 겨울엔 차다. 확실한 겨울인 지금은 철판이 차가운 게 정상이다.
"불을 지핀 거겠지. 내가 그렇게 막으려고 했는데."
낮게 중얼거리던 동엽이 기절했다.
"내 검은 보검이오."
치료를 서둘러 마친 구후영이 말했다.
"문제는 안에 수은이 들었소. 철벽 대신 내 검이 깨진다면 우리 모두 중독으로 죽을 거요. 수은은 일반 독과 달라 나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드오."
구후영이 잠깐 쉬고 말을 이었다.
"일각 혹은 더 긴 시간이 흘러 모두 내공을 회복하면 벽을 무너뜨리고 나갈 수 있소. 그러면 우린 무사할 거요. 하지만, 지금 나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오. 난 여러분께 선택을 맡기겠소."
공형선과 왕경초가 잠깐 눈빛으로 교류했다.
"당장 나갔으면 하오."
공형선이 말했다. 왕경초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후 장주께 부탁하오. 제발 철혈방을 구해주시오."
양 단주가 몸을 일으켜 구후영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에 남은 사내들도 연이어 무릎을 꿇었다.
공형선과 왕경초만 어색한 얼굴로 서 있었다.
"여기 벽이 그나마 얇다."
계속 벽을 두드려 확인했던 연무쌍이 북쪽을 추천했다.
"뒤로 피해주시오."
연무쌍이 기절한 동엽을 끌고 대문 쪽으로 가자 남은 사내들도 움직였다.
구후영은 동엽이 앉았던 상을 밀어 한쪽으로 치운 다음, 정신을 하나로 모았다.
'아버지를 닮았어.'
구후영은 구후율과 닮은 구석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검을 들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니 아버지와 흡사했다.
'율이가 살아서 이 모습을 봤다면 얼마나 기쁠까.'
"핫!"
철벽 앞까지 간 구후영이 기합을 지르며 검을 내리쳤다.
쩌적.
처음엔 그저 맹수의 발톱에 할퀸 듯 깊은 선 하나만 생겼다. 그러나 채 숨을 두 번 쉬기도 전에 선에서 무수한 실금이 뻗어 나갔다.
'분명히 베는 동작이었는데 저리도 강한 충격을 줬다고?'
공형선도 예리한 보검을 들면 철벽에 선 하나 정도 그을 자신은 있다. 그러나 실금이 생길 정도로 강한 충격을 주는 건 아무리 상상해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들 준비하시오."
말을 마친 구후영이 다시 천공교검으로 철벽을 내리쳤다.
쾅!
철벽이 마치 망치질을 당한 얼음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동시에 뜨거운 화기와 함께 다량의 연기가 안으로 확 들어왔다.
"영아."
연무쌍이 황급히 달려가 쓰러지는 구후영을 뒤로 당겼다. 그러곤 쌍장을 강하게 휘둘렀다.
'역시 여의경천.'
연무쌍의 양손에서 생긴 바람이 연기를 흩어버렸다. 왕경초도 가능한 일이지만, 연무쌍처럼 아무런 준비도 못 한 상황에 저리 자연스럽게 해내는 건 자신 없었다.
"구후 장주의 검을 챙기시오."
불길이 별로 세지 않음을 확인한 왕경초가 양손을 부들부들 떠는 구후영을 업고 밖으로 나갔고, 검은 공형선이 챙겼다.
'날을 안 세운 검?'
보검이라고 해서 무조건 예리한 검이라고 생각했던 공형선은 우선 천공교검의 가벼움에 한 번 놀라고, 날을 전혀 세우지 않은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진정한 보검은 날이 아닌 예기로 벤다더니. 아무래도 천하에 둘도 없는 보검인가 보다.'
공형선도 검을 쓰는 무인으로서 욕심이 생기긴 했으나, 구후영이 아까 읊었던 명단을 생각하며 이내 떨쳐냈다.
'보검도 능력이 되는 자가 쓰는 거지.'
'큰일이다.'
구후영을 업고 밖으로 나온 왕경초가 눈에 보이는 장면에 아연실색했다.
일행을 가뒀던 방의 불길은 천 명이나 되는 철혈방 방도를 가둔 연무장의 벽을 태우는 불길과 비교하면 그저 장난이었다.
"동엽을 깨워야겠소."
왕경초 다음으로 나온 공형선이 다급히 말했다. 그에 연무쌍이 동엽의 혈도를 짚었다.
"컥!"
기절에서 깬 동엽은 손에서 오는 어마어마한 통증에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시간이 흐르며 천천히 효과를 보는 약과 달리, 침은 처음에 효과가 제일 좋고 시간이 흐르며 점점 약해졌다.
"저기 무슨 짓을 했는지 빨리 말해."
정신을 차려 밖으로 나온 사실을 알아챈 동엽이 눈물을 흘렸다.
"죽어야 할 자들이 살고 살아야 할 자들이 죽는구나."
"개소리 말고 빨리 말해."
"나무로 벽을 세 층 쌓았고, 벽 사이에 건초를 잔뜩 넣었소. 지금 타는 건 가장 바깥이어서 아직은 괜찮은데, 두 번째 나무 벽이 타면 다 죽는다고 했소.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데, 불로 태워죽이는 게 아니라 연기로 죽인다고 했소."
그때, 내공으로 손 떨림을 없앤 구후영이 힘겹게 일어섰다.
"내게 방법이 있소."
말을 마친 구후영이 소매에서 진천뢰를 꺼냈다.
"다들 뒤로 물러나시오!"
내공을 실어 힘껏 외친 구후영은 귀에 감각을 집중해 소리를 들은 다음, 사람이 없는 곳을 골라 진천뢰를 던졌다.
곧, 천둥이 놀라 도망칠 정도의 굉음과 함께 불타던 나무 벽이 와르르 무너지며 꽤 넓은 출구가 생겼다.
- 작가의말
허장성세 = 근자감 = 근거 없는 자신감.
실장성세 = 근자감 = 근거 있는 자신감.
슬로피 님이 추천을 써주셨습니다. 기쁜 동시에 어깨가 더 무겁게 느껴집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비축분을 빨리 수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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