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유지不知有之
마교와 소림 중 누가 더 강하냐고 물으면 중원 사람 대부분은 소림이라고 한다. 그러나 마교와 소림이 싸워 누가 이기냐고 질문을 바꾸면 다들 망설인다.
세간의 인식으론, 소림은 강하고 마교는 잘 죽이기 때문이다.
그 탓에 함께 마교에 맞서자는 막불위의 제안으로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랬는데.
"그랬군."
옥무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환희에 찬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
"소림부터 모든 게 음모였어."
"옥 대협. 자세한 설명 부탁하오."
막불위가 말했다.
그에 옥무영은 소림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했다.
"그러니까 저분이 진짜로 십팔동인진을 통과했단 말이오? 여기 구후 장문은 현현자에 이어 원철도 이겼고?"
막불손이 경외에 찬 눈빛으로 원경을 바라봤다.
"아니, 지금까지 뭘 들은 거요."
옥무영은 엉뚱한 데 꽂힌 막불손이 답답했다.
"소림이 무림대회를 소집했는데 유독 섬서 문파가 많았고, 특히 화산은 어디로 이사하려는 게 아닌지 의심할 정도로 많았다니까."
심지어 작정하고 온 무당보다도 세 배는 큰 규모였다. 옥무영은 당시에도 큰 의혹을 느꼈으나 단서가 전혀 없어서 막막한 심정이었는데, 마교가 화산을 치려 한다는 말에 안개가 걷히며 모든 일이 명료해졌다.
"옥 대협의 말은, 소림이 마교와 한통속이란 거요?"
질문하는 막불위의 가라앉은 얼굴에서 눈동자만 환하게 빛났다.
"소림은 한 선생이란 자의 요구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오."
"그건 소림의 일방적인 주장 아니오? 소림의 꿍꿍이가 절대 아니라고 옥 대협이 보장할 수 있소?"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지만."
그런 막불위를 막불손이 타박했다.
"소림에 덤터기를 씌우기도 힘들뿐더러, 씌운다고 해도 조정이 너한테 뼈다귀를 더 줄 것 같진 않구나."
그에 막불위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지. 북원이 장성을 넘으면 종남이 망하는 것도 순식간이니. 먼 소림보단 당장의 위기에 집중해야지."
"마교가 들어온다고 종남이 왜 망해?"
막불손이 막불위의 말에 바로 반박했다.
"어차피 싸우는 것밖에 모르는 머리라 내 말이 안 들어가겠지만, 선심 써서 해주마. 북원 기병이 들어오면 반드시 약탈할 텐데, 그 대상이 누굴까? 포목점, 미행, 객잔, 여전히 종남에 호의를 품은 각 지역 유지들 아닐까?"
생각이 미처 여기까지 미치지 못했던 건지, 막불손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너처럼 멍청하지 않은 사숙께선 어쩌면 여기까지 염두에 뒀겠지. 그럼에도 북원이 중원을 차지해 왕조가 바뀌면 다시 원나라 때의 성세로 돌아가 현재보다 훨씬 나아질 거란 기대가 있었을 거야."
막불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다음 멈췄던 말을 이어갔다.
"재물이야 그렇다고 쳐. 그 과정에 죽은 사람은 어쩔 거야? 가뜩이나 황실의 견제로 사람들이 점점 우릴 소원疏遠하려 하는데. 사람을 얻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넌 그렇게 똑똑해서 금, 요, 원에 이어 명의 개까지 되려는 거냐?"
막불손의 말에 구후영이 못 참고 입을 열었다.
"중양 진인께선 가산을 탕진해 의병을 일으켜 금나라에 맞섰다고 들었소. 명은 앞선 세 왕조와 달리 이족異族이 아닌데, 굳이 배척하는 이유가 있소?"
"어차피 그놈이 그놈이오. 금나라가 송나라를 몰아냈다고 백성의 삶이 크게 달라진 것 같소? 세율만 같으면 황제가 누군지 백성은 상관하지도 않소."
그에 구후영은 도덕경의 구절이 떠올랐다.
태상太上 부지유지不知有之, 기차其次 친이예지親而譽之, 기차其次 외지畏之, 기차其次 모지侮之.
백성이 있는지 없는지 관심 안 주고 찾을 생각조차 안 떠올리게 하는 왕이 최고다. 다음은 친근하게 여겨 떠받들려 하는 왕이고, 다음은 두려움을 주는 왕이고, 최악은 백성한테 업신여김을 받는 왕이다.
'효문제도 선비족이지만, 나라를 누구보다 잘 다스렸다.'
당나라의 성세는 효문제의 개혁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이 아니다.
'내가 나이보다 훨씬 대단한 경험을 잔뜩 했는데도 경지가 지지부진한 게 이처럼 생각이 갇힌 탓이 아닐까?'
"명나라도 이제 슬슬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소. 그런 명에 충성하면, 새 왕조가 들어섰을 때 또 지금과 같은 고난을 겪을 거요. 차라리 조정과 거리를 유지하며 세상의 풍파에 흔들리지 않는 게 낫다고 보오."
무당이야 연혁이 짧아 아직 그런 경험이 없지만, 소림은 막불손이 말했던 것처럼 왕조가 바뀔 때마다 큰 홍역을 치렀다.
멸망을 앞둔 왕조가 구멍 난 재정을 메꾸려고 절간을 수탈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고, 봉기군 역시 향화객들이 바친 향전으로 기름이 좔좔 흐르는 절간을 목표로 삼았다.
'강호에선 힘이 최고다.'
막불손의 말을 들으며 구후영은 오만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그러나 세상은 아니다.'
세상도 힘이 최고라면 굳이 강호가 따로 생기지 않았고, 강호인과 일반 백성의 구분이 없었을 것이다.
'세상을 움직이고 변화하는 힘은 다양하다. 그중 무력의 극치를 보인 곳이 강호고, 명분과 정치의 끝을 보인 곳이 황궁이겠지.'
무력이나 명분이 아닌 신앙이 최고인 곳도 있을 테고, 혈통을 우선하는 곳도 있을 테고, 궁벽한 오지의 마을에선 사냥을 잘해 사람들을 배 불리는 자가 최고의 권력을 누릴 것이다.
'그걸 알아야 한다. 세상을 움직이고 변화하여 흐름을 만드는 힘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래서 북원과 손잡기로 한 건가? 세상의 풍파에서 빗겨나려고?"
막불위의 비웃음에 막불손이 다시 화냈다.
"네놈이 조정에 머릴 숙이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이 없었다."
막불손의 질타에 막불위가 탄식했다.
"동창이 종남파가 보유한 재산을 하나씩 삼켜가는데, 모든 샘 줄기가 마를 때까지 그저 지켜만 보자고? 마냥 거리를 둔다고 세상의 풍파가 알아서 피해주는 건 아니잖아."
구후영은 새로 깨닫는 바가 많아서 둘의 대화가 계속 이어지길 바랐지만, 옥무영은 아니었다.
"전쟁할 때도 사자는 죽이지 않는 게 관례인데, 동맹을 맺으려고 온 자를 죽였으니 이젠 돌이킬 방법이 없소."
막불위는 물론이고 막불손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우리 목적은 이미 밝혔다시피 칠 년근 설련이오. 막 장문께서 우리한테 원하는 건 뭐요?"
"시원시원해서 좋군."
막불위가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원래는 원하는 게 하나였는데, 이젠 둘이오. 대신, 옥 대협께 큰 선물 하나 드리겠소."
"기대하겠소."
"기대하셔도 좋소."
옥무영과 대화를 마친 막불위가 구후영을 바라봤다.
"뭐, 우릴 도와 마교를 저지하자는 얘긴 이미 했으니 남은 부탁을 말하겠소. 구후 대협은 칠성진의 문제점을 파악한 듯한데, 그걸 가르쳐주셨으면 하오."
구후영은 소림에서 원철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기억이 떠올라 어떻게 대답할지 망설였다.
"마교가 백련교를 주축으로 똘똘 뭉쳤다고 하오. 반면, 화산은 소림의 무림첩을 받고 기종 제자 모두가 산을 비웠소. 종남도 전력을 다할 수 없는 상황이라, 칠성진의 위력을 강화해야 승산이 조금이나마 커질 거요."
구후영이 망설이는 이유를 오해한 막불위가 어떻게든 설득하려 애썼다.
"장문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아는 바를 솔직히 얘기하겠소."
덕분에 구후영은 걱정이 어느 정도 가셨다.
"세이경청하겠소."
"대부분 진법은 상대를 안에 가둬 운신의 폭을 좁혀 선택을 줄이는 방식이오."
막불손과 막불위는 물론이고, 의욕 잃은 얼굴로 침묵을 고수하던 노도인도 눈을 빛내며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칠성진은 상대를 밖에 두고 있소.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아무도 구후영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가 밖에 있는 게 낫기 때문이오."
"아까 구후 대협이 밟은 방위가 칠성진의 약점인 듯한데, 왜 굳이 상대를 밖에 둬서 약점을 노출한다고 생각하시오?"
막불손이 못 참고 질문했다.
"반대요. 내가 밟은 방위는 칠성진의 약점이 아닌 가장 강한 곳이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막불손이 질문을 멈추고 고민에 잠겼다.
"칠성진은 일곱 명이 이루는 진법이 아니오. 상대까지 고려해 여덟 명이 이루는 진법이오. 칠성진이 제대로 된 위력을 발현하려면 상대를 북극성으로 해야 하오."
"상대가 한 자리에 서 있지 않을 텐데, 그게 되겠소?"
이번엔 막불위가 질문했다.
"그래서 형에 얽매이면 안 되오."
"형形?"
"그렇소. 북극성 주위를 도는 별이 북두칠성뿐인 건 아니잖소."
이들은 종남의 고수로 칠성진에 관한 연구를 한시도 게을리한 적 없다. 구후영의 설명이 아주 자세하진 않았으나, 이들에겐 더없이 친절하게 들렸다.
"그렇군. 그랬군."
노도인이 무릎을 탁 쳤다.
"북두칠성은 공격의 순간에만 이루면 되는 거였어. 처음부터 북두칠성을 이뤄 북극성의 위치를 상대한테 알려주는 건 멍청한 짓이었어."
백팔나한진을 상대할 때 구후영은 뛰어난 경공으로 상대의 공격을 피해 갔다. 열여덟이 펼치던 걸 백팔 명이 펼치는 거로 바뀌면서 흐름이 너무 뻔해진 탓이었다.
칠성진은 북두칠성의 모습을 이뤘을 때 북극성 위치에 최강의 공격을 퍼부을 수 있다. 그렇기에 검진을 이룬 일곱 무인이 해야 할 일은 상대가 눈치 못 채게 북두칠성을 이루고, 상대가 인지하기 전에 강력한 공격을 쏟아내는 것이다.
"상대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 따라 북두칠성을 빠르고 확실하게 이루는 방법이 반드시 있을 거요."
구후영의 말에 막불손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일곱 무인 중에 상대와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자가 한둘 있을 거고, 북두칠성을 어떻게 구성하는지는 이들에게 달렸다고 생각하오."
원철 때와 달리 상대가 점점 큰 호감을 보이자 구후영도 자신이 아는 바를 편하게 늘어놓았다.
'소림이 오만하지만 않았어도.'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원경은 느끼는 바가 컸다.
'역근경과 세수경을 버리며 소림은 강자가 됐다. 그 탓에 겸손을 잊었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곳을 바라봤다면 겸허한 마음으로 동생 얘기에 귀 기울였을 거고.'
구후영은 일지선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책까지 제시했다. 그게 천부적인 재능 덕분이든 우연히 상황이 맞아떨어져서든, 구후영과 진지하게 대화하는 게 소림이 갖춰야 할 자세였다.
'종남도 상황이 어렵고 더 높은 곳을 향하려는 염원이 강하지 않았다면 문파의 체면이나 명성 때문에 고작 스물인 동생한테 가르침을 청하지 않았겠지.'
어차피 자신과 상관없는 얘기라는 생각에 원경은 칠성진에 관한 구후영의 고명한 견해들을 귓등으로 흘리며 자기 생각에 빠졌다.
'난 소림의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는다.'
같은 무공을 익혔기에 경지로 압도할 수 있다. 실제 무력도 원철과 원병 빼고는 딱히 눈에 차는 자가 없었고.
'그러나 초 선생이란 자한텐 졌지. 동생한테도 이길지 의문이고.'
길게 이어지던 생각을 마친 원경이 결심했다.
'어머니가 건강을 회복하면 토번으로 가야겠다. 대수인을 익혀 연화인을 얻은 다음, 소림 무공의 끝이 무언지 반드시 확인하고 말겠다.'
- 작가의말
선비족 중 우문, 모용, 탁발의 세 성씨가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모용은 연, 탁발은 북위, 우문은 북위의 황위를 빼앗아 북주의 왕조를 세웠습니다.
효문제는 탁발씨로, 구품제를 비롯해 훗날 당나라가 성세를 이룰 수 있는 수많은 행정적 기초를 닦았습니다.
이외에도 울지, 독고도 선비족의 성입니다.
현재 선비족은 탁발은 원으로, 독고를 유로, 구목릉은 목으로, 보육고는 육으로, 하뢰는 하로, 하루는 루로, 물뉴는 우로, 흘해는 혜로, 울지는 울로 성을 바꿔 한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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