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목일근萬木一根
숲의 시작은 나무다.
우연히 발아하여 뿌리를 내린 한 그루 나무가 잎사귀를 뽑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씨앗을 퍼뜨린다. 나무가 퍼뜨린 씨앗이 발아하여 묘목이 되고, 묘목이 나무가 되고, 나무는 씨앗을 만들고, 씨앗이 발아하여 묘목이 된다.
그렇게 반복하면 한 그루의 나무가 결국 숲을 이루고 만다.
그렇다면.
무림武林이라는 숲의 첫 그루 나무는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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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거지?'
깊은 잠에서 깬 구후영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회상했다.
"아!"
머리를 털다 주변에 널린 화산 무인들의 주검을 본 구후영은 자신이 기절하기 전의 상황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칠성의 핵을 찾은 구후영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임했으나, 아쉽게도 또 실패했다. 너무나 큰 충격에 구후영은 정신을 거의 놓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감각이 돌아와서 주변을 살피니 진법은 끝나고 주변에 주검들만 가득했다. 혹시 진법이 다시 발동할까 봐 최대한 버티려 했으나, 세상일이 의지로만 되는 게 아니었다.
구후영은 그만 까무러쳤고, 이제야 깼다.
'이럴 때가 아니다.'
구후영은 바른 자세로 앉아 두 눈을 감고 명상에 들었다. 기절하기 전엔 전혀 기억나지 않던, 무아지경에 빠져서 한 자신의 움직임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선 더 좋은 선택이 있었는데.'
'어떻게 저런 대응을 했지?'
기억을 더듬으며 구후영은 아쉬움과 감탄을 연발했다. 어리석은 선택이 애석한 일도 많지만, '내가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지' 싶은 대응도 엄청 많았다.
'한 번 더.'
잃어버렸던 기억을 다 훑은 구후영은, 제일 처음 진법이 발동했을 때부터 시작해 떠오르는 모든 걸 되새김질하며 고칠 부분과 새길 부분들을 일일이 점검했다.
'한 번 더.'
사람의 욕심은 바다보다 크고 깊어 끝을 모른다. 복기하면서 쏠쏠한 재미를 본 구후영은 자신의 기억을 또 훑으려 했다.
그런데 배에서 천둥처럼 울린 꼬르륵 소리가 구후영의 집중을 방해했다. 내공 덕분에 딱히 무기력한 느낌은 없지만, 구후영의 몸은 정직했다.
'얼마나 굶은 거지?'
취화봉의 동굴에 있을 때 대부분 음식을 두전과 풍불지에게 양보해도 배고픔을 잘 못 느꼈던 구후영이다. 그땐 검술을 수련하느라 매일 활발히 움직였던 걸 생각하면, 구후영은 기절한 채로 최소 보름은 있은 것 같다.
'물도 마셔야 하고.'
도무지 참을 수 없는 허기에 구후영은 화산 무인들의 몸을 들춰 건량을 찾으려 했다. 그런데 시체 썩은 냄새가 고약해 곧장 포기하고, 주검들을 뼈 무덤이 있는 곳으로 옮겨 쌓았다.
'내가 그리도 넣지 말라고 했거늘.'
귀신에 눌린 듯 하나같이 창백한 얼굴을 한 화산 무인들을 보니 욕심 때문에 자신도 자칫 저리되었다는 생각으로 기분이 섬뜩했다.
"비록 좋은 인연으로 만난 게 아니고 서로 검을 겨누기도 했지만, 강호에 몸담은 자로서 이해합니다. 여러분의 극락왕생을 빕니다."
이미 죽은 자를 계속 미워하는 건 오히려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다. 게다가 화산 검종이 낙화문과 아예 남남이라고 할 수도 없어 구후영은 생전의 원한을 잊고 이들의 명복을 빌어줬고, 내친김에 극락왕생주도 읊어줬다.
'저들이 안 죽었다면 내가 직접 검으로 벴을까?'
구후영은 왠지 자신이 그랬을 것 같았다. 저들이 비급을 독차지하려고 구후영을 죽이려 했던 게 강호의 일반적인 행태임을 떠올리면, 구후영 역시 비슷한 생각을 떠올리고 실제로 행동으로 옮겼을 것 같았다.
'잠깐.'
있지도 않은 일을 고민하던 구후영은 정작 중요한 일이 따로 있음을 깨달았다.
'문을 여는 데 열쇠가 필요하다는 정보와 장문검이 백옥봉에 나타난 사실이 화산에 전해졌다면?'
염두에 전혀 없었던 화산이었는데 갑자기 골칫거리로 급부상했다.
철혈방의 내부 다툼에 엮이고 용호표국과 마찰을 빚고 마교의 일에도 휩쓸렸는데, 이젠 화산까지 더해지자 큰 깨달음을 얻어 흡족했던 마음이 다시 무거워졌다.
철혈방의 일은 엮이고 싶지 않고, 용호표국의 일은 힘이 아닌 정치와 명분으로 싸워야 하는 거여서 귀찮기 그지없고, 마교의 일은 왜 나섰는지 후회만 가득할 정도로 떠올리기조차 싫었다.
'홍엽산장과 낙화문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다 해결해야 할 문제다. 결국엔 더 강해져야 한다.'
구후영은 밖으로 나가 배를 채운 후 다시 들어와 진법을 발동할 궁리를 떠올렸다. 지금도 꽤 강해진 것 같긴 한데, 당면한 적들을 떠올리니 한참이나 부족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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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갈 방법을 찾아 공동을 샅샅이 수색하던 구후영은 벽에서 특이한 흔적을 발견했다. 잠깐 고민한 구후영은 옷을 벗어 강하게 휘둘렀다.
군데군데 구멍이 나긴 했으나 꽤 큰 바람이 일었다. 바람은 벽의 먼지를 날려 흔적을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
아미 장문 공손기公孫基, 귀검동鬼劍洞에서 인靭과 담澹을 얻다.
글귀 바로 밑에 확연히 다른 필체로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천환봉법千幻棒法.
천하무공출아미天下武功出峨嵋라는 말이 있는데, 천하의 모든 무공이 아미에서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 말이 생기게 한 무공이 바로 천환봉법이다.
봉법과 곤법과 창법은 물론이고, 도법과 검법도 대부분 천환봉법을 모방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천환봉법이 이 동굴에서 얻은 거라고?'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한 구후영은 눈길을 왼쪽으로 돌렸다.
곤륜 제자 하운룡何雲龍, 귀검동에서 일逸과 은隱을 얻다.
밑엔 천환봉법을 적은 것과 같은 필체로 운룡대구식 다섯 글자가 적혀 있었다.
'곤륜의 운룡대구식도 여기서 얻었다고?'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린 구후영은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돌렸다.
독비객獨譬客, 귀검동에서 유幽와 현賢을 얻다.
이번에 달린 주해는 조금 길었고, 확신이 없어 보였다.
혹시 우장산의 난화검법일까.
'설마, 내가 익힌 난화검법?'
풀리지 않는 의문을 뒤로하고 구후영은 고개를 조금 더 돌려 다음 글귀로 눈길을 옮겼다.
"아!"
글귀를 확인한 순간, 구후영은 탄성을 질렀다.
낙화문 장문 담대천웅澹臺天雄, 귀검동에서 오傲와 결潔을 얻다.
담대는 공자의 제자인 자우子羽의 성이다. 담대라는 성을 처음 쓴 게 자우이니, 담대천웅은 자우의 후손으로 보였다.
낙화검법.
주해도 명확히 담대천웅이 얻은 게 낙화검법이라고 적었다.
'그렇다는 건, 이 동굴이 낙화문의 것이 아니란 말이구나.'
마음을 진정한 구후영은 다음 글귀를 확인했다.
칠살연맹七殺聯盟 맹주 홍석, 귀검동에서 격擊과 척刺을 얻다.
칠살문 십보살十步殺.
'칠살문의 무공도 여기서 시작했구나.'
야인 탁발효선拓跋爻選, 귀검동에서 정正과 반反을 얻다.
밀교 대수인.
'대수인이 나타난 게 팔백 년 전. 천환봉법이 나타난 건 천 팔백 년 전.'
약 천 년의 기간에 여길 들어와서 무공을 얻은 자가 고작 여섯 명이란 뜻이다.
'내가 참 운이 좋았구나.'
자신이 귀검동의 진법을 버텨낸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깨달은 덕분에 구후영은 진법을 다시 발동하고픈 마음이 깨끗이 사라졌다.
모산茅山 통천通天, 귀검동에서 법法과 술術을 얻다.
주해와 같은 글씨체였고, 다른 글귀들보다 훨씬 긴 주해가 달렸다.
내가 들어왔을 때 귀검동엔 주검이 수백 구가 넘었고, 귀검鬼劍도 칠십 개나 있었다. 귀검동에 들어오는 길에 죽은 사람까지 합치면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자가 몰라도 기만幾萬(몇만)은 되리라.
그런데 천 년이 넘은 세월 귀검동에서 살아서 나간 자는 나까지 고작 일곱밖에 안 된다. 이에 나 통천은 귀검동을 진법과 기관으로 봉인하고, 입구도 감추려 한다.
혹시 후대에 누군가가 우연히 여기에 발을 들인다면, 이 글귀를 보고 절대 진법을 발동하지 말기를 재삼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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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후영은 공동의 한구석에서 밖으로 나가는 방법이 적힌 글귀를 확인했고, 그대로 하여 석문을 열었다.
"흙을 파서 묻기보단 여기가 더 나은 무덤인 것 같군요. 그럼 소생은 이만."
화산 제자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 구후영은 바로 공동을 떠나려 했으나, 벽에 새겨진 글귀들이 갑자기 떠오르면서 손이 근질근질했다.
'그런데 내가 얻은 게 뭐지?'
정작 글귀를 새기려던 구후영은 자신이 얻은 게 뭔지 전혀 알지 못함을 깨달았다.
'처음엔 무작정 피하다가 견제로 바꿨고. 정신을 놓은 다음엔 별의별 짓을 다 했어.'
앞의 사람들은 뭔가를 견지해 진법을 벗어난 것 같은데, 구후영은 아니었다. 원래는 공격을 억제하는 거로 풀려 했으나, 너무 큰 압박에 정신을 놓은 바람에 그 뒤로는 엉망진창의 대응을 보였다.
'내 대응이 무질서하더라도 분명히 뭔가 규칙이 있다. 그러니 진법이 멈춘 게 아니겠는가.'
깊이 고민하던 구후영의 머리에 새로운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벽에 적힌 글귀들이 진실이라면, 귀검동이 바로 천하 무공의 뿌리가 아닌가? 저들은 귀검동에서 무공의 뿌리를 한 가닥씩 잡은 거고.'
구후영은 낙화검법과 난화검법을 익혔고, 어설프나 운룡대구식도 구현했다. 귀검동에 들어오기도 전에 얕게나마 뿌리 세 개에 닿은 셈이다.
'사내는 거칠 게 없어야지.'
풍불지의 말이 떠오른 구후영은 더는 우물쭈물하지 않고 벽에 다가가 통천의 왼쪽에 내리 글을 새겼다.
낙화문 장문 구후영, 귀검동에서 소태극小太極을 얻다.
뿌듯한 마음으로 자신이 새긴 글귀를 몇 번 읽은 구후영은 주해를 달아 진법을 절대 발동하지 말 것을 경고하려 했다.
'잠깐. 화산 검종이 미리 이 글을 봤다면 진법을 발동 안 했을까?'
왠지 아닐 것 같았다.
'나라면?'
이곳이 위험한 장소임을 감지하고 바로 떠나려 했던 구후영이지만, 어마어마한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알면 또 어떻게 선택할지는 자신 없었다.
'나 다음으로 누가 들어와서 저걸 강호에 뿌리면?'
주해 달기를 포기한 구후영은 귀검을 모조리 수거했다. 구후영의 것까지 합치면 칠십이 개여서 통천 뒤로 귀검동에 들어온 사람이 없었음을 확인했다.
물론, 아무도 온 적 없다고 아예 확신하긴 어렵다. 화산 검종이 안다는 건 귀검동에 관한 소문 혹은 정보가 암암리에 전해졌다는 뜻이다.
그간 귀검동의 존재를 아는 누군가가 몰래 들어와서 무공을 얻은 뒤 글귀를 안 남기고 그대로 떠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야.'
구후영은 자신이 떠올린 가정을 바로 부정했다. 앞선 사람들도 그렇고 구후영도 그렇고, 굳이 벽에 글귀를 새긴 건 다 이유가 있다.
'글귀를 새긴 뒤 내 마음이 단단해졌다. 확실한 글로 남김으로써 확신이 서고, 깨달음에 더 절실하게 다가갈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귀검동에서 무공을 얻고도 그대로 떠났다면 분명히 대단한 인물일 것이다.
'그만 떠나자.'
구후영은 칠십이 개의 귀검을 짐으로 잘 싸서 메고 공동을 나가 문밖에 가만히 서 있었다.
약 일각의 시간이 흐르고 석문이 저절로 스르륵 내려왔다. 석문이 다 내려오자 꼭대기의 열쇠 구멍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후영은 아무 돌이나 주워 천공교검으로 깎았다. 예전이라면 엄두도 못 낼 텐데, 절정의 경지에 이른 지금은 하나도 안 어려웠다.
'언젠가 능력이 되면 그때 와서 귀검동을 없애리라.'
구후영은 깎은 돌로 열쇠 구멍을 막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
- 작가의말
만목일근 - 만 그루 나무가 한 뿌리에서 나왔다.
설정에만 있는 건데, 풍애협에 독초를 잔뜩 심고 독물을 뿌린 게 바로 통천입니다. 통천이 왜 귀검을 안 없애고 귀검동 바닥에 줄 세워 놓았는지는 뒷부분에 단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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