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궁풍운皇宮風雲
영창營倉은 원래 약탈에 대비하여 인근 백성의 식량과 귀중품 등을 대신 보관하는 군대의 창고였는데, 오히려 재물을 수탈하는 용도로 쓰이는 일이 잦아지자 황실에서 영창 제도를 폐기했다.
그러나 군대라는 조직이 원체 경직되고 변화를 싫어하기에, 일정 규모 이상의 군대가 주둔하는 곳엔 꼭 영창을 지었다.
그 탓에 영창은 창고보단 잘못을 저지른 병사를 가두는 곳으로 더 많이 사용되었고, 영창의 의미도 변질하여 감옥이란 뜻으로 통했다.
황제가 기거하는 자금성에도 이러한 영창이 있는데, 잘못을 저지른 궁녀나 환관을 일정 기간 가둬 벌주는 곳이었다.
찰싹. 찰싹.
공현이 구후영에게 황후의 결정을 전달하던 시각, 영창에선 매서운 채찍질 소리가 연신 울렸다.
"진짜 독한 놈이다."
궁녀나 환관을 가두는 용도기에 창살 따윈 없었다. 평소엔 지키는 사람도 없고, 누군가를 가뒀을 때만 금의위나 형부에서 두 명을 차출해 지키게 했다.
그마저도 낮에만 지키는 시늉을 하고 밤엔 그냥 놔두는 이름만 감옥인 허술한 곳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바닥에 박아 고정한 손가락 세 개 굵기의 쇠사슬이 달린 족쇄를 양 발목에 채우고, 손목은 얇으나 꽤 튼튼해 보이는 쇠사슬로 묶어 대들보에 매달았다.
영창을 지키는 사람도 열여섯 명이나 되는데, 삼 교대인 걸 생각하면 달랑 한 명을 가두려고 무려 마흔여덟 명이나 동원한 셈이다.
"나 같으면 첫날부터 못 버텼다."
찰싹. 찰싹.
"버틴 걸 넘어서 지금까지 신음 한 번 안 질렀잖아."
"저 정도 맞으면 벙어리여도 말을 뗐겠다."
감옥을 지키는 수위들의 '찬사'를 받는 사내는 그간 온갖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됐고, 얼굴도 피와 고름으로 범벅이 되어 용모를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런 사내에게 차가운 눈으로 채찍질하는 자는 열두 살 정도로 보이는 얼굴이 곱상하고 몸매도 유약한 환관이었데, 무공을 익혔는지 채찍질할 때마다 사내의 몸에 굵은 줄이 추가됐다.
"그년이 어딨는지 말만 하면 바로 놔준다니까. 네 경공이 더 빠르면 나보다 먼저 가서 도주하라고 얘기해줄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고집 그만 부리고 말해."
앳된 얼굴의 환관이 채찍질을 멈추고 회유를 시도했다.
"내가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하면."
사내가 입을 열자 환관이 반색했다.
"대답하면?"
"나도 네 질문에 대답할게."
"그래. 네 질문이 뭔데? 말해 봐."
사내는 퉤 하고 입안의 핏물을 뱉은 다음, 고개를 살짝 쳐들어 환관과 눈을 맞췄다.
"넌 자신이 사내라고 생각해 계집이라고 생각해?"
찰싹.
화를 못 이긴 환관이 채찍을 세게 휘둘렀는데, 홧김에 제대로 조준하지 못해 사내의 목을 때렸다.
"제길. 또 못 참았네."
목을 맞은 사내는 눈동자가 완전히 풀려버려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일 다시 와야지."
흥미가 확 식은 환관은 채찍을 바닥에 던지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용 태감, 벌써 들어가십니까."
영창 대문을 지키던 사내가 환관에게 굽신거리며 인사했다.
"수고가 많네."
용 태감으로 불린 환관이 소매에서 은자를 꺼내 사내한테 건넸다.
"뭘 이런 걸 다. 감사히 쓰겠습니다."
"내일도 밤에 올 테니까, 좀 더 단단한 채찍으로 준비해 주시오."
"용 태감은 다 좋은데 성품이 너무 선한 게 탈입니다. 말씀만 하시면 제가 눈알 하나 뽑아드리죠. 웬만큼 담이 큰 놈도 놀라서 똥오줌 못 가리며 안 물어본 것까지 다 뱉습니다."
어린 환관이 고개를 저었다.
"놈이 다 불어버리면 난 또 어디 가서 이런 재미를 찾는단 말이오. 이번 놈은 특히 질겨 괴롭히는 맛이 좋으니까, 행여나 망가뜨리지 마시오."
'독사가 실수로 사람의 태에 들었다더니, 명불허전이구나.'
사내도 죄인을 신문할 때 일말의 자비도 없지만, 일부러 즐기진 않았다.
"역시 용 태감입니다. 오늘 한 수 크게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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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건청궁에서 구후영과 신한천이 황제의 첫 치료에 돌입했다.
"치료를 시작합니다."
구후영의 말에 서기書記들이 기록을 시작했다.
"이 치료의 핵심은 경맥을 차단하고 이어서 오장육부의 기운이 서로 소통하며, 그 과정에 균형과 조화를 찾는 것입니다. 그럼, 심장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구후영은 혈도 이름과 침을 꽂는 방위 및 깊이를 일일이 서술하며 침을 놓았다.
구후영의 솜씨가 능숙해서 꽤 빠르게 침을 놨지만, 세필을 든 서기들은 한 마디도 빠짐없이 낱낱이 기록했다.
"이제 이 두 개의 침을 통해 나와 폐하의 기운이 연결됩니다."
구후영이 손으로 두 개의 투기침을 잡으며 말했다.
"폐하의 기운이 왼손의 침을 통해 내게 오고, 오른손을 통해 다시 돌아갑니다. 이는 무당의 양의심법에 기초한 치료법입니다."
말을 마친 구후영이 투기침을 황제의 혈도에 꽂은 뒤,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하고 운기를 시작했다.
곧, 황제의 기운이 구후영의 왼손으로 움직였다.
구후영은 몸으로 들어온 기운을 자기 심장으로 유도했다. 심장을 들른 기운이 곧 비장으로 가고, 비장에서 폐, 폐에서 신장, 신장에서 간으로 간 다음, 오른손을 통해 황제의 몸으로 돌아갔다.
"칠십오 번의 순환 이후, 폐하의 몸에 흐름이 형성되었습니다."
구후영이 운기 중에 입을 열어 말하자 황실 시위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제부터 저는 빠지겠습니다."
황제의 몸에서 오행의 흐름이 생기자 구후영이 운기를 멈췄다. 그런데도 황제의 기운은 오장육부의 순환을 멈추지 않았다.
'어르신 말이 맞는구나.'
구후영은 원래 황제의 몸에서 운기하려 했다. 그러나 신한천이 극구 반대한 바람에 기운을 자기 몸에 들여 운기한 후 돌려주는 방식을 취했다.
비록 신한천의 고집을 못 이겨 따르긴 했으나 여전히 반신반의했던 구후영이었는데, 구후영의 몸에서 경로를 익힌 기운이 황제의 몸에 돌아가서 똑같이 움직여주며 신한천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치료가 벌써 끝난 거냐?"
거창했던 설명과 비교해 너무 간단한 치료 경과에 황후가 궁금을 못 참고 질문했다.
"아닙니다. 현재 폐하의 몸에서 순환이 일어 오장육부를 치료하는 동시에 쓸모없는 기운을 밖으로 배출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켜보다가 몸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흐름이 강해지면 개입해 멈출 겁니다."
걱정과 달리 약 이 각 뒤에 흐름이 절로 멈추며 치료가 끝났고, 효과는 구후영의 예상보다 훨씬 나았다.
황제는 내부 기운이 꽤 안정된 건 물론이고, 겉으로 봐도 안색이 나아진 게 눈에 띄었다.
'다행이다.'
큰소리를 쳤던 것과 달리, 구후영은 전혀 자신만만하지 않았다. 신한천의 도움으로 위험 요소를 최대한 제거해 사고에 대한 걱정은 꽤 덜었으나 반대로 치료 효과엔 의문이 커졌었는데, 첫 치료가 순조롭게 끝나자 시름이 푹 놓였다.
"구후 태의는 어린 나이에 어찌 이리 대단한 치료술을 익힌 거요?"
공현이 감탄한 얼굴로 구후영을 치켜세우며 원체 좋은 분위기를 한결 살렸다.
"이 치료술은 폐하처럼 몸에 약 기운이 많이 쌓인 분한테만 효과가 있소. 게다가 신 명의께서 많은 부분을 손봐주신 덕분에 위험이 줄고 효과가 배가 되었소."
"신예의 과감함과 노수老手(베테랑)의 노련함이 완벽히 결합했군. 참으로 감탄스럽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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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완전히 질 무렵, 치료 때 너무 집중한 바람에 지쳐서 잠들었던 신한천이 깨어났다. 그에 구후영이 호위들을 밖으로 물렸다.
"치료법을 상의해야 하니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시오."
"알겠습니다."
구후영은 현재 종오품의 태의다. 게다가 황제를 치료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기에 여덟 호위의 태도도 크게 개선되었다.
"오늘 치료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척으로 호위들이 멀어진 걸 확인한 구후영이 질문했다.
"사실 네 방법이 더 효과가 빠르고 확실하지만, 실수하면 큰 문제가 되기에 조금 보수적인 치료법으로 바꿨다. 그런데도 효과가 예상을 뛰어넘는구나."
"위험한 부분은 없었습니까?"
"우려가 있긴 있는데, 해결 가능한 부분이다."
"어떤 부분이 우려됩니까?"
"혈괴血塊라고, 핏속에 덩어리가 지는 병이 있다. 폐하는 혈괴가 꽤 심하더구나. 기공 치료를 이틀 한 다음 하루 쉴 때 공심침으로 피를 맑게 해줘야 할 것 같구나."
"공심침을 쓰면 완전히 해결됩니까?"
신한천이 잠깐 고민하고 대답했다.
"피를 맑게 하는 약을 같이 쓰면 별문제 없는데, 폐하는 약을 못 쓰는구나. 일단 공심침으로 한 번 해봐야 나도 판단할 수 있겠다."
"혈괴가 치료에 방해될까요?"
"분명히 된다. 폐에서 혈괴를 부수는 방법이 있었는데, 잘 생각나지 않는구나. 내일 공 태감한테 말해 관련 서적을 구해야겠다."
"주의해야 할 부분이 더 있습니까?"
구후영은 어린 시절 이론보단 실전으로 의술을 배웠다. 침술은 신한천이 자세히 가르쳐서 기초가 탄탄하나, 약을 쓰는 법이나 희귀한 증세에 관해선 또래 의원들보다 손색이 있었는데.
"비장은 약이 잘 안 닿는 곳이다. 그런데도 기운이 많이 쌓인 걸 보면, 폐하께서 드신 단약이 평범하지 않은 것 같구나. 단약에 드는 재료가 뭔지 알면 위험을 줄일 수 있을 거다."
다행히 신한천을 다시 만난 덕분에 부족한 부분을 서서히 채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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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후영과 신한천이 의술에 관한 이야기에 깊이 빠진 시각.
야행복을 입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검정 일색의 인영이 자금성의 성곽 근처에 나타났다.
'하나, 둘, 셋.'
속으로 셈을 센 야행인이 경공을 펼쳐 무려 삼 장 높이의 성곽을 단숨에 뛰어넘었다.
탁.
뛴 높이와 비교해 가볍게 착지한 야행인이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움직였다.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
"글쎄?"
성곽 내부를 순찰하던 병사들이 고개를 돌려 미약한 소리가 들린 곳을 눈으로 훑었다.
"횃불 튀는 소릴 잘못 들은 거 아니야?"
성곽 위에 밝힌 건 송진을 태우는 횃불로 탁탁 소리를 자주 냈다.
"그런 거 같아."
잠깐 멈췄던 병사들이 의심을 거두고 떠나자 야행인이 성곽의 그림자에서 슬며시 나왔다.
잎 하나로 몸을 숨긴다는 일엽장신一葉藏身의 재주와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절정의 은신술이었다.
'제일 어려운 관문은 넘었고.'
자금성에서 경호가 가장 심한 곳은 당연히 내궁이다. 거긴 금의위가 밤새 순찰하는데, 최근 황제가 드러누운 바람에 인력을 세 배로 늘렸다.
두 번째로 뚫기 어려운 곳은 방금 야행인이 넘은 성곽이다.
성곽 밖은 동사영東四營과 서사영西四營의 병력이 순찰한다. 성곽 위엔 횃불을 밝히고 보초를 서는 병력이 있고 순찰하는 병력이 따로 있다. 성곽 내에도 순찰 병력이 있는데, 이 셋이 정해진 대로 움직일 경우, 날개 달린 새도 안 들키고 자금성의 성곽을 넘을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 완벽할 순 없다.
모든 병력이 정해진 속도로 정확히 움직일 수 없기에 잠깐의 틈이 생겼고, 그 틈을 비집고 야행인이 침투에 성공했다.
'영창은 밤에 지키는 사람이 없다고 했으니, 그다음이 문제구나.'
야행인은 사방의 기척을 귀로 들으며 달리다 멈추고, 멈췄다 달리기를 반복하여 아주 순조롭게 영창에 도착했다.
그런데 정보와 달리 영창엔 호위가 열여섯 명이나 있었다.
- 작가의말
영창에 관한 건 제가 꾸며낸 내용입니다.
명나라 때 영창은 군량을 저장하는 용도였습니다. 유목민의 약탈에 대비해 가을에 수확한 식량을 보관하던 건 훨씬 옛날얘기죠.
영창을 감옥처럼 쓴 건 조선 얘깁니다. 명나라 군대는 군대 감옥이 따로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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