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골지한刻骨之恨
옥용적막누난간玉容寂寞淚欄干
백옥같은 얼굴이 수심에 차 눈물이 샘솟으니,
이화일지대춘우梨花一枝帶春雨
한 떨기 배꽃이 봄비를 머금었나 하노라.
놀랍게도 흰옷을 입은 여인은 구후영도 일면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소공자의 호위, 모용연.
더 놀라운 건 소공자를 죽이려면 자기 시신부터 밟고 지나라며 당당하게 외치던 모용연은 어디 갔는지, 화살에 맞은 팔을 부여잡고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그에 치료를 위해 남자들은 자리를 피하고 같은 여자인 단아만 남았다.
그런데.
"왜 혼자요?"
처치를 마친 단아가 혼자 나타났다.
"그냥 보냈습니다."
"아니, 뭔가 중요한 단서를 알 것 같았는데."
장선의 말에 단아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명분으로 질문합니까."
모용연의 목숨을 구하긴 했으나 그건 명분이 되지 못한다. 더구나 일행은 유근의 일을 방해하는 게 목적이 아니다.
유근을 찾아 죽이기만 하면 그만이다. 모용연의 사정이 뭐든 간에.
"유근이 뭘 원하는지 알면 유인할 수도 있잖소."
이 자리에서 복수에 직접 해당한 사람은 구후영과 장선뿐인데, 누구의 명분이 더 크냐고 하면 당연히 구후영이다.
그러나 정작 부득부득 이를 가는 사람은 장선이었다.
구후영은 친인이라곤 하나 얼굴조차 모르고 대화 한 번 나눠본 적 없는 사람들의 복수를 하는 거고, 장선은 짧게는 수년, 길겐 수십 년을 함께해온 사람들의 복수다.
구후영의 것이 마음에 품은 의무적이고 추상적인 복수라면, 장선의 것은 뼈에 아프게 새긴 처절한 원한이다.
"먼저 제 말을 들어보세요."
그걸 알기에 장선의 연이은 추궁에도 단아는 여상히 넘길 수 있었다.
"모용연이 뭘 하건 우리랑 상관없는 일입니다. 우리야 유근이 모용가와 얽혔기에 혹시나 무슨 연관이 있나 싶지만, 모용연으로선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게 의심스러울 겁니다."
"맞는 얘기요."
구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입장에서 자기 시야로 타인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그렇기에 언뜻 목숨을 구한 사람으로서 모용연의 비밀을 캐물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용연 입장에선 모용가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자들이 자기 비밀을 캐묻는 셈이다.
그러면 의심할 수밖에 없고, 침묵을 지키거나 거짓말을 꾸밀 가능성이 크다.
"틀린 얘긴 아니오."
그걸 깨달은 장선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모용연을 붙잡기엔 꽤 불편한 상황이란 말입니다."
말을 마친 단아가 고개를 돌려 야효를 추궁했다.
"야효. 무슨 일인지 솔직히 얘기해라."
모용연과 야효 사이에 뭔가 있음은 모두 눈치로 알았다. 다만, 그게 부처님도 고개 젓는 남녀 사이의 지저분한 얘기일까 봐 이제껏 다들 회피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모른척할 수는 없었다. 둘의 관계가 복수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 쪽이 아닙니다."
다행히, 남자들이 상상하던 그런 일은 아니었다.
"몇 년 전에 대공주 찾으러 나섰을 때 말입니다. 저랑 공주는 대공주 잡으러 갔고, 주요는 혹시 몰라 멀리서 대기했죠. 그때 저자와 소공자가 대공주를 버리고 도주하지 않았습니까. 공주께서도 아시다시피, 주요는 성격이 저보다 더 지랄, 아니, 지랄까지는 아니고. 뭐, 아무튼 그렇잖습니까."
그저 상상을 아주 초월하는 놀라운 얘기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 주요가 소공자를 거세했습니다."
잠깐 머뭇거리고 뱉은 야효의 말에 일행 모두 아연실색했다. 차라리 지저분한 남녀 사이의 일이었으면 놀람이 덜했을 것이다.
"너를 황궁에 잡아간 남색을 좋아하는 환관이라는 게 설마 그놈이야?"
"맞습니다. 소공자가 황궁에서 용 환관으로 행세하더군요. 나를 고문한 것도 주요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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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연은 산꼭대기에서 구후영 일행을 한참 지켜봤다.
목숨을 구해준 건 고맙고, 상처 치료까지 해준 건 더더욱 고맙다.
그러나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의심을 거둘 순 없었다.
'그저 우연일까?'
순순히 보내준 걸 보면 자신과 상관없는 일 같지만, 모용연은 신중하기로 했다.
생각 없이 모용세가에 잠입해 밀실에 숨었다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게 바로 오늘 일이다.
그렇게 한 시진 가깝게 구후영 일행을 지켜본 후, 딱히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보이자 경공을 펼쳐 떠났다.
목적지는 산해관 근처의 군영이었다.
장성 밖의 군영은 대부분 보堡로 불리는 높은 성벽을 두른 작은 성인데, 모용용이 갇힌 곳은 수백 명 병사가 주둔하고 약 이천 명의 평민도 있다. 우물이 세 개나 되고 창고에 식량과 무기가 풍부해 포위당하더라도 한 달은 넉넉히 버티는 단단한 요새다.
물론, 절정 초입에 이른 모용연에겐 문제도 아니었다. 흰옷을 벗고 검은색 옷으로 갈아입은 모용연은 날이 어둑해지길 기다려 성벽을 가볍게 넘었다.
요새 안은 엄청 어두웠고, 순찰하는 병사들 빼면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주요 거리에 등롱이 잔뜩 걸려 자정까지 북적이는 순천부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모용연은 경공을 최대한 펼쳐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요새 서북쪽 귀퉁이의 임시 감옥에서 모용용을 발견했다. 거긴 넓은 마당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굵은 나무로 짠 뇌롱牢籠에 갇힌 모용용 빼고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지키는 간수조차 보이지 않았다.
모용연은 아직 아릿한 오른팔을 왼손으로 살살 어루만졌다. 그렇게 잠깐 달래고 나니 통증이 꽤 가라앉았다.
그렇게 통증으로 흩어진 집중력을 한껏 끌어모은 모용연은 귀에 내공을 집중해 기척을 들었다.
몸을 숨기고 지켜보는 자는 없는 듯했다.
그럼에도 경계를 완전히 내려놓지 않은 채, 모용연은 조심스럽게 뇌롱에 접근했다.
"말할 수 있습니까?"
모용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습니까?"
"같잖은 존대는 그만하고, 조롱하고 싶으면 마음껏 해라."
둘은 예전부터 사이가 나빴다. 따지고 보면 모용용이 일방적으로 모용연을 싫어했던 거긴 하지만.
"예전에야 가주도 아니셨고, 서로 입장이 반대였지 않습니까."
모용연의 말에 모용용이 피식 웃었다.
"소마귀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모르지만, 난 절대 놀아나지 않을 것이다."
모용용이 벽을 쌓자 모용연은 갑갑한 마음이 들었다.
모용연은 원래 머리를 잘 쓰는 사람이 아닌데, 오늘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을 겪으며 마음마저 혼란하기 그지없는 터라 어떻게 대화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제게도 모용의 피가 흐릅니다."
그래서일까. 오랫동안 속에 품었던 얘기를 친하기는커녕 자신에게 눈을 부라리기 바빴던 모용용 앞에서 뜬금없이 꺼냈다.
"여기서 꺼내주고 소마귀도 죽여줄 테니 가주 자리를 내놔라. 뭐 이런 거냐?"
"정말 모르는 겁니까. 아니면 모른척하는 겁니까. 저는 여자입니다."
뜻밖의 고백에 모용용의 눈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그럼 가슴이 왜."
모용연은 물론이고 무심코 뱉은 모용용도 얼굴을 붉혔다.
"늘 천으로 꽁꽁 감싸고 다녔습니다."
"허리도?"
"네. 허리에도 천을 감았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체형에서 가장 차이가 나는 부분이 가슴과 엉덩이다. 모용연은 천으로 꽉 조이는 거로 가슴 문제를 해결했고, 엉덩이는 허리에 천을 감는 거로 해결했다.
실제보다 훨씬 굵어진 허리 덕분에 대부분 사람은 모용연의 엉덩이를 크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네가 내 여동생이란 말이냐?"
모용용의 말투가 많이 누그러졌다.
"어머니가 죽고 가주께서 저를 세가에 들이고 모용연이란 이름을 줬습니다. 그리고 제자로 받았죠."
'남색을 한다는 소문이 난 바람에 다들 모용연이 여자일 거란 가능성은 떠올리지도 못했군.'
소공자가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부인이 셋이나 되는데도 전대 가주는 자식이 대공자밖에 없었다.
그 탓에 남색을 즐긴다는 소문이 은밀히 생겼고, 아무도 모용연이 여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모용가의 일원으로서 날 돕겠다는 거냐?"
"네."
"소마귀라면 이런 얕은수를 쓰지 않았을 텐데."
갑자기 생긴 동아줄에 모용용은 마음이 흔들렸다.
"사실, 소공자의 지시로 여길 온 건 맞습니다."
모용연이 모용용을 찾아온 건 뭘 해야 할지 막막해서였다. 그래서 뭔가를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이 아는 바를 두서없이 털어놨다.
"현월궁의 호위 중 주요라는 여인이 소공자를 거세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응천부의 제가장에 갔습니다."
"제가장이라면 대이태의 친정인가?"
"맞습니다. 대이태가 제가장 장주의 무남독녀였죠."
둘이 제가장에 도착하고 며칠이 지난 뒤, 외출했던 가주가 돌아왔다. 그러고 또 며칠 뒤에 모용영이 황궁에 들어가 환관이 되었다.
"저는 순천부에 있으면서 대부분 시간엔 무공을 연마하고, 가끔 소공자가 지시한 일을 처리했습니다. 그러던 얼마 전에 소공자가 제게 오랜만에 지시를 내렸습니다."
소공자는 모용세가에 책자 두 개가 있다고 했다. 유근이 두 책자를 찾으러 모용가에 갈 텐데, 먼저 가서 책자를 찾아내 자신한테 가져오라고 했다.
모용연은 소공자의 지시에 따라 모용세가에 왔고, 평소 가주가 자신한테 알려준 밀실에 숨어 지내고 밤이 깊으면 밖으로 나와 서책의 행방을 찾았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유근이 들이닥쳤다.
"잠깐. 불로장생에 관련한 책자가 있다고 유근한테 말한 게 그놈이다. 그런데 왜 너한테 일을 방해하라고 한 거지?"
"그것까진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모용용이 고개를 빙빙 돌렸다.
"아니지. 아니야. 소마귀라면 이런 좋은 기회를 남한테 넘길 리가 없어. 유근한테 말했다는 건 뭔가 하자가 있단 뜻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한테 책을 찾아오라고 시켰다고?"
모용연은 그저 멍한 얼굴로 듣기만 했다.
"가짜구나."
"네?"
"고문을 당하는 과정에 나도 알아낸 게 있다."
고문을 당한 사람은 모용용이었지만, 아는 게 없어 아무 말도 못 했다. 외려 고문하는 자가 이리저리 찔러 보는 과정에 정보를 누설했다.
"소마귀가 유근한테 불로장생의 비법에 관한 책자를 건넸는데, 거긴 필요한 약초들만 적혔다고 했다. 그 약초들로 비약을 만드는 처방은 따로 있다고 여기는 것 같던데."
모용용이 잠깐 침음하고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그 책자가 가짜인 거 같구나. 원래 없었던 건데 갑자기 생겨난 것이지."
모용연은 지금까지 모르던 모용용의 모습에 놀라며 아무래도 자리가 사람을 만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널 이제야 보낸 것도 그래서였어. 유근이 출발하기 전까진 없었으니까. 아무래도 유근의 출발에 맞춰 책자를 모용세가의 어딘가에 숨겼겠지. 소마귀도 그걸 알고 시간 맞춰서 널 보낸 거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모용용이 갑자기 모용연과 눈을 맞추며 질문했다.
"넌 왜 마음이 바뀐 거냐?"
"금의위에 들켜 화살에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죽음의 위기를 겪은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가주의 유언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유언?"
"마지막 외출을 앞두고 저를 딸이라 부르면서 소공자를 꼭 지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흠."
"전 소공자를 해치려는 게 대공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장의 마수에서 지키라는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 작가의말
띠링! 캐릭터 모용용은 중대한 음모를 알아내는 놀라운 성과를 이룩함으로써 회귀 자격을 얻었습니다.
띠링! 그러나 잘생기지 못함으로써 자격을 박탈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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