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류귀종萬流歸宗
모든 흐르는 물은 결국 바다로 간다.
샘끼리 모여 내를 이루고, 내들이 모여 강이 되고, 강들이 모여 큰 강이 되고, 큰 강은 바다로 간다. 못이나 호수로 잠깐 멈추기도 하나, 차고 넘치면 결국 흐르기 마련이고, 흐르는 물은 반드시 바다로 간다.
불가에선 이를 일컬어 만류귀종이라고 한다. 정확한 이유는 없지만, 불가는 모든 물이 사실 바다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어렵네.'
구후영은 돌아온 날 사부한테서 낙화검법의 비급을 받아 책등을 확인했다. 돌돌 말린 낙화검법의 기본 수련법을 적은 금속 두루마리를 기대했는데, 음서와 달리 아무것도 없었다.
이에 구후영은 낙화검법에 알맞은 수련법을 직접 만들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정작 며칠 고민하고 보니 너무나 막막했다.
'차라리 사제들한테 난화검법을 가르치는 게 어떨까?'
그래서 초식도 알고 기본 수련법도 아는 난화검법을 가르치고 싶은 나약한 마음이 생겼다.
허나 난화검법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
'난화검법은 확실한 출처를 모른다. 천마의 무공이면 사마외도로 찍힐지도.'
구후영은 백화궁 자매나 육비나타를 상대할 때 부득이하게 난화검법을 펼쳤으나 평소엔 최대한 숨기려고 애썼다.
혹시나 난화검법이 천마의 무공이면 마교로 몰려 구후영은 물론 낙화문까지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 이젠 홍엽산장까지 있어 난화검법을 수련하고 펼칠 때 더 조심하게 되었다.
"대사형. 저쪽 애들이 대결 안 해요."
낙화검법의 기본 수련법을 꼭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짜내 자꾸 포기하고 싶은 자신을 열심히 설득한 구후영이 다시 하던 일에 집중하려는데, 휴식을 맞이한 사제들이 시무룩한 얼굴로 모여와 구후영에게 말을 걸었다.
그날 목검을 들고 세 번 겨뤄서 낙화문이 전부 이겼다. 첫 승리에 고무된 어린 제자들은 오매불망 새 대결을 기대했지만, 인호표국 쪽에서 더는 도발하지도 도발에 응하지도 않았다.
"너희 졌을 때 기분이 어땠어?"
구후영의 질문에 제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막 다음 대련이 기다려지고 그랬어? 대련하러 가기 싫은 적 없어?"
"대련하기 싫었어요."
"이기도인以己度人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저 상황이면 어땠을지 생각해서 상대의 마음을 유추하는 방식이지."
일방적으로 진 인호표국의 아이들이 대련에 나오기 싫겠다는 생각에 어린 제자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생각이 다른 아이도 있었다.
"우린 싫어도 나갔는데요."
"그래. 그건 너희가 잘한 거야. 그런데 나오기 싫어서 안 나올 수도 있는 일이잖아. 너희가 싫어도 나갔기에 다른 사람도 그래야 한다는 생각은 틀린 거야."
"그럼 도대체 어느 게 맞는 건가요?"
어린 나이부터 무공만 수련한 아이들에게 구후영의 말은 너무 어려웠다.
"나와도 맞는 거고 안 나와도 맞는 거다. 세상엔 콕 집어 맞고 틀린 일이 없다. 각자 사정이 다르니까. 이기도인은 다른 사람을 나처럼 생각하라는 게 아니고, 내가 저 사람이라면 어떤 마음일지 헤아리라는 거다. 어떤 기분이고 어떤 마음인지만 판단하고, 그에 따르는 행동에 관해선 그저 지켜보는 거다. 이런 식으로 경험을 쌓으면 모든 사람과 사건에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다."
어린 제자들이 알 듯 말 듯 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수련하러 갔다.
'그래. 내가 낙화검법을 만든 사람이라면 어떤 기본기를 만들었을지 생각하면 되잖아.'
일장연설을 망친 구후영이 깊은 생각에 빠졌다.
'난 난화검법을 알고 난화검법의 기본 수련법을 안다. 초식과 기본기의 연관 관계를 확인해 낙화검법의 초식에서 기본 수련법을 유추하면 된다.'
그간은 방법을 몰라 막막했던 거지, 어렴풋이나마 방향을 잡자 수련법을 만드는 일은 일사천리로 흘렀다.
'만류귀종이라고. 어차피 낙화검법이나 난화검법이나 검 휘두르는 무공이다. 난화검법은 수비에 치중하고 낙화검법은 공격에 치중하니 둘을 합치면 훨씬 대단한 검법이 나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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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하구나!"
구후영이 만든 낙화검법의 기본 수련법을 본 임초현이 눈물을 글썽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비급이 없이 초식은 사부가 제자에게 가르치는 방식으로 전해지고, 기본기 따위는 없이 어린 제자에게 다짜고짜 초식 수련을 시켰던 낙화문이다.
천 년이 넘은 문파라는 자부심과 대부분 문파엔 없는 장문검의 존재로 버텼는데, 이젠 비급도 생기고 기본 수련법도 만들어냈다.
거기에 구후영 덕분에 커다란 장원과 연무장을 지었고, 목마하와 가까운 곳의 비옥한 전답도 다수 확보했다.
'좌수검이고 뭐고, 그냥 제자들이나 가르치며 살까?'
임초현은 불쑥 구후영에게 장문 자리를 넘기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부, 제겐 아직 미흡한 부분이 많이 보입니다."
상념에 잠겼던 임초현은 구후영의 말에 큰소리로 웃었다.
"유저야. 내가 네게 엄한 모습은 많이 보였어도 타박한 적은 별로 없었는데, 오늘은 한마디 해야겠구나."
임초현의 말에 구후영은 자신이 뭘 실수했는지 몰라 눈만 껌뻑거렸다.
"나흘도 안 되는 사이에 서른여섯 개나 되는 기본 수련법을 만들었는데 미흡한 부분이 없으면 네가 달마나 장삼풍이지 유저겠느냐."
"제자가 너무 오만했군요."
"그만큼 그릇이 큰 거겠지. 내가 낙화문의 번영을 위해 널 계속 잡아두고 짐을 지우는 게 맞는 일인지 모르겠다. 넌 이미 구름과 비를 얻어 연못에 만족할 물건이 아닌데 말이다."
삼국지에서 유비가 손권을 만나러 경현에 갔을 때, 유비를 본 주유는 심히 걱정되어 손권에게 '유비한테 형주를 주면 교룡이 구름과 비를 얻는 거나 마찬가지니 더는 연못에 만족하지 못할 거다'고 말했다.
그러나 손권은 조조의 위협이 너무 커 주유의 말을 듣지 않았고, 유비는 형주를 얻어 북위와 동오와 더불어 천하를 셋으로 나눠 차지했다.
"유비가 촉한의 황제가 되고 후세에 숭앙받는 건 형주를 얻어서가 아니라 인의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제자의 결심이 늦어 사부께 심려를 끼친 것 같은데, 장문검을 받겠습니다."
'에구. 순진한 놈.'
어떻게든 구후영을 설득해 장문 자리를 넘겨주려고 수많은 말을 준비했던 임초현이건만, 구후영이 순순히 따르자 기쁜 것보단 미안한 마음이 크게 들었다.
'강호에 나갈 때마다 뭔가 얻어서 돌아오는 걸 보면 밖에선 똘똘하다는 건데.'
잠깐 감상에 잠겼던 임초현은 바로 심정을 수습했다.
"그래. 장문인 자리를 넘기는 건 연무장이 완성되는 대로 강호의 친구들을 불러 진행하자. 그나저나 자룡의 행방은 어찌 되었느냐?"
"하오문은 딱히 도움이 되는 정보가 없습니다. 하오문 총단으로 형제를 찾으러 간 두 호법의 소식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양단에 필요한 약초를 넉넉히 캔 두전은 하오문 총단으로 갔다. 그간은 어디 있는지 몰랐는데, 새롭게 태원부 하오문주가 된 사공이 총단의 연락 방식을 알아내서 두전에게 전달했다.
모든 단서가 끊긴 구후영에겐 두전이 마지막 희망의 끈이다.
"예전에 점쟁이가 널 보고 세상의 복이 알아서 굴러들어오는 귀한 상이라 그러고, 자룡은 고생할수록 높이 올라가는 강인한 상이라고 했다. 용하기로 천하에서 제일이라는 점쟁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제자도 자룡이 어딘가 살아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래. 그렇게 말하니 나도 시름이 놓이는구나. 그나저나, 나랑 같이 어딜 좀 다녀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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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초현과 구후영은 고이 모셔두었던 비단옷을 꺼내 입었다. 녹색 비단으로 만든 옷으로, 평민이 입을 수 있는 가장 존귀한 색이다.
황금색과 보라색은 황실 전용이고, 붉은색은 사품 이상의 관리만 입을 수 있다. 오품부터 칠품은 푸른색을 입고 팔품과 구품이 녹색을 입는다.
관직이 없는 명문의 자제나 향시에 급제한 서생을 비롯해 어느 정도 재력과 지위가 되는 자들은 녹색 비단옷까지 허용되나, 푸른색과 붉은색을 입으면 관에 끌려가 곤장을 맞을지도 모른다.
"허. 옷이 날개라더니."
비단옷을 차려입은 구후영의 모습에 임초현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평소 입는 옷도 대충 만든 건 아니지만, 옷감이 비단이면 만드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정성을 기울이는 게 인지상정이다.
덕분에 부드러움에 가려졌던 구후영의 예기가 밖으로 드러나 자꾸 눈길을 끌었다.
"당장 장가가도 되겠다. 네 짝은 홍엽산장에서 알아서 잘 찾아줄 테니 사부는 뒷짐 지고 구경해도 괜찮지?"
장가라는 말에 구후영은 귀까지 빨개졌다.
"하하. 매사에 당당하던 너도 부끄러울 때가 있구나."
잘 차려입은 둘이 검을 들고 장원을 나섰다. 어린 제자들은 사부와 대사형이 어딜 가는지 궁금했지만, 임초현이 기세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바람에 감히 묻지 못했다.
"어딜 가는 겁니까?"
임초현의 느긋한 걸음에 구후영이 질문했다. 빨리 자신이 만든 수련법을 사제들에게 알려주고 수련 결과를 확인하고픈데, 사부는 일하러 나가는 새벽의 소처럼 느렸다.
"인호표국."
배신자들이 한꺼번에 덤비더라도 쉽게 이긴다. 굳이 임초현이 나설 것도 없이 구후영 혼자서도 자신 있다.
그러나 수년간 얼굴을 맞대고 살았던 자들과 반목하는 건 괴로운 일이다. 구후영 역시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사부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여기구나.'
발길을 재촉하진 않았지만, 워낙 거리가 가까워 둘은 금세 인호표국에 도착했다. 장인호가 훔친 백 냥에 맞춰 산 건지 장원의 규모는 조금 작았다.
"게 누구 없느냐!"
임초현이 걷는 내내 꾹꾹 눌렀던 기세를 한꺼번에 분출했다. 내공 운용이나 안정적인 면에선 온휴와 비교해도 부족하지만, 기세 하나만큼은 임초현이 훨씬 강했다.
"어, 장문, 아니, 임 대협께서 어쩐 일로."
외침에 화들짝 놀라면서 달려와 문을 연 제자가 말을 떠듬거렸다.
"손님이 왔으면 일단 안으로 들여야지. 네 사부가 널 그렇게 가르치더냐?"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인 제자가 옆으로 물러나며 길을 텄다. 임초현과 구후영은 자기 집에 온 사람처럼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당신이 어쩐 일이오?"
호비를 위수로 인호표국의 사람들이 전부 나왔다. 표국의 일은 가을이 제일 바쁘고, 가을 전후론 비교적 한가하다.
덕분에 용호표국에 있는 장인호 빼고 모든 사람이 장원에 있었다.
"낙화문 장문의 이름으로, 장문검의 권위를 빌어 고한다."
임초현이 장문검을 꺼냈다. 날을 안 세웠고, 검신이 일 척 정도인 짧고 초라한 검이었다. 대제자인 구후영도 처음 보는 거고, 호비 등도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장문검을 실제로 보는 게 처음인 듯했다.
"호비를 비롯한 인호표국 소속의 제자, 그리고 용호표국의 장인호를 낙화문에서 축출한다. 너희까지는 낙화검법을 사용해도 되지만, 밑으로 전하는 건 엄금한다. 만약에라도 낙화검법을 전수하는 걸 발견하면 낙화문의 이름을 걸고 너희 모두를 도륙하겠다."
낙화문을 안 좋게 나온 게 늘 가슴에 걸렸던 호비 등에겐 더없는 희소식이었다.
"배려에 감사드리오."
임초현이 번복이라도 할까 봐 걱정됐는지 인호표국 사람들이 분분히 포권하며 머리를 숙였다.
"잘 먹고 잘살아라."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보지 말자.
- 작가의말
이기도인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 중 하나입니다. 처음 들었을 때부터 무슨 뜻인지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안 거 같은 느낌입니다. 뭐, 몇 년 지나면 또 내가 잘못 알았구나 한탄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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