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백산행大白山行
노요지마력路遙知馬力
길이 멀어야 말의 체력을 알 수 있고,
일구견인심日久見人心
오래 지내야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
"꺼내드리겠습니다."
모용연이 말했다.
모용용이 마음을 열었다고 여기면서부터 현재 상황이 거북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모용용은 작게 생각하면 피를 나눈 오빠고, 크게 생각하면 모용가의 가주다. 어느 경우든 이렇게 족쇄를 차고 뇌롱에 갇혀 추레한 모습으로 있어선 안 된다.
"아니다. 일단 네 얘기를 듣고 어찌할지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 같구나."
영문 모를 죄책감까지 느낀 모용연은 그간 모용영한테서 들은 얘기를 모용용에게 고스란히 전했다.
모용용으로선 천만다행으로, 모용연이 자기 주관을 하나도 안 붙이고 들은 그대로 전한 덕분에 사태의 윤곽을 어슴푸레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불로장생의 비법을 안물이 봐도 진위를 구분하지 못했다고?"
"실제로 보여준 건 아니고 제가장 가주가 그리 호언장담했답니다."
모용영은 자의가 아닌 타의로 환관이 됐다. 물론, 타고난 영악함으로 황궁에서도 '잘' 지냈지만, 마냥 즐거운 일일 수 없었다.
환관이 된 상황이나 황궁에서 당한 억울함을 푸는 데는 모용연만 한 대화 상대가 없었고, 덕분에 모용연은 모용영에게서 들어야 할 말 듣지 말아야 할 말 모두 들었다.
"소마귀는 진실을 알고도 참여한 거란 말이지."
모용용이 이를 갈았다. 누구한테 속아 어리석은 짓을 한 거여도 용서하기 어려운데, 세가에 어떤 해를 끼칠지 뻔히 알면서도 기꺼이 행했다고 생각하니 원망이 골수까지 사무쳤다.
'난 참 한심하구나.'
모용용의 말에 모용연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간 불로장생에 관한 책자가 가짜인 걸 알면서도 뭐가 문젠지 전혀 몰랐다.
낮에 정체를 들켜서 도주하며 본 세가의 참상. 화살촉이 살에 박힌 통증,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이러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모용용과 대화하기 전까지 소공자의 지시에 따랐던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깨닫지 못했다.
"이대로 도주하면 모용가는 끝이다. 맹수가 득실대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빨과 발톱이 예전과 다름없음을 증명해야 한다."
모용연이 모용용과 조금이라도 친했다면 사람 목숨이 더 중하다고 거침없이 조언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불결하고 하찮은 사생아라는 생각으로 쭉 자괴감을 느끼며 자랐던 모용연은 모용용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대백산大白山으로 간다."
대백산은 백두산에서 북쪽으로 삼천 리 떨어진 곳에 있다. 선비족의 발상지로, 관동의 대부분 부족이 백두산을 성산으로 부르며 아버지 산으로 모시는 것과 달리 선비족은 대백산을 성산으로 삼았다.
"유근을 그곳까지 유인해서 죽이면 세가를 다시 일으키지 못하더라도 모용의 이름이 더럽혀지진 않을 거다."
잠깐 말을 멈추고 모용연과 눈을 맞추던 모용용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난 아직도 네 말을 완전히 믿지는 못하겠다."
거짓말 하나 없이 진실만을 말했던 모용연의 얼굴에 억울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난 널 믿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용가가 여기서 영원히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세한지송백歲寒知松栢.
날이 추워야 비로소 소나무의 푸르름을 알 수 있다.
평소 소공자를 지지하며 이권 하나라도 더 얻으려 애쓰던 장로와 가신들이 전대 가주가 죽자 만장일치에 가깝게 모용용을 새 가주로 추대했던 건 이유가 있었다.
"난 어떻게든 유근을 대백산으로 유인할 테니, 넌 그리 알고 이리 행동해야 한다. 혹시 내가 유인에 실패하면 성과 이름을 갈고 멀리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새 삶을 살거라."
위기가 닥치자 모용용은 그간 보여준 부족했던 모습들이 꾸며낸 것이라는 듯이 거침없는 움직임을 보였다.
#
"어휴."
멀리서 지켜보던 단아가 한숨을 푹 쉬었다.
유근이 마차 안에 없을 가능성 때문에 구후영과 단아는 모용용을 가뒀다고 알려진 산해관 근처의 요새로 왔다.
그러나 구후영의 추측이 틀린 거였는지 유근은 찾아내는 대신 생각지도 못한 모용연을 발견했고.
임시 감옥을 감시하던 세 금의위의 수혈을 몰래 짚어 모용연을 돕기도 했다.
"생긴 건 얌전한데,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네요."
대화를 마치고 요새 밖으로 사라지는 모용연의 모습을 바라보며 단아가 툴툴거렸다.
"갑자기 큰일을 당해 제정신이 아니지 않겠소."
구후영의 두둔에 단아가 샐쭉하게 말했다.
"편드는 겁니까?"
"무슨 편 말이오?"
구후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 나보다 먼저 만났고, 나보다 이쁘고."
그제야 단아의 심술을 알아챈 구후영이 피식 웃었다.
"난 오늘에야 모용연이 여자인 걸 알았소."
괜찮은 대답이나 단아가 원하는 대답관 거리가 멀었다.
"우둔한 게 자랑입니다."
그래서 말에 가시를 넣었다.
"아니. 어차피 다 몰랐던 거잖소. 청월 소저도 모용연이 남자인 줄 알고."
구후영이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단아와 단둘이 있다고 해도 배산의 부인이 된 청월한테 구설이 될 만한 얘기는 안 하는 게 좋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듣고 놀라지 마세요."
그에 단아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모르지 않았을 거예요. 언니는 여자를 좋아해요."
구후영은 놀란 나머지 몸을 흠칫 떨었다.
"어떻게?"
"어떻게는 무슨.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데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라고 없겠습니까."
세상을 달관한 듯 굴던 구후영의 멍한 얼굴을 보며 단아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럼 모용연도?"
"왜요? 모용연도 여자를 좋아할까 봐 걱정입니까?"
단아의 눈이 다시 샐그러지자 구후영이 황망히 손을 저었다.
"그게 아니고. 이형이 모용 소저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아서."
#
"조건이 있소."
모용용이 낙심한 듯한 표정을 짓자 유근이 기쁘게 웃었다. 황궁에서 지내며 얻은 것들 중에 제일을 뽑자면 눈치 살피는 재주인데, 지금 모용용의 표정은 절대 꾸며낸 게 아니었다.
실제로 모용용이 자신의 위험한 선택으로 망설임을 느끼던 참이어서 유근의 재주가 모자란 건 아니었다.
"얼마든지 말씀하시오."
"모용가의 식솔을 모조리 석방하시오. 모용가의 재물도 모두 돌려주시오."
"더 없소?"
모용용이 잠깐 고민하고 고개를 저었다.
"꼭 들어줬으면 하는 조건은 이 두 개요. 다른 건 아직 모르겠소."
유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용의 반응은 뭔가를 바라고 고심한 게 아니라 방금 마음이 급하게 꺾인 사람 같았다.
"좋소. 폐하의 이름으로 약속하지."
호언장담한 유근이 금의위의 천호 한 명을 빼고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심지어 곁에서 열 발짝 이상 떨어진 적 없던 흑갑호위들까지.
"대백산이오."
"대백산?"
"모용가의 선조들이 묻힌 곳이오. 아버지의 마지막 출행지가 대백산이었소.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요. 솔직히 나는 첩의 자식이라 거의 들은 게 없소."
유근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며칠 전에도 그렇고. 왠지 모용용이 자꾸 자기 동생을 끌어들이려는 듯한 느낌을 받은 탓이었다.
그러나 모용용의 얼굴을 봐선 전혀 거짓말 같지 않았다.
고작 며칠 전까지 표정을 전혀 못 숨기던 그 애송이가 갑자기 바뀔 린 없겠지.
"가주의 얘기는 알아들었소. 며칠만 더 고생하시오."
말을 마친 유근은 집무실로 돌아가 모용용을 지켜보던 금의위 고수들을 호출했다.
"모용 가주가 외부인과 접촉한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셋 모두 어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잠들었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자신만 잠들었다고 생각했기에 자신만만한 얼굴로 당당히 대답했다.
"전음을 받을 가능성은?"
"저희 눈에 안 띄는 거리에서 전음을 보내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그게 가능한 고수라면 그냥 뇌옥을 부수고 모용용을 꺼냈겠죠."
짧게 고민한 유근은 금의위들을 믿기로 했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느낌은 있으나, 셋이 동시에 거짓말할 리는 없다.
서로 다른 계파에서 한 명씩 뽑았기에 누군가가 실수하면 신나서 일러바칠 놈들이니.
'물건은 아직 있어.'
아니면 그저 유근이 그렇게 믿고 싶었을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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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났다.
구후영 등은 요새 근처를 맴돌며 유근을 죽일 기회를 수시로 엿봤으나, 열 명이나 되는 흑갑호위의 방해를 뚫을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흑갑호위가 진짜 그렇게 강하오?"
답답한 마음을 못 참고 구후영이 질문했다.
"공자라면 모용가의 장로와 가신 수십 명을 몇 합 사이에 죽일 수 있습니까?"
장로는 말할 것도 없고, 가신도 대부분 절정에 이른 고수일 것이다.
비록 구후영이 화산에서 반 각 정도의 기간에 마교 고수 수십 명을 죽였지만, 개중엔 절정에 이르지 못한 무인이 대부분이었다.
혼전 상황이어서 경공이 뛰어난 구후영에게 유리한 부분도 분명히 있었고.
"게다가 정체를 감춰야 합니다."
죽은 사람 복수를 하겠다고 산 사람 인생을 갈아 넣을 순 없다.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황제라곤 하지만, 그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황제의 정신이 온통 딴 데 팔렸기 때문이다. 유근을 죽이는 과정에 신분을 들키면 후환이 무궁할 게 뻔하다.
"제길. 육시럴 놈."
원수가 눈에 보이는 곳에 있는데 막상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거기서 오는 막막함에 장선은 욕을 못 참았다.
그때.
"저기 보십시오."
양달의 말에 일행은 대화를 멈추고 요새 정문 쪽을 바라봤다.
금의위 무사 넷과 소년 한 명이 거기 있었다.
"저거, 그놈입니다."
야효가 이를 뿌득 갈았다.
사내답지 못한 행동을 해서 사내가 아니게 되었는데, 거기에 앙심을 품고 자신을 잡아다가 괴롭힌 것에 대한 원망이었다.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단아가 누가 말릴 틈도 없이 경공을 펼쳐 사라졌다가 잠시 뒤에 복귀했다.
"놈 옷에 추적향을 묻혔습니다."
한편.
옷에 추적향을 잔뜩 묻히고도 전혀 눈치를 못 챈 용 환관이 유근 앞에 부복했다.
"혹시 선부께서 마지막으로 출행한 곳이 어딘지 아는가?"
마음이 급한 유근이 안부도 생략하고 질문을 퍼부었다.
"대백산에 가서 조상을 기릴 것이라고 하셨는데, 실제로 갔는지는 모릅니다."
용 환관이 대백산을 언급하자 유근의 속이 희열로 끓어올랐다.
"물건이 대백산에 있을 가능성은?"
건물과 담벼락을 허물고 땅도 일 장 깊이로 팠는데 나온 게 없다. 게다가 갑자기 나타난 흰옷을 입은 괴인.
그자가 불로장생의 비법을 들고 사라진 게 아닌지 내내 마음에 걸렸던 탓에 유근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매우 큽니다."
"그랬군."
원하고 원하던 대답을 결국 들은 유근이 날듯이 기뻐했다.
반신반의하는 황태후를 어렵게 설득했고, 불로장생에 흥미를 전혀 못 느끼는 황제한테 모용가에 신선술에 관한 책자가 있다고 호언장담하며 겨우 윤허를 얻어냈다.
그렇게 출행해서 모용가를 뒤집었는데도 아무런 성과가 없어서 이제 이대로 죽는 건가 싶었는데, 절망 속에서 작은 희망을 보았다.
'아직 가망이 있다.'
유근은 애써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흰옷이 가져갔을 가능성을 외면했다.
"경께 같이 대백산에 가서 공을 세울 기회를 주고 싶은데, 받아들일 텐가?"
"태감의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땅문서를 훔쳐 판 걸 들킨 게 아닌지 걱정되어 잔뜩 긴장했던 용 환관이 몰래 안도의 숨을 토해냈다.
- 작가의말
다들 제사보단 잿밥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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