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회생起死回生
어느 날, 괵국의 태자가 급사했다. 마침 괵국에 도착한 편작이 어의한테 태자의 죽음에 관해 듣고 자신이 살려보겠다고 나섰는데, 왕을 빼고 아무도 믿지 않았다.
다행히 왕이 치료를 허락해 편작이 손을 썼는데, 침을 몇 개 꽂으니 죽었던 태자가 눈을 번쩍 떴고, 이십여 일 약을 썼더니 건강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에 사람들이 편작한테 기사회생(죽은 자를 일으킴)의 대단한 의술을 펼쳤다고 칭송하자, 편작은 '죽은 자를 살린 게 아니라 안 죽어서 치료한 것뿐이다'라고 대꾸했다.
"당장 움직이는 게 좋겠소."
구후영의 말에 전중광이 고개를 저었다.
"풍애협은 독초와 독충 천지요. 나야 피독단避毒丹이 있지만, 구후 장문은 어찌할 생각이오?"
"손과 얼굴을 천으로 감싸면 괜찮지 않겠소?"
구후영의 말에 전중광이 또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쉬웠다면 검종이 십수 년의 공을 들이지 않았을 거요."
구후영이 잠깐 고민하고 입을 열었다.
"내가 장문검을 빌려드릴 테니 전 대협이 비급을 찾아오시오."
구후영의 말이 크게 의외였는지 전중광의 표정이 다채롭게 변화했다.
"장문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나라고 뭘 더 숨기겠소. 사실 내상이 도져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상태요."
잠깐 망설이던 전중광이 모든 걸 내려놓은 얼굴로 말을 마쳤다.
"게다가 난 지금 검이 없소. 차라리 피독단을 드릴 테니 구후 장문이 다녀오시오."
내상을 입은 전중광과 내공이 없는 구후영 중 누가 더 강하다고 콕 집어 말하는 건 어렵다. 그러나 구후영에겐 천공교검이 있고 전중광은 추락할 때 검을 분실했다.
당연히 구후영이 피독단을 받는 게 장문검을 건네는 것보다 확실하다.
"이리 믿어주시니, 그 믿음에 꼭 보답하겠소."
잠깐 고민한 구후영은 전중광의 피독단을 받기로 했다.
"장문이 먼저 믿음을 준 덕분이오."
전중광은 동굴 입구의 위치 및 안에서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를 구후영에게 자세히 알려줬다. 그러곤 품에서 작은 달걀 크기의 까만 구슬을 꺼내 구후영에게 건넸다.
피독단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 확인한 구후영은 지체하지 않고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
'젠장.'
귀밑 즈음에 따끔한 느낌이 들자 구후영은 다급히 품에서 장문검을 꺼내 바닥에 버린 후 풀숲으로 도주했다.
'함정이었어.'
풀숲에 들어간 구후영은 두전의 가르침대로 뒷걸음질로 걷다가 풀이 무성한 곳이 보이자 바로 몸을 숨기고 숨소리를 죽였다.
그로부터 약 반 각이 지나고.
저벅저벅.
묵직한 발소리가 구후영의 귀에 울렸다.
"당신을 해칠 마음은 없소."
허리를 굽혀 장문검을 주운 전중광이 허공에 대고 외쳤다.
"난 그저 당신을 믿기 어려웠던 것뿐이오. 화산 검종의 이름을 걸고 맹세컨대, 비급을 얻고 반드시 돌아와서 당신을 구하겠소. 치명적인 독물은 피독단 때문에 접근하지 못하니까 목숨 걱정은 안 하셔도 되오."
화산에서 구한 피독단은 모든 독충을 막지 못했다. 치명적인 독을 품은 두꺼비나 거미나 뱀 등에겐 효과가 탁월했지만, 구후영을 문 파리를 닮은 독충에겐 쓸모가 없었다.
전중광은 내상을 핑계 삼아 구후영을 먼저 내려보냈고, 피독단의 결함에 관해서도 함구했다.
구후영은 비록 전중광의 속셈을 몰랐지만, 끝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은 덕분에 물리자마자 장문검을 버리고 숨는 거로 일단 목숨을 부지했다.
"내 말은 모두 진심이오. 그러니까 괜히 움직이지 말고 근처에서 기다리시오."
말을 마친 전중광이 빠른 걸음으로 떠났다.
'어디부터 어긋난 거지?'
추락하는 전중광을 구한 건 고민의 결과가 아니고 엉겁결에 손을 내민 거였다. 그런데 정작 사람을 구하고 나니 상황이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비록 구후영이 웬만한 외공 고수보다 힘이 세고 체력이 출중하지만, 풍애협의 절벽도 만만치 않았다. 가파른 건 둘째 치고, 절벽이 푸석푸석하여 수시로 추락할 위험이 있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당연히 내공인데, 내공으로 몸을 가볍게 하면 암벽이 부실해도 매달릴 수 있고, 설사 추락하더라도 목숨까지 위험하진 않다.
그런데 전중광이 있어 구후영은 내공을 수련하기 어려웠다. 어제 서로 검을 겨눈 사실은 제치더라도, 누군가가 지켜보는데 집중이 될 리 없다.
구후영은 짧은 고민 끝에 전중광에게 함께 비급을 취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구후영은 비급에 대한 욕심은 이미 버렸고, 단지 전중광을 떠보기 위함이었다.
전중광이 풍애협에 독충이 득실거리는 사실을 숨기려 들면 가차 없이 처단할 속셈이었다.
의외로 전중광이 독충에 관해 솔직하게 얘기하자 구후영은 아예 장문검을 빌려주려 했다.
장문검 때문에 화산이 계속 귀찮게 하는 걸 막고, 전중광을 떠나보내 쾌적한 수련 환경을 조성하고, 괜히 전중광을 죽여 마음에 앙금이 남는 일도 없고.
구후영이 떠올릴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구후영은 정말 중요한 부분을 간과했다.
강호뿐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세상엔 구후영 같은 인간이 드물다.
너무나도 후한 조건에 전중광은 의심을 버릴 수 없었고, 내상을 핑계로 오히려 구후영을 함정에 빠뜨렸다.
그나마 시간이 긴박해선지 내상 때문인지, 아니면 진짜로 구후영을 해칠 마음이 없는지, 장문검을 얻은 전중광이 곱게 떠났다. 이미 몸 절반이 감각을 잃은 구후영에겐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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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낙화문 장문입니다."
쓰러져 꼼짝도 못 하는 구후영의 귀에 황상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중광의 짓이겠지?"
"그럼요. 맨날 고고한 척하더니, 전 사형도 별수 없네요."
황상엽이 부스럭 소리를 내며 구후영에게 접근했다.
청각만 멀쩡하고 촉각과 시각을 잃은 탓에 구후영은 황상엽이 뭘 하는지 알지 못했는데.
"하. 이것 때문에 배산을 도운 거군요."
황상엽의 말을 듣고 상대가 자기 품을 들춰 배산의 서신을 꺼냈음을 알았다.
'전중광을 단칼에 죽였다면 나만 괴롭고 말 것을.'
종이를 쭉쭉 찢는 소리에 구후영의 마음도 갈기갈기 찢겼다.
"사형. 보검으로 보이는데, 제가 써도 괜찮을까요?"
"버려라. 화산이 낙화문 장문을 죽였다고 알리지 못해 안달 났어? 우린 검종을 없애려는 게 아니고 목줄만 단단히 조이려는 거다."
천공교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황상엽은 말을 잘 듣는 자였다.
"사형. 여기 피독단도 찾았습니다."
"그래. 이만 떠나자. 피독단이 없으면 온갖 독물이 와서 흔적도 없이 먹어 치울 테니 손에 피도 안 묻히고 잘된 일이구나."
곧, 가볍고 무거운 발걸음 소리 두 개가 멀어졌다.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미련이 남는구나.'
온갖 후회로 구후영이 자책하던 중, 발목에서 시원한 느낌이 쭉 올라왔다. 그 느낌은 아주 신속해 눈 한 번 깜짝할 사이에 정수리에 도착했다.
동시에 반쯤 감겼던 구후영의 눈이 번쩍 뜨였다.
'뱀?'
구후영의 발목을 문 건 엄지손가락 굵기에 길이는 한 척 정도밖에 안 되는 몽실몽실한 뱀이었다. 머리와 꼬리 양쪽이 비슷하게 굵어서 수미의 구분이 어려웠는데, 몸의 화려한 무늬로 보아 독사가 분명했다.
'피를 빨고 있어.'
시원한 느낌이 피 빨려서 생긴 것임을 알아챈 구후영은 급히 머리맡의 천공교검을 잡아 휘둘렀다.
그런데 흡혈뱀이 몸을 잘리고도 피 빠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에 구후영은 상체를 일으켜 손으로 뱀을 잡아 뜯었다.
발목 근처의 살점이 한 움큼 작게 뜯겨 나갔다.
'좋아.'
살 뜯기는 아픔이 달가운 건 아니었으나, 덕분에 제대로 정신 차렸다.
'이판사판이다.'
구후영은 내공 수련은 물론, 초식 수련도 누군가가 지켜보면 제대로 못 하는 예민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몸에 독이 흐르는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몸에 지닌 약초로 대충 지혈한 구후영은 근처의 나무에 기대앉아 내공 수련을 시작했다. 그런데 마음만 먹으면 운기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전과 달리, 자질이 부족한 내공 입문자처럼 첫 관문인 심기에서 걸렸다.
'이유를 알아야 해결을 할 텐데.'
머리를 짜서 온갖 생각을 떠올렸지만, 내공에 갓 입문할 때도 쉽게 통과했던 심기에 실패한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때.
손목 부근에 따끔한 느낌이 왔다. 이어서 뜨거운 기름과 같은 기운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컥!"
뜨거운 기운이 어깨를 넘자 구후영은 피를 한 움큼 크게 토했다. 더불어 온몸에 만 마리 개미가 동시에 물어뜯는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버텨!'
그 통증이 어찌나 괴로운지, 구후영은 천공교검을 심장에 꽂고 싶은 충동이 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죽는 건 절대 아니라는 생각에 억지로 버티며 정신을 모았다.
덕분에.
'현현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현현자의 내공을 운기로 소모한 적 있으니, 독도 운기로 소모해 없애면 그만이다.'
구후영은 독공을 익힌 장방선생을 치료한 경험 덕분에 독을 빼는 방식을 누구보다 잘 안다. 문제는 등에 있는 명문혈에 직접 침을 꽂을 방법이 없고, 내공이 없어서 독들을 특정 혈도로 모을 수 없다.
현재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독이 온몸에 퍼질 위험을 무릅쓰고 운기로 독 기운을 소모하는 것뿐이다.
'하자.'
결정을 내린 구후영은 바로 운기를 시작했다.
'된다.'
구후영의 운기 재능은 처음부터 뛰어났는데, 공청성유의 도움으로 그저 뛰어난 정도를 훨씬 넘어섰다.
수련할 때 간단한 의념만으로 내공이 십이경맥을 따라 흐르게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고, 무려 자신보다 수십 배는 강한 현현자의 내공을 자기 뜻대로 움직인 걸 보면 의심할 여지조차 없다.
게다가 현재는 삶과 죽음이 갈리는 긴박한 상황이라 집중력이 더없이 높은 덕분에 몸에 침투한 독 모두 구후영의 뜻대로 움직여줬다.
기사회생.
독충에 물려 몸의 감각이 사라진 구후영으로선 난관을 타개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황상엽이 천공교검을 휘둘렀으면 바로 죽는 거고, 그저 놔둬도 아무것도 못 하고 죽을 운명이었다.
황상엽과 기종의 제자가 흔적을 통해 구후영을 찾아내고, 빨리 죽으라고 굳이 피독단을 가져간 게 오히려 구후영을 돕고 구후영의 목숨을 살리는 길이 되었다.
피독단이 사라지자 말린 고기의 냄새에 끌린 강한 독물들이 구후영에게 다가왔고, 구후영의 몸에 더 강한 독이 주입되면서 기존 독이 힘을 잃은 덕분에 감각을 되찾았다.
비록 지금도 몸에 세 가지나 되는 성질이 제멋대로인 독이 날뛰고 있어 낙관할 상황은 아니지만, 꼼짝없이 죽을 일만 남았던 아까보단 뭐라도 할 수 있는 지금이 최소 백 배는 나은 상황이다.
게다가 구후영의 호재는 독충에 물려 행동의 자유를 회복한 것뿐이 아니었다.
'된다.'
아까와 같은 말이지만, 의미는 달랐다.
뱀의 독, 새로 물린 뭔지 모를 독충의 독, 처음에 몸의 감각을 앗아갔던 독. 셋이 구후영의 의지에 따리 운기되면서 단전이 점점 또렷하게 보이고 외부의 기운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따라서 외부의 기운들이 구후영의 숨을 통해 단전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내공이 모인다.'
그런데.
발목이 따끔하더니 새로운 독이 구후영의 몸에 침투했다. 이어서 손과 목과 얼굴이 연신 따끔거렸다.
기사회생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 작가의말
주인공의 위기가 클수록 기뻐하는 변태 독자들, 이게 과연 독자의 잘못일까 아니면 수십 년째 뻔한 클리셰를 반복하는 글쟁이들의 책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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