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선골新胎鮮骨
청풍죽림과淸風竹林過
맑은 바람이 대나무숲을 스치고,
명월현천괘明月玄天掛
밝은 달이 검은 하늘에 걸렸다.
한운녹담영閑雲綠潭映
호젓한 구름이 푸른 못에 비치고,
담무강상유淡霧江上流
옅은 물안개가 강 위를 흐른다.
"대사형, 어서 일어나서 우리랑 같이 수련해요."
어린 사제가 고르게 숨 쉬며 잠자듯 누워 있는 구후영에게 말했다. 그러나 처음 온 날과 마찬가지로 대사형은 사제의 응석에 묵묵부답이었다.
"대사형. 나 이제 낙화분분 초식 펼칠 때 검 안 떨어뜨려요. 진짜니까 눈 뜨고 한 번만 봐줘요."
다른 아이가 말했다.
"대사형. 모레면 우리 새 옷 맞추러 태원부 가요. 그니까 그때까지 꼭 일어나야 돼요."
어린 사제들이 거듭 말을 걸었지만, 구후영은 여전히 잠만 잤다.
"이놈들아, 잘 시간이다."
임초현의 외침에 낙화문 제자들이 아쉬운 얼굴로 구후영의 방을 떠났다.
"대사형, 제 목숨 구해주시고 제 아버지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빨리 깨서 저한테 심검을 가르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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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궁의 자매를 연이어 물리친 구후영은 그대로 기절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일지봉이었다.
몸이 말을 전혀 안 듣지만, 소리는 들렸다. 덕분에 대화로 상황을 대충 파악했다.
그날, 풍불지와 약초꾼 모두 구후영이 죽은 줄 알고 슬피 울었다.
적혈장이 소림의 대력금강지나 무당의 십단금처럼 널리 알려진 무공은 아니지만, 강호에 오래 몸담은 사람이면 얼마나 악랄한 장법인지 한 번쯤은 들어봤다.
더구나 풍불지는 적혈장에 배를 맞은 경험이 있다.
내공이 심후한 풍불지도 겨우 목숨을 부지했는데 내공이 일천하고 심장을 정통으로 맞은 구후영이 목숨을 부지할 거라곤 상상조차 어려웠다.
당시 약초꾼은 백화궁 궁주에 대한 두려움이 커서 처음부터 구후영을 돕지 못한 것 때문에 가책을 느꼈고, 풍불지 역시 자신이 검법을 급히 익히려고 무리하다가 내상을 입지 않았다면 구후영이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후회로 가득했다.
그러던 중, 구후영의 몸에 온기가 있음을 발견한 둘은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때부터 약초꾼은 몸에 좋은 약초라면 무조건 달여서 구후영 입에 넣었다. 덕분인지 구후영은 혼절한 상태에도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그렇게 약 이십 일 정도 지나고 풍불지의 다리가 회복했다. 풍불지는 약초꾼과 구후영을 한 손에 한 명씩 들고 경공을 펼쳐 동굴을 벗어났다.
밖에 나온 둘은 바로 백화궁에 가서 사람은 죽이고 재물은 빼앗고 건물은 불태웠다. 덕분에 반나절도 안 걸려 백화궁이 강호에서 지워졌다.
이는 백화궁 궁주에게 당한 복수를 하려는 것도 있었지만, 구후영을 치료할 돈을 마련하려는 게 주목적이었다.
일을 마치고 풍불지는 재물을 들고 구후영을 업은 채 서안부로 달렸다.
전력으로 달리는 풍불지를 따라잡을 재주가 없었던 약초꾼은 순하에 가서 그간 모은 돈을 모두 챙겨 봉양부로 갔다.
봉양부에 있는 약초꾼의 처가는 대대로 명문이었다. 약초꾼처럼 비천한 신분이 명문의 사위가 될 수 있었던 건 장인이 죽을병에 걸리자 아내가 치료에 필요한 약초를 가져오는 사람에게 시집간다고 공언한 덕분이다.
약초꾼은 희귀한 약초를 캔 덕분에 명문의 사위가 됐지만, 아내는 물론이고 처가의 누구도 약초꾼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처가 생활이 답답했던 약초꾼은 하나뿐인 아들이 불치병에 걸리자 봉양부를 떠나 순하에서 약초를 캐고 가죽이 비싼 짐승을 사냥하며 혼자 살았다.
약초꾼은 아들을 치료할 약초를 찾아 대별산을 누비던 중 우연한 기회에 백화궁 궁주의 적혈장이 삼음절맥을 치료할 수 있음을 듣고 귀한 약초와 짐승 가죽을 들고 가서 사정했다.
백화궁 궁주는 처음엔 내공 손실이 심하다는 이유로 거절했으나, 어느 날 갑자기 말을 바꿔 신농백초경 원본을 가져오면 치료해준다고 조건을 걸었다.
약초꾼은 천신만고를 거쳐 신농백초경 원본을 구해 아들의 병을 치료했다. 그럼에도 처가에서 약초꾼을 대하는 태도는 여전했다.
처가에 완전히 실망한 약초꾼은 취화봉의 동굴에 있을 때부터 아들을 데리고 태원부로 가서 살 마음을 굳혔다. 이젠 도망친 백화궁 제자들의 보복까지 걱정해야 하기에 결심이 더 확고해진 약초꾼은 봉양부의 처가에 몰래 들어가 아들만 데리고 나왔다. 아들 역시 천한 피가 흐른다고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던 터라 순순히 약초꾼을 따랐다.
둘은 늦여름에 태원부에 도착했고, 임초현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임초현은 약초꾼의 아들을 제자로 받고 약초꾼을 문파의 호법으로 임명했다.
약초꾼에게 호법이란 감투를 씌워 제자들을 돌볼 중임을 떠맡긴 임초현은 바로 서안부로 달려갔다.
안타깝게도 신의로 불리는 안물도 깨지 않는 구후영에 속수무책이었다. 차라리 익숙하고 추억이 많은 곳에서 깰 가능성이 크다는 말에 임초현은 구후영을 태원부로 데려왔고, 일지봉 꼭대기에 새로 짓는 장원에 안치했다.
그때부터 낙화문 제자들에게 새로운 일과가 추가됐는데, 다름이 아니고 아침과 점심과 저녁마다 대사형의 방에 가서 수다를 떠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해가 바뀌어 다시 여름이 왔는데도 구후영은 정신은 말짱한데 일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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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기는 안전하다. 그러나 운기와 연기는 위험하다.
운기 과정에 문제가 생기면 작게는 내상을 입고 크게는 주화입마가 온다. 내상은 기운이 꼬여 속이 답답하고 몸이 축나는 데 그치지만, 주화입마는 자칫 사람이 미쳐버릴 수도 있다.
연기는 주화입마의 가능성이 작다. 그러나 실수하면 내상을 입는 건 둘째치고, 내공 경지가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는 무인들에게 죽기보다 더 싫은 일이다.
그렇기에 일류의 경지에 이르기 전, 무인들은 운기와 연기를 극도로 조심한다.
이런 이유로 지난가을 일지봉에서 지각을 회복한 구후영도 처음엔 연기를 자제하며 긴 잠에서 깰 방법을 고민했다. 하지만, 안물도 못 한 일을 손가락 하나 못 까딱하는 구후영에게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시간이 흘러도 깰 기미가 안 보이자 구후영은 참을성이 바닥났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구후영은 자신이 왜 못 깨는지보다 왜 안 죽었는지를 고민하기로 했다.
'공청석유 때문이겠지.'
답은 간단했다.
'그렇다면 깨는 것도 공청석유에 달린 게 아닐까?'
심장에 적혈장을 맞고도 안 죽게 하는 공청석유라면 구후영을 깨우는 것도 간단한 일이다. 문제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답은 음서에 있다.'
확신은 없지만, 구후영이 매달릴 건 풍불지의 도움으로 음서에서 찾은 서른일곱 개 혈도뿐이다.
'어차피 이대로 못 움직일 바엔 모험하는 게 낫다.'
위험을 무릅쓰기로 마음을 굳힌 구후영은 심기로 공청석유의 기운을 느낀 다음 서른일곱 혈도에 순서대로 의념을 보냈다.
그러나 혈도 사이 거리가 멀어 기운의 흐름이 툭툭 끊기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이 지난 겨울부터 지금까지 매일 반복되었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뭘까?'
오늘도 구후영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자신이 아는 지식을 하나하나 꺼냈다.
'내가 쓸데도 없는 성현의 말씀은 진짜 많이 외워뒀구나.'
아는 걸 하나하나 떠올리던 구후영은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세게 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난 의원이다.'
안물이 실패했기에 의술 쪽은 그간 생각도 안 했는데.
태초에 아무도 없었으나 무극이 생겼다. 무극에서 태극이 나왔고, 태극이 움직였다. 태극의 움직임이 극에 달하자 멈춤이 되었다. 멈춤이 또 극에 달하자 움직임이 되었다. 그리하여 멈춤과 움직임의 구분이 생겼으며, 멈춤을 음이라 하고 움직임을 양이라 하였다.
음양론이 갑자기 떠올랐다.
사람 몸에는 보이는 기운과 안 보이는 기운이 끊임없이 순환한다. 계속 움직이니 양이나 극에 달하지 않아 음이 되진 못했다.
'내가 음을 만들면? 그러면 음양이 생겨서 뭔가 조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이어서 구후영의 생각은 서른일곱 혈도에 미쳤다.
'의념을 서른일곱 혈도에 분산해서 절대 정지의 상태를 만들면 공청석유의 기운이 날 깨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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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후영의 가슴에 여전히 남아있던 붉은 손바닥 자국이 점점 옅어졌다. 동시에 구후영의 볼에 홍조가 떠올랐다.
차가운 달빛에 더욱더 창백하게 보이던 얼굴이 생기를 띄기 시작하면서 숨이 깊어졌다.
구후영의 원기에 섞여 잠자코 있던 공청석유의 기운이 움직였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일정 양의 원기를 타고난다. 원기는 후천적으로 음식이나 약으로 키울 수 있지만, 거의 불가능한 일로 알려졌다.
구후영은 운 좋게 공청석유로 원기가 더 강해졌다. 그러나 제대로 이용하는 방법을 몰라 여전히 많은 공청석유의 기운이 원기와 섞인 채로 남아 있었다.
원래는 시간이 흐르며 이대로 고착되고 공청석유의 기운은 천천히 유실하는 게 맞는데, 구후영이 하필이면 심맥에 적혈장을 맞았다.
음기가 강한 공청석유의 기운들이 적혈장의 양기에 자극받아 단단히 뭉쳤다. 덕분에 즉사를 면했고 구후영의 목숨을 질기게 잡아뒀다.
거기에 구후영이 음양론으로 정확한 방법을 찾아낸 덕분에 적혈장의 기운을 깨끗이 몰아냈을 뿐이 아니라 한발 더 나아갔다.
구후영은 괜찮은 근골을 타고났지만, 축기와 연기가 부족해 내공은 잘 못 모았다. 그게 늘 한이 되어 무의식에 박힌 탓에, 공청석유의 기운은 구후영의 육신뿐이 아니라 체질도 바꿔줬다.
"컥!"
물론, 근골이 바뀌고 체질이 달라지는 일이 아주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구후영은 여전히 자의로 움직이기 힘들지만, 구후영의 몸은 극심한 고통에 갓 건진 생선처럼 팔딱팔딱 뛰었다.
'이러다 죽는 건 아니겠지?'
구후영은 이대로 못 깰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모험을 시작했지만, 정작 죽을 것 같은 극심한 고통이 몰려오니 멈추고 싶었다. 그러나 이대로 멈추면 영원히 자룡을 못 찾는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나약해지는 마음을 끊임없이 다잡았다.
"크! 컥! 크헉!"
고통으로 몸이 비틀어지며 원치 않는 소리가 입 밖으로 샜다. 그러나 구후영은 부끄러운 것보단 누군가가 발견하고 어떤 수를 써서든 자신의 고통을 덜어주기를 바랐다.
아쉽게도 다들 빠듯한 일과로 피곤에 절어 곤히 잠든 시각이라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푸하!"
갑자기 고통이 사라지며 구후영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마치 오랜 기간 잠수해 숨을 참다가 물 위로 올라온 기분이었다.
구후영은 손을 움직여 얼굴을 만졌다. 이어서 발가락을 움직여 보고, 혀를 내밀어도 보고, 눈도 깜빡였다.
'드디어 깼구나.'
이불을 젖히고 침상에서 일어난 구후영은 제자리에서 뜀질을 했다. 일 년 가까이 누워만 있어서 몸이 가벼워진 건지, 예전보다 훨씬 높이 뛰었다.
구후영은 내친김에 밖으로 나갔다. 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물동이가 보였다. 어린 제자들이 수련 목적으로 목마하에 가서 나무통으로 한 통 한 통 길어온 물이었다.
구후영은 팔을 벌려 물동이를 안은 후 온몸에 힘을 줬다. 물동이 무게는 배제하고 물만 해도 이백 근은 될 것 같은데, 구후영은 가볍게 들어 올렸다.
'뭐지? 새로 태어난 거 같아.'
구후영은 내친김에 걸음도 옮겨봤다.
- 작가의말
결재 신청서
확인 결과 시스템 오류는 없음이 밝혀졌습니다. 이에 캐릭터 동결을 해지할 것이며, 그간 플레이가 원활하지 못한 점에 관해 이하 옵션 중 하나를 선택해 보상하기를 제안합니다.
1. 개연성을 무시하고 구후영이 기억을 잃은 천마였다고 한다.
2. 개연성을 무시하고 신검이 자신의 내공을 전부 구후영에게 넘긴다.
3. 개연성을 무시하고 임초현이 사실 천마고, 사랑하는 제자를 깨우기 위해 자신의 무공과 내공 전부를 구후영에게 넘긴다.
4. 개연성에 부합하게 공청석유의 힘으로 구후영의 체질을 개선한다.
이에 결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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