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견종정一見鍾情
천리요망월千里遙望月
천 리 밖에서 같은 달 바라보며,
상사재천애相思在天涯
하늘 끝에서 그대를 그리노라.
소녀는 세상을 제대로 알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었다.
"복수하고 싶으냐."
장로들이 질문했다. 소녀는 분위기에 압도당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소녀는 복수가 뭔지도 제대로 몰랐다.
"열심히 수련해라."
소녀는 고사리 같은 손에 물집이 안 드는 날이 드물었다.
"안 힘들어?"
그런 소녀의 생활에 문득 언니가 끼어들었다. 어머니는 같으나 아버지가 다른 언니는, 소녀와 달리 노는 게 일이었다.
"힘들진 않아."
소녀는 온갖 모양의 암기를 한 줄로 높이 쌓고 있었다.
후.
언니가 입김을 불자 어렵게 쌓은 암기 탑이 무너졌다.
"나랑 놀자. 재밌는 거 가르쳐줄게."
그날 소녀는 처음으로 장로들한테 매를 맞았다.
"이게 다 너를 위한 거다."
언니와 달리 소녀는 열심히 수련해야 공주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장로들의 훈계로 그걸 알아차린 소녀는 맨날 놀아주라고 조르는 언니를 피해 수련에 열중했다.
"잘했다. 이제부터 이 둘은 네 호위다."
시험을 통과한 소녀는 다섯 번째 공주가 되었고, 호위가 생겼다. 두 호위는 부부였는데, 여자가 한 살 많았다.
'이제 뭘 하지?'
공주가 되자 장로들도 더는 소녀를 귀찮게 안 했다. 그러나 할 줄 아는 게 없는 소녀는 계속 수련에 열중했다.
"마교가 원하는 건 대궁주의 딸이오."
그러던 어느 날. 대공주 청월이 도망쳤다. 장난이 심해 며칠씩 숨어 지내는 일이 드물지 않은 터라 모두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여러 곳에서 도주한 흔적이 발견됐다.
"공주. 대공주를 안 찾으면 공주가 마교로 시집갑니다."
"그게 어때서?"
"마교는 망하기 일보 직전입니다. 가면 좋은 꼴을 보기 힘듭니다."
"그럼 언니도 가면 안 되는 거잖아."
"대공주는 수련도 열심히 안 하고 놀기만 했잖습니까."
호위의 설득에 넘어가진 않았지만, 여러 궁주와 장로들의 명으로 소녀는 언니 찾으러 떠났다.
"푸른 궁장을 입은 소녀를 보았는가."
생경한 풍광과 사람에 언니를 찾는 것도 잊고 흠뻑 빠졌던 소녀는, 예기치 않게 언니의 행방을 알아냈다.
딱히 원친 않았으나 두 호위의 성화에 못 이겨 언니가 있는 곳에 갔고.
소녀는 눈에 별을 품은 소년을 만났다.
#
호위와 소년이 싸웠다.
실력은 호위가 강했지만, 소년의 검술은 섬세하면서도 대담해 수세에 몰릴지언정 패색을 보이지 않았고, 기회를 잡아 오히려 호위를 궁지에 몰았다.
그런데 성질이 고약한 호위가 양패구상을 마다하지 않았다.
지켜보던 소녀는 암기를 던져 호위의 머리로 떨어지던 검 조각을 쳐냈고, 소년의 심장을 노리던 연검의 검 끝을 어깨로 보냈다.
다행히 소년이 검을 멈춘 덕분에 호위는 무사했고, 소년 역시 검에 찔렸으나 큰 핏줄은 피해 목숨을 부지했다.
"너희는 대공주를 궁까지 모셔라. 난 이자를 치료하고 따르겠다."
소녀는 소년을 지극정성으로 치료하고 보살폈다. 어릴 때부터 수련하며 자주 다친 덕분에 외상 치료는 익숙했고, 소년은 빠르게 회복했다.
"태원부 낙화문까지 태워라."
고열에 시달리며 소년이 많은 말을 한 덕분에, 소녀는 소년이 화산 제자가 아님을 알았다.
"실수하면 알지?"
소녀는 은자를 주물러 야비하게 생긴 마부에게 겁을 줬다. 그러곤 곧장 궁으로 돌아가, 탈궁脫宮을 선언했다.
장로들이 노발대발했지만, 소녀는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넌 내 성을 쓰지 못한다."
소녀는 대궁주의 성 대신 아버지의 성을 쓰게 됐고, 이름은 직접 지었다.
"공주, 저희도 데려가 주십시오."
두 호위가 배월교로 가는 길에 동행했다.
'술을 좋아하고 성현의 말씀을 좋아한다라.'
소녀는 언니한테 들은 말을 떠올리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글공부에 매진했다.
"교주, 이렇게 큰돈을 벌어본 건 처음입니다."
복장표국을 도우며 큰돈을 벌자 배월교 제자들이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에 소녀는 태원부로 갔다. 처음 왔을 땐 궁핍하여 돌봄이 필요했으나, 이젠 돈도 많으니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소년이 없었다. 소녀는 자그마한 장원을 하나 사서 기다렸으나, 소년은 돌아오지 않았다.
상심한 소녀는 배월교로 돌아갔다.
"경매?"
혹시나 해서 떠나기 전에 하오문에 의뢰를 넣었는데, 소년의 이름을 조각한 비취를 경매한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소녀는 왕가장에 몰래 들어간 다음, 진경 가면을 쓴 자를 납치해 가면을 뺏었다.
"육천 냥."
소녀는 궁을 떠날 때 받은 아버지의 재산을 반이나 탕진했으나,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냥 가. 소중한 물건을 흘렸어."
매일 소년의 장원 근처에 가서 목소리를 듣는 게 낙이었던 소녀는, 소년이 먼 길을 떠나게 되었음을 알았다.
부랴부랴 준비하고 따라갔는데, 배는 이미 떠났다. 급한 마음에 무작정 뛰었더니 그만 물에 빠졌고, 안타깝게도 비취를 강에 흘렸다.
소녀는 비취를 찾기 위해 소년을 그대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
소년이 돌아왔으나, 인사불성에 빠졌다.
소녀는 매일 일지봉에 가서 소년이 차도가 있는지 살폈다.
그러다 온휴의 부름을 받고 부득이하게 태원부를 떠났다.
"응? 잘못 본 게 아니고?"
칠살문의 자객한테 우호법이 쓰러지고 제자들도 꽤 다쳤다. 가뜩이나 심란하던 소녀에게 좌호법이 희소식을 전했다.
"야효와 싸운 화산 소협이 분명합니다."
소녀는 소년이 일어났다는 말에 너무 기뻐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었으나,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소년이 홍엽산장에 나타났다. 소녀는 이 우연한 만남이 하늘의 안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럴 땐 정공법이 최고입니다. 구후영 소협."
소녀는 홍엽산장의 장주와 소년이 이름이 같음을 알아챘고, 어떠한 가능성을 떠올려 소년을 열성적으로 도왔다.
'아까 장선을 이길 때 야효와 대결했던 검술을 차용했는데, 혹시 알아봤을까?'
소년이 그때 딴생각에 잠겼음을 알지 못한 소녀는, 소년이 자신의 권법을 알아보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로 가슴이 한껏 두근거렸었다.
"구후 소협입니다. 온 표국주께선 연무장으로 가서 도우러 온 사람들을 안정시키십시오."
갑자기 들린 장소성長嘯聲에 소녀는 급히 달려갔고, 소년이 무사함을 확인했다.
'괘씸한 놈.'
소녀는 연무장까지 쫓아가 암기로 육비나타를 죽였다. 태어난 이후 가장 큰 공포를 느끼게 한 자를 살려두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참을걸.'
그러나 대부인의 말을 듣고 생포하여 배후를 캐내지 못한 걸 후회했다.
'더 노력해야겠어.'
소녀는 그간 타고난 총명으로 웬만한 일을 다 해결했지만, 더 큰 적을 상대하기 위해 공부해야 함을 깨달았다.
#
소년은 자신이 베푼 은혜는 생각지도 않고, 소녀의 도움에 더없이 감사했다.
이젠 기억도 잘 안 나는 아버지를 떠올려 소녀는 슬프면서도 기뻤다.
소녀는 소년과 함께 태원부까지 갔으나, 며칠 안 있고 돌아가야 했다. 우호법이 다치고 온휴도 다른 일에 정신이 빠져 표행 준비는 소녀 몫이 되고 말았다.
그 탓에 조카의 생일잔치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소녀는 표행을 마치고 천산으로 향했으나 언니를 만나지 못했다.
"구후 공자?"
대신 오물 구덩이에서 갓 기어 나온 것 같은 소년을 만났다.
"구후 공자는 제가 왜 여길 왔는지 안 궁금합니까?"
자신만큼 안 반가워 보이는 소년의 모습에 소녀는 불쑥 심술이 났다.
소년은 물어도 괜찮냐고 했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 모습이 답답하면서도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배산이 사라졌습니다."
규찰대주를 만난 소녀는 간단히 말 한마디로 소년의 걱정거리를 덜어줬다.
"이젠 우리 말을 믿겠습니까?"
그게 너무 기뻐 소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우쭐거렸다.
큰 문제를 해결했으나, 하늘의 질투를 받는지 소년은 고난이 끊이지 않았다.
소녀는 자신의 재주를 아낌없이 펼쳐 소년을 도왔다. 소년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종종 힘들어했지만, 결국엔 천년 거암처럼 단단한 모습으로 모든 역경을 이겨냈다.
"아마도 천하에서 제일 단단한 비수일 겁니다."
무당을 상대하는 중요한 일전을 앞두고, 소년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비수를 소녀에게 선물했다.
"이걸 제게 선물하신 건가요?"
상대가 비수에 담긴 의미를 모름을 알지만, 소녀는 여전히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단 소저, 같이 가요."
"싫은데요."
심장 뛰는 소리를 소년에게 들킬까 봐 소녀는 황급히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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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무당으로 가고 두 달하고 보름 정도 지났을 때, 좌호법이 전언을 보냈다.
야효가 서창에 잡혔습니다.
깜짝 놀란 소녀는 바로 순천부에 갔고, 금의위와 형부는 물론, 순천부 근처에 있는 감옥을 모조리 뒤졌다.
그러다 우연히 동창과 연이 닿았고, 수백 냥의 은자를 써서 야효가 황궁의 영창에 갇혔음을 알았다.
'야효를 구하고, 암호문도 찾고.'
아버지를 죽인 흉수가 칠살문 소속인 건 알지만, 그게 누군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국, 소녀는 칠살문 문주를 죽여 복수를 완성하기로 했다. 문제는 소녀는 물론이고, 칠살문과 수백 년 동안 싸워온 현월궁도 칠살문이 어디 있고 문주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소녀는 예전에 칠살문의 암호문이 황궁서고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은 적 있고, 야효를 구하는 김에 황궁서고에서 암호문도 찾기로 했다.
"우리가 인연은 인연인가 봅니다."
황궁에서 위험에 빠진 소녀 앞에 소년이 나타났고.
"제가 일부러 소란을 일으켜 시선을 끌까요."
소녀의 가슴을 여러 차례 두근거리게 했다.
"청청자금 유유아심."
"청청자패 유유아사."
소년은 그간 자신도 소녀가 그리웠음을 말했고.
"이 구후영이 부족함이 많으나 감히 단 소저에게 청혼하오."
소녀에게 세상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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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소녀가 긴 이야기를 마쳤다.
"그럼."
소녀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 면사를 벗었다.
"어때요?"
"언니랑 많이 닮았소."
소녀의 얼굴을 본 소년이 말했다.
"언니랑 나랑 누가 더 예뻐요?"
소녀가 질문했다.
소년이 고민했다. 그 모습에 소녀가 입술을 삐죽였다.
"초 부인은 생동감이 강해 채색 벽화가 연상되고, 단 소저는 담백한 수묵화가 떠오르오."
소년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누가 더 예쁘냐고요."
"아름다움이란 다양한 것이어서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다고 생각하오."
소년의 대답에 소녀가 눈을 흘겼다.
"그럴 땐 그냥 내가 더 이쁘다고 하면 되는 겁니다."
"우열은 기준이 명확할 때만 나눌 수 있으니 어찌 함부로 재단할 수 있겠소."
"또, 또 무공 얘기."
소녀의 핀잔에 소년은 그저 해맑게 웃었다.
그때.
쿵 소리가 크게 울렸다.
"아니, 너무한 거 아니오?"
자룡이 넘어진 몸을 일으키며 툴툴거렸다.
"동침인지 뭔지 하는 걸 그리도 하고 싶어 하면서 그게 뭔지는 왜 모른다는 거요?"
"부마의 동생만 아니었어도."
구후영의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한 야효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내가 그저 구경하겠다고 한 것도 아니잖소. 필요하면 성심성의껏 도울 테니 제발 좀 보게 해주시오."
- 작가의말
일견종정 - 첫눈에 반하다.
청월 - 아이돌 얼굴.
단아 - 배우 얼굴.
원래는 3부 내용입니다. 사건 순서를 바꾸며 여러모로 힘들었는데, 이 부분은 앞당긴 게 마음에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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