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돌기風雲突起
대백산은 땅 대부분이 돌로 됐고, 흙으로 덮인 곳이 매우 적었다. 강성해진 선비족은 더 좋은 땅을 원했고, 고구려의 영토를 욕심냈다.
그러나 고구려와 벌인 오랜 전쟁에서 결국 밀린 선비족은 부득이하게 중원으로 눈을 돌렸고, 그게 오히려 호재였다.
세상 넓은 줄 모를 때야 고구려가 차지한 사냥감 많은 산과 숲 그리고 비옥한 땅이 욕심났지만, 중원은 땅이 비옥할 뿐만 아니라 농법이 발달해 홍수나 가뭄에 영향을 덜 받았다.
그렇게 한 번 떠난 선비족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선비족의 고분들만 쓸쓸히 대백산 정상을 지켰다.
그래선지 대백산은 오랜만에 나타난 손님의 기척엔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은 채 그저 구슬피 우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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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백산 정상은 여름만 빼면 늘 흰 눈으로 소복 단장했다.
선비족이 대백산 정상에 돌무덤을 만들기로 한 건 이러한 추위 때문이었다. 죽은 자의 시체가 느리게 부패해 마치 언젠간 살아서 돌아올 듯한 희망을 주니까.
이러한 이유로, 고귀한 자의 무덤일수록 정상에 가까웠다.
"이 많은 고분을 일일이 수색해야 한단 말이오?"
어렵게 오른 대백산 정상에서 유근이 칭얼거렸다.
유근은 여섯 살 어린 나이에 유순의 양자가 되어 황궁에 발을 들였고, 황제의 총애를 듬뿍 받던 유순의 후광으로 어린 나이부터 고생이란 걸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선지 가끔은 이렇게 어린애 같은 면모를 보이곤 했다.
"선비족은 여덟 개 큰 부족이 있습니다. 부족마다 쓰는 문양이 다른데, 그거로 구분하면 됩니다. 그리고 모용가의 전대 가주가 근래에 찾은 적 있다고 하니 뭐든 흔적을 남기지 않았겠습니까."
우문강현이 능숙하게 유근을 달랬다.
모용용과 비밀스러운 대화를 할 때도 남겼던 걸 보면 유근이 우문강현을 얼마나 신임하는지 알 수 있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웬만한 수준을 훌쩍 넘는 유능함 때문이었다.
그저 아부만 일삼고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자들과 달리, 우문강현은 능력이 매우 출중했다.
"돌아가는 대로 폐하께 말씀드려 우문 천호의 공을 제대로 치하하겠소."
잠깐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리긴 했지만, 유근은 필경 유근이었다.
아수라장 같은 황궁 생활에 다져진 화술로 자신이 살아 돌아가는 쪽이 우문강현에게 이득임을 은근슬쩍 강조했다.
"감사합니다."
가문의 영광이라느니 은혜가 각골난망이라느니 호들갑을 떠는 대부분 사람과 다른 우문강현의 이러한 담백함도 유근이 좋아하는 부분이었다.
고기도 매일 먹으면 질리듯이, 감언이설을 하도 듣다 보니 이런 담백한 반응이 오히려 마음에 쏙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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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들어갔던 무덤에서 나올 때, 유근은 딱 봐도 낡았으나 귀해 보이는 나무 함을 품에 안고 굴로 돌아가는 쥐새끼처럼 두리번거렸고, 흑갑호위 둘도 잔뜩 곤두선 모습이었다.
우문강현 역시 수춘도를 뽑아 손에 든 채 계속 긴장을 유지했다.
여전히 양손을 뒤로 묶인 모용용은 근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근처에 매복해 기회를 엿보던 일행은 우연히 먼 곳에서 꾸물거리는 까만 점 여덟 개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흑갑호위들이 따라온 모양인데, 두 무리가 합치기 전에 유근을 해치우지 못하면 두고두고 귀찮아질 게 분명했기에 일행은 모여서 간단한 계획을 짰다.
원경과 구후영이 큼직한 바위를 던져 흑갑호위의 주의를 끄는 동시에 단아가 몸에 지닌 암기를 모조리 유근에게 쏟아붓는 꽤 허술한 계획이었다.
유근이 황제가 하사한 연갑軟鉀을 입어 웬만한 암기가 통하지 않음을 알지만, 약하긴 해도 당장 구할 수 있는 독들을 최대한 바른 암기가 얼굴이나 손을 맞추는 요행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행이 행동을 개시하기도 전에 시커먼 장포로 몸을 둘둘 감싼 거한이 불쑥 나타나 유근을 덮쳤다.
"저기!"
습격자의 출현에 제일 먼저 반응한 건 우문강현이었다. 흑갑호위 둘은 우문강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무작정 암기를 발사했다.
"어허."
거한은 흑갑호위의 대단함을 전혀 몰랐는지 갑자기 쏟아진 십수 개의 암기에 허둥지둥거렸고, 그럼에도 대부분 암기를 쳐냈으나 결국 왼팔에 날이 시퍼렇게 물든 표창이 박히고 말았다.
"제길."
천근추를 펼쳐 급히 바닥에 내려선 사내가 바로 움직였다.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새로 쏘아낸 암기를 피하는 동시에 왼팔에 박힌 표창을 뽑고 점혈로 독이 퍼지는 걸 막는 모습에 구후영 일행은 물론이고 우문강현과 모용용마저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수지가 안 맞아."
작게 투덜댄 사내가 다시 몸을 허공에 띄웠다.
흑갑호위가 대단한 암기를 발사하는 모습을 보고서도 발을 땅에서 떼는 멍청한 행위에 다들 의문이 깊어가는 순간.
사내가 허공에서 놀라운 움직임을 보였다.
칭칭 감은 두꺼운 검은 장포가 날개라도 된다는 듯이, 사내의 몸이 허공에서 아홉 번의 변화를 보이며 흑갑호위가 발사한 암기를 모조리 피했다.
'흑철?'
'운룡대구식?'
원경은 갑자기 나타난 상대의 정체를 알아챘고, 구후영은 흑철이 펼친 경공의 정체를 추측했다.
'저자가 왜 여기 나타났지?'
'운룡대구식은 실전됐다고 들었는데.'
흑철이 펼친 것은 사실 운룡대구식이 아니었다.
진정한 운룡대구식은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방향을 바꾸는 경공이다. 흑철의 것은 땅을 박찰 때 이미 모든 변화가 정해진, 몸에 걸친 검은 장포의 도움을 받은 반쪽짜리라고 부르기도 미안한 꼼수였다.
물론, 꼼수라고 해도 펼치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 결과가 달랐다.
흑갑호위의 암기를 모조리 피한 흑철은 바로 천근추로 바닥에 내려온 다음 유근을 향해 돌진했다.
암기를 모두 소모한 흑갑호위는 흑갑의 단단함을 믿고 유근의 앞을 막아섰다.
그게 패착이었다.
흑철이 흑갑호위를 몰라 암기에 당했던 것처럼, 흑철을 모른 흑갑호위는 흑사장黑砂掌에 맞고 칠공으로 피를 토하며 즉사했다.
"탐나는 갑옷이군."
움푹 꺼진 흑갑을 보며 흑철이 입맛을 다셨다.
꽤 비싸 보이는 놈인데 자신의 흑사장에 맞아 금이 갔다. 상체 갑옷이 제일 비싼데 하필 그걸 망가뜨린 자신이 더없이 원망스러웠다.
"누, 누구시오."
"나? 흑면수."
강호의 무리인 종남칠검도 자신의 이름에 바로 반응하지 못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흑철은 대신 별호를 꺼냈다.
"마, 마교의 마귀."
"어허, 사람 섭섭하게 면전에서 마귀라니."
말을 마친 흑철이 유근의 허리띠를 잡고 모용용을 향해 걸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구후영은 흑철의 어마어마한 팔심보다 이 상황에도 상자를 가슴에 꼭 품고 놓지 않는 유근에게 더 감탄했다.
"난 뭐요?"
흑철의 기세에 압도당한 모용용이 억울한 얼굴로 질문했다.
"인질."
짧게 대답한 흑철이 모용용의 허리띠를 잡았다.
'고수다.'
모용용이라고 마교 이인자로 유명한 흑면수의 명성을 모르진 않았다. 그러나 명성은 명성일 뿐, 허리띠를 잡는 짧은 순간에 십수 개 혈도가 짚이자 비로소 제대로 놀랐다.
"산자락에 검은 바위가 가득한 골짜기에서 기다릴 테니, 천천히 오셔도 좋소."
말을 마친 흑철이 경공을 펼쳐 사라졌다.
건장한 성인 사내 두 명, 그중 최근 살이 꽤 빠졌다곤 하나 여전히 비대한 유근도 있는데 흑철의 움직임은 구후영 못지않게 빠르고 가벼웠다.
'나한테 한 얘긴가?'
홀로 남은 우문강현이 잠깐 고민하고 고개를 저었다.
'이매망량이 한 무리가 아니었던 거겠지.'
생각이 여기에 미친 우문강현이 오감을 끌어올렸으나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우문강현보다 약한 야효와 양달은 멀리서 소란을 피워 주의를 끄는 역할을 맡았고, 가까이 있는 넷 중엔 우문강현보다 못한 사람이 없었다.
'여긴 포기해야 하나.'
비록 팔에 독 묻은 암기를 맞았지만, 흑면수는 흑갑호위 둘을 가볍게 해치웠다.
그런 자의 손에서 비록 가짜라고는 하나 내용만 보면 진짜인 책자를 되찾는 건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얼마나 더 있는지 모를 이매망량도 걱정이다.
이매망량끼리 서로 적대하는 사이 같으니 자기들끼리 상잔하는 과정에 기회를 봐서 상자를 탈취하는 궁여지책이 있지만, 말 그대로 궁여지책이다.
음지에 숨어서 기회를 엿봐도 가망이 거의 없는데, 현재 빤한 곳에 있는 건 우문강현이다.
'괜히 어렵게 했더니 이런 탈이 나는구나.'
가장 쉬운 방법은 용 환관이 책자 세 개를 들고 가서 유근한테 바치는 거였다.
세 책자 중 하나는 진품이고, 불로장생에 관한 처방 역시 안물이 봐도 가짜임을 구분하기 어려운 대단한 수준이다.
그러나 쉬운 길은 오래 가지 못한다.
하늘에서 금덩이가 뚝 떨어졌다고 그저 좋아하는 건 멍청한 자들이다.
굳이 황태후나 황후까지 갈 것도 없이, 유근부터 무슨 음모가 있는 게 아닌지 있는 의심 없는 의심 다 할 것이다.
그래서 용 환관이 세가에 갖는 원한을 이용했다. 유근 정도면 간단한 조사로도 용 환관의 신분이나 입궁 경위를 알아낼 수 있기에 마침 좋았다.
과연.
모용세가를 치자고 주장하다가 실패한 용 환관이 불로장생의 비약에 쓰이는 약초가 적힌 책자를 들고 찾아갔을 때 유근은 속아 넘어갔다.
처음부터 내놨으면 의심을 받았을 텐데, 뜬금없이 모용세가를 치자고 하다가 거절당한 후 꺼내니 일절 의심이 없었다.
유근으로선 믿고 싶은 혹은 믿어야 하는 이유가 따로 있겠지만, 어쨌든 시작은 성공했다.
남은 건 유근이 모용세가로 쳐들어가고, 진짜 아는 게 없는 모용용은 모른다고 버티고, 그런 와중에 세가를 수색해서 두 책자를 유근이 손에 넣는 게 이 계획의 마무리였다.
하늘도 속일 엄청나게 교묘한 계획은 아니지만, 용 환관이 뜬금없이 책자를 바치며 불로장생의 비법이라고 우기는 것보단 개연성이 넘쳤고 설득력도 있었다.
물론, 유근은 누군가의 손에 죽을 예정이었고, 아무의 손에도 죽지 않을 때는 우문강현이 직접 손 쓰는 게 진정한 마무리였다.
그런데 모용가의 반발이 예상보다 거셌고, 매수한 자가 암기에 맞아 즉사했다. 일을 꾸민 제 선생이 우문강현한테도 책자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기에 무작정 수색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건물을 헌 것도 모자라 땅까지 뒤집고도 모용가에 숨겨둔 두 책자를 찾아내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계획을 변경해 새로 만든 책자를 대백산의 고분에 숨겼고, 책자를 찾아내 공을 세우는 건 용 환관의 몫으로 했다. 그런데 우문강현이 깜빡 잠든 사이에 모용용이 용 환관을 죽였다.
우문강현은 모용용의 죄를 까밝히지 못했다.
죽인 건 모용용이지만, 유근이라면 감시의 직책을 다하지 못한 자신마저 해코지할지도 모르는 탓이었다.
그저 흐지부지 이매망량의 짓으로 몰아가는 게 우문강현에겐 최선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대백산에 도착했고, 이제 끝인가 싶을 때 뜬금없이 나타난 흑면수가 산통을 깼다.
'마지막 계획은 죽은 모용건한테 너무나도 미안한데.'
혹시나 해서 세운 마지막 계획을 떠올리니 어릴 적 친우였던 모용건을 볼 낯이 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산 사람 목숨이 중하지.'
너무 위험해진 상황에 우문강현은 두 번째 계획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 작가의말
다음 편에 흑철의 어두운(?) 과거가 밝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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