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계취계將計就計
기척을 들은 위종이 이마를 찌푸렸다.
계획이 거듭 방해받은 상황에도 어찌어찌 여기까지 어렵게 온 위종으로선 새로운 변수의 출현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저 이대로 시간이 흘러 팽창회가 지친 틈에 천강구절을 한 줌 가루로 바꾸면 모든 게 끝인 상황에선 더욱더.
반면 팽창회는 얼굴이 밝아졌다.
백날 도둑질은 쉬워도 그 도둑을 백날 막는 건 어려운 법이다. 더구나 팽창회의 무공은 지키기보다 공격에 훨씬 치우쳤다.
이대로는 둘 중 하나를 버려야 하는데, 그러한 갈등을 전혀 겪고 싶지 않았다.
변수의 등장이 무조건 반갑다.
구후영 일행은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결과가 뻔히 보이기에 혈포규찰대 대주로 보이는 자의 출현이 일견 반갑지만, 규찰대주의 출현이 지금 사태를 어디로 끌어갈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 규찰대주가 구멍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생각했던 광경이 아니었는지 규찰대주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렀다. 그러나 자신과 상관없다고 판단했는지 곧장 눈길을 돌려 침상에 누운 천마를 향해 외쳤다.
"속하 교주의 지시를 이행했습니다. 그만 약속을 지켜주십시오."
뜬금없는 말에 다들 의아해하던 그때.
"역시."
시원하고 청아한 미성이 지친 사람들의 귀에 울렸다.
"오래 살았다고 신이 되는 건 아니었어."
규찰대주를 주시하던 일행이 시선을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돌렸다.
검은 비단으로 만든 장포를 입은 천마가 조금은 불편한 몸짓으로 몸을 일으키며 수정벽 밖의 일행을 향해 시선을 줬다.
"나는 초무선楚無善이라고 하네. 얼굴은 젊어 보이나."
상체를 일으킨 천마가 남자도 반할 만한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사실상 천 살이 넘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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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규찰대주가 격동한 얼굴로 약속이란 단어만 반복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을 기억하는가? 그곳에 가서 찾으라."
천마의 말이 끝나자마자 규찰대주가 경공을 펼쳐 사라졌다.
"내가 따라가지."
풍불지가 경공을 펼쳐 규찰대주를 따라 사라졌다.
"이번엔 그대와 한 약속을 지킬 차례군."
주먹을 쥐었다 펴며 몸을 점검한 천마가 팽창회를 향해 입을 열었다.
"거기서 두 걸음 오른쪽으로."
팽창회가 고분고분 오른쪽으로 두 걸음 옮겼다. 그에 천마가 손뼉을 짝 쳤다.
바닥이 푹 꺼지며 팽창회의 신형이 사라졌다. 팽창회 정도면 제때 반응해 함정을 피할 법도 한데, 전혀 그럴 뜻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깼지?"
위종이 표정을 수습하고 짐짓 태연한 말투로 질문했다.
"모르지 않을 텐데? 그것 때문에 저들과 동행한 거 아닌가?"
대답 아닌 대답을 마친 천마가 손을 휙 저었다. 그에 따라 어느새 나타난 귀검 하나가 팽씨 조상의 몸에 박혔다.
귀검이 산 뱀처럼 꿈틀거리며 심장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고 잠시 후, 팽창회가 힘들게 지켜왔던 팽씨 조상의 몸이 가루로 변했다.
"내 그물에 큰 구멍이 두 개나 있었군."
물끄러미 팽씨 조상이 가루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던 위종이 입을 뗐다. 아무래도 짧은 순간에 자신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깨달은 듯했다.
"초 형. 도대체 뭔 소리요?"
둘의 수수께끼 놀이에 짜증이 난 악불형이 외쳤다.
"초무선!"
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팽창회가 악불형의 질문을 그대로 묻어버렸다.
"약속이랑 다르잖아!"
바닥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팽창회의 손엔 두 권의 책자가 들려 있었다.
"오호단문도의 정확한 기본 초식과 그에 꼭 알맞은 심법을 준다. 이게 우리 약속 아니던가?"
"우리 조상님을 살려주기로 했잖아!"
팽창회가 살짝 충혈된 눈으로 고함을 질렀다.
"아니지. 난 그저 그대 조상이 기본 초식을 알고 있고 깨울 수 있다고 했지. 그대 조상을 깨워서 기본 초식을 알려준다곤 하지 않았는데?"
"난 이래서 강호가 싫어."
위종이 불쾌함이 가득한 얼굴로 천마와 팽창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무리 치밀한 계획을 짜도 누군가가 방해하고, 어찌어찌 끌고 와도 결국엔 힘으로 승패가 갈리잖아."
고개를 젖혀 크게 탄식한 위종이 신형을 날려 천마를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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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 형. 이게 무슨 일인지 좀 얘기해 주시오."
천마와 위종의 싸움은 솔직히 볼 것이 없었다. 깊은 내공과 다양한 초식. 그게 다였다.
이미 초식의 한계를 벗어난 사대신협으로선 보나 마나인 대결이었다.
물론, 구후영을 비롯한 몇몇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동작 하나 안 놓치려 애썼다.
뭔가 조금씩 애매했던 연 선생과 달리 위종과 천마의 초식은 깊이가 달랐다. 그저 정확한 게 아니라 초식을 일정 수준까지 이해하고 펼치는 느낌이 역력했다.
"어디까지 알고 왔는데?"
팽창회가 되물었다. 그에 홍기영이 진시황과 서불 그리고 삼천 동남동녀의 이야기에 관해 아는 바를 모두 털어놓았다.
"나도 초무선한테 들은 얘기라 진실이라고 장담할 순 없다. 그러니 감안하고 들어라."
팽창회는 생각을 정리한 후 신중하게 입을 뗐다.
"의봉군체술로 왕이 되려 한 자는 진시황이 아니라 서불이다. 칠살문을 부활한 건 진시황이고."
"진짜?"
"서불이라는 작자 힘으론 이런 곳을 만들 수 없었을 텐데."
장성을 쌓거나 운하를 파거나 산 가운데 길을 내거나 하는 큰 사업은 모두 어떤 황제의 업적으로 기록된다.
그만큼 막대한 인력과 재물과 시간이 드는 일이라는 뜻이다.
서불의 재주가 아무리 하늘에 닿았다고 해도 이 지하궁전을 건설할 능력은 안 된다.
"이건 상고시대의 유물이다. 서불이 만든 것도 진시황이 만든 것도 아니야."
대결을 면밀히 주시하던 구후영이 귀를 쫑긋 세웠다.
"서불이 의봉군체술로 진시황을 설득했다. 대외적으로 동해의 봉래도에 가서 장생불로의 약을 구한다고 하고 실제론 북쪽으로 움직였지. 어딘지 모를 곳에서 공청석유로 삼천 명의 동남동녀를 모두 불사의 몸으로 만들고 이곳으로 옮겼다."
"어떻게?"
"어떻게는 무슨. 백 명 정도 재운 다음 남은 이천구백 명이 옮기고, 다시 돌아가서 백 명 정도 재우고."
"그리고?"
"준비를 마친 서불은 자신이 왕이 되려 했다. 초무선의 말에 따르면 서불은 진짜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 아닌지 싶을 정도로 대단한 재주가 많았다고 한다."
"서불은 왜 장생불로하려 했나요?"
무공에 뜻이 없는 귀연이 대결에서 눈을 떼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래 살려고?"
"신선과 비견할 정도의 재주를 지녔다면서요?"
"신선은 아니었나 보지."
"됐고. 계속 얘기해 봐."
홍기영의 재촉에 팽창회는 하던 이야기로 돌아갔다.
"의봉군체술은 서불이 직접 만든 거다. 본인은 완벽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실제론 어딘가 문제가 있었어. 의봉군체술은 실패했고 서불은 죽었다."
"서불이 죽은 건 어떻게 알아요?"
"서불의 제자들이 남긴 기록에 있어. 의봉군체술을 실패하자 서불의 몸에서 하얀 기운이 끊임없이 배출됐고, 결국 뼈도 살도 다 사라지고 가죽만 남았다고 적혔어."
그에 귀연이 손뼉을 짝 쳤다.
"사부도 귀허歸虛할 때 칠공에서 하얀 안개가 나왔어요."
"그거 왜 그런 건데?"
가짜였다가 진짜 도사가 된 청빈이 돌아서며 물었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론 이 대결은 태극권을 익힌 청빈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한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몸이 아무리 건강해도 오장육부는 젊을 때만 못해요. 경지가 높은 도사나 스님은 자연의 기운으로 오장육부의 기능을 대체해요. 소림의 공유 스님도 죽을 때가 되었는데 기운으로 오장육부를 대체해서 목숨을 연장했다고 들었어요."
그에 원경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유가 부처의 가르침을 거스르면서까지 목숨을 잡고 있었던 건 원경에 대한 걱정 탓이었다.
"삼풍 진인도 마찬가지고요. 원래보다 십 년 정도 더 살았다고 해요."
장삼풍은 정학한테 자신의 태극권을 전부 물려주고서야 세상을 떠났다.
"허!"
사대신협은 중원 제일의 고수 자리를 두고 다투는 무림의 거목들이다. 그러나 귀연이 말한 내용들은 상상조차 한 적 없는 신비의 영역이었다.
"서불이 약속한 날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자 진시황은 심복을 보냈다. 그런데 여긴 서불이 진시황한테도 비밀로 했던 곳이어서 심복이 찾지 못한 거야.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깨달은 진시황이 칠살연맹을 부활했다. 거기서 진시황한테 매수된 자들이 가짜 정보를 퍼뜨려 칠살문이 서불과 삼천 동남동녀가 있는 곳을 찾게 했다."
"칠살연맹은 진시황을 죽이려 했던 자들인데, 왜 굳이 이들에게 맡겼지?"
풍불지가 질문했다.
"이사나 조고 모두 진시황이 장생불로하는 걸 싫어했다. 진시황이 부리는 사람 중에 이 둘의 이목이 없다고 장담하기 어려우니 절대 둘과 연결이 없을 칠살연맹을 이용하기로 한 거지."
대결을 주시하며 귀만 이쪽으로 열어둔 구후영이 속으로 깊이 감탄했다.
자신을 죽이려 했고 실제로 가슴에 상처까지 남긴 적을 이용하려고 한 배포와 심계는 정말로 대단했다. 특히 부활한 칠살연맹이 몇 번이나 진시황을 죽음으로 몰았던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모든 걸 건 결단이 아닐 수 없었다.
"칠살문 그것들도 참 불쌍하네. 자신들이 죽이려던 자한테 대를 이어 농락당한 거잖아."
"왕을 다 죽이면 전쟁이 멈출 거라고 생각한 것에서 얼마나 멍청한 놈들인지 설명이 끝난 거 아니야?"
'지금이야 그렇지만, 당시 사람들 수준을 생각하면 딱히 멍청한 것도 아니야.'
지나고 보면 다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현명한 사람도 사건 속에 몸을 담고 물살에 휘말릴 때는 시야가 좁아진다.
"아주 중요한 정보가 남았는데, 초무선이 마지막으로 깨는 사람이라고 한다. 초무선 이후론 아무도 깨지 못할 거래."
"왜요?"
귀연이 눈을 반짝이며 질문했다. 그에 팽창회가 머리를 긁적였다.
"굳이 궁금하지 않아서 이유는 안 물어봤어."
말을 마친 팽창회는 고개를 살짝 돌려 '왜 그게 안 궁금했지'라며 추궁하는 귀연의 순진무구한 눈빛을 회피했다.
"중요한 건 초무선을 마지막으로 이들도 끝이라는 거지. 여기서 초무선은 대담한 추론을 했다."
"어떤 추론이요?"
"서불의 후손 중 누군가가 뭔가 할지도 모른다는 추론을."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갑자기 추론한 건 아니야. 그러한 기미를 발견했거든."
"뭔데요?"
"초무선의 사형이 살해당하면서 단서를 남겼어."
천마한테 사형이 있었다고?
다들 놀란 가운데 팽창회가 말을 이었다.
"이들은 서로 생각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야. 가장 처음 기억을 물려받은 건 삼국 시절의 초선이었다. 초무선의 말에 따르면 장안에 도착하고 갑자기 동방삭을 비롯한 선대의 기억이 머리에 밀려 들어왔다고 해. 굳이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한 것도 한나라 황실을 지키려는 선대들의 의지 때문이라고 했어."
소위 선대로 불린 자들은 쭉 한나라의 신하였다.
"잠깐. 초선은 어떻게 여기서 서안까지 혼자 힘으로 간 건가요?"
초선은 대단한 고수가 아니었다. 칠살문의 기록에도 분명히 현월궁 궁주가 배월교에 처음으로 무공을 전했다고 적었다.
"서불의 제자들이 대를 이어 여길 지켰었대. 소생자들은 서불의 기억 일부를 갖고 있거든."
- 작가의말
장계취계 - 상대의 계책을 파악한 다음 거기에 업혀 가는 걸 말합니다. 적벽대전 때 조조가 첩자를 파견하자 주유는 조조 수하 장수의 귀순 편지를 가짜로 만들어 보여줬죠. 그 탓에 의심이 많은 조조는 수군을 훈련하던 장수 두 명을 죽였고, 결국엔 적벽대전의 패배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선 천마가 위종의 계책을 어느 정도 간파하고 역이용함을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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