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검장소拂劍長嘯
장사분壯士憤 웅풍생雄風生
장사의 분노에 거센 바람이 이네.
안득의천검安得依天劍
어찌하면 하늘에 닿는 검을 얻어,
과해참장경跨海斬長鯨
바다 너머 큰 고래를 벨까.
"어서 막아라."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는 주관적인 판단과 달리, 투멘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다행히 가까운 자들만 들어서 사기를 떨구는 일은 없었다.
"이야!"
딱히 의미가 담긴 게 아닌 기합과 함께 그새 말머리를 돌린 일단의 무리가 구후영을 덮쳤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기 싫어 경공으로 피했던 구후영이지만, 화살 공격에 다칠 뻔했던 걸 떠올리며 이번엔 검을 휘둘러 맞섰다.
퍽!
딱히 큰 소리도 아니었고, 말 두 필과 사람 하나가 총 여섯 조각으로 분리되는 장면과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다.
그러나 바라보는 누구도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짧은 기간이지만, 구후영은 뭘 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으로 각인됐다.
'제길.'
정작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한 구후영은 마음이 착잡했다.
말이야 짐승이니 그렇다고 쳐도, 사람 하나 죽였는데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제길!'
자신이 어느새 강호에 물들어 다신 돌아올 수 없는 길에 올랐음을 깨달은 구후영은 분노가 치밀었다.
자기 뿌리를 찾고 낙화문을 부흥하는 목표도 분명히 있었지만, 구후영이 진정으로 원한 건 상안무사相安無事(서로 다툼없이 화목하게)하고 유유자적悠悠自適(조용하고 편하게)한 삶이었다.
그러나 원치 않게 온갖 일에 휘말리며 어느새 사람을 죽이고도 눈꺼풀조차 떨지 않는 냉혹한이 되었다.
'내가 뭘 어떻게 잘못했길래.'
다행히 거센 분노도 구후영의 이성을 잠식하진 못했다.
구후영은 홧김에 경공을 펼쳐 위험을 자초하는 실수 없이 차분하게 전진했다.
#
수백 필의 말과 수백 명의 사람이 흘린 피가 초원의 파란 생기를 빨간 죽음으로 물들였다.
"어쩔 셈이지?"
목소리가 거세게 떨리고 발음도 엄청나게 부정확했지만, 구후영은 투멘의 말을 알아들었다.
"누가 시킨 짓이지?"
셋 중 하나라곤 하나 북원의 황제다. 굳이 따지면 명나라 황제에 미치진 못하나 황태자 정도는 되는 자다.
그러나 구후영의 말투엔 일말의 경외심도 없었다.
"내가 말할 것 같으냐?"
구후영이 대화를 받아주자 투멘이 조금 안정을 찾았다.
"얘기 안 하면."
구후영이 담담한 말투로 선고했다.
"죽인다."
조금씩 멈춰가던 떨림이 다시금 심해졌다.
몸에 피 한 방울 안 묻은 눈앞의 점잖게 생긴 청년이 불과 반 각 동안에 수백의 기마병에 수십의 친위대까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죽였음이 떠오른 것이었다.
"널 노리는 게 누군지 말해줄 사람은 나밖에 없어."
투멘이 양손으로 가슴을 꾹 누른 채 한 글자씩 뱉어 말했다.
"그러니 먼저 날 살려준다고 약속해."
구후영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구후영의 옷자락을 세차게 흔들며 한결 위압감 있는 모습이 되었다.
"약 한 달 전에 여진의 부족 하나를 만났다. 재물이 부족해 현월궁의 약을 얻지 못한 탓에 팔십 명 정도 아이가 죽을 위기였지."
다시 고개를 내린 구후영이 투멘과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내 일도 팽개치고 아이들을 치료했고, 고독을 없앨 처방을 만들었다. 여진 부족은 내 뜻에 따라 저곳에서 약 처방을 모든 사람에게 공개했다."
투멘은 구후영이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은혜를 갚길 바라고 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내 선행 때문에 일이 일그러지기 시작했고, 선행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됐으며, 선행 때문에 결국 이렇게 됐다."
여기까지 말한 구후영이 탄식했다.
"나는 분명히 옳은 일만 하고 바른 일만 한 거 같은데, 왜 이렇게 됐지? 주제넘게 선행을 베푼 내가 잘못한 걸까? 아니면 은혜를 원수로 갚는 너희가 잘못한 걸까? 아니면."
은혜를 원수로 갚도록 한 세상이 잘못된 걸까.
투멘은 대답을 몰랐고, 구후영 역시 답을 바라고 질문을 던진 게 아니었다.
"그러니 너도 억울하지 않겠지. 여기서 내 손에 죽는다고 해도. 세상이 원래 이런 거니까."
"배후가 누군지."
"굳이 알고 싶은 생각이 없다."
구후영의 말에 투멘은 뒷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너만 안다며? 그럼 너만 죽이면 배후와 이들의 연결이 끊기는 거잖아. 너만 죽으면 더 이상 누구도 나를 노리지 않겠지."
식량을 줄 사람이 사라지면 초원 부족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구후영을 공격할 이유가 없다.
투멘이 진정한 배후를 알 리가 없기도 하고.
"어!"
가볍게 휘두른 구후영의 검에 투멘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자 전전긍긍하며 멀찍이 지켜보던 자들이 답답한 소리를 냈다.
우우웅.
투멘을 죽인 구후영이 왼손으로 검을 쓰다듬으며 용이 울고 봉황이 지저귀는 듯한 소리를 냈다.
기쁜 듯 기쁘지 않고 슬픈 듯 슬프지 않은 잔잔한 울림은 겁에 질려 몰래 도주하던 자들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나는 구후영이다."
죽은 자들을 잠깐 기린 구후영이 초원의 말을 뱉었다.
어릴 때 몇 달 초원의 부족에 잡혀 생활한 덕분에 발음이 꽤 정확했다.
"초원에선 힘이 법이고 힘이 질서라고 안다. 그러니 이제부터 내 말이 법이고 내 의지가 질서다."
예상도 못 한 놀라운 결과에 이은 놀라운 선언.
일부 도주했어도 여전히 만 오천이 훌쩍 넘는 무리 중 아무도 반발하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일은 잊겠다. 그러나 지금부터 내게 화살을 날리고 칼을 겨누는 부족은 세상 끝까지 쫓아가 여자와 아이를 빼고 모두 죽일 것을 '영원한 하늘'께 맹세한다."
영원한 하늘은 북원이 떠받드는 최고의 신이다.
"이만 떠나라."
말을 마친 구후영이 다시 기쁜 듯 슬픈 휘파람 같은 소리를 냈다. 그에 서로 눈치를 보던 자들이 부족끼리 뭉쳐 사방으로 흩어졌다.
#
"이제 어쩔 계획이냐?"
장선이 질문했다. 내내 일행을 이끌던 단아가 혼수상태에 빠진 지금,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구후영에게 몰렸다.
"족장은 소문을 내주시오."
"분부하십시오."
구후영이 대군을 뚫고 투멘의 목을 치는 장면을 눈으로 본 후 족장은 원래보다 몇 배는 더 공손해졌다.
"투멘이 은혜를 모르고 처방을 내려준 사람을 죽이려다가 천벌을 당했다고 하시오."
"네?"
족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던 자들이 진실을 얘기하겠지. 그러나 믿는 자가 많지 않을 거고, 시간이 흐르면 본인들조차 다른 말을 할 거요. 대신 천벌을 받았다고 하면 다들 쉽게 받아들이고 쉽게 잊지 않을 거요."
구후영의 말에 족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견이십니다."
"양 호위는 말을 탈 수 있소?"
양달은 원래 고개를 끄덕이려 했으나 사내다운 척할 때가 아님을 떠올리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탈 수는 있는데 방주께 방해만 될 것 같습니다."
그저 말을 타는 건 괜찮으나 빠르게 달리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럼 양 호위는 여기 족장과 함께 가서 이 약초들을 구하시오."
구후영이 품에서 오각 영지와 삼십 년근 고려삼을 그린 종이를 꺼냈다.
"형님의 모친은 물론이고 내 할머니도 쓸 약이니 최대한 많이 구하시오. 돈은 흑철의 몸에서 나온 거로 충분한 거 같소."
흑철의 돈은 물론이고 단아가 줬던 천 냥짜리 전표도 있다. 게다가 관동에서 사는 거기에 가격이 훨씬 싸다.
아마 관동에 있는 약재를 다 사도 돈이 모자라진 않을 거다.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모용 소저는 어찌할 생각이오?"
"원경 대협이 무사한 모습을 제 눈으로 봐야 시름을 놓겠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지. 내가 단 소저를 안고 말을 탈 거요. 원경 형님은 우호법한테 부탁하겠소. 모용 소저는 최대한 많은 말을 끌고 우리 뒤를 따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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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후영과 야효가 단아와 원경을 품에 안고 말에 탔다.
장선과 모용연은 각자 말고삐 세 개씩 끌고 뒤를 따랐다. 말을 타는 게 익숙지 않은 것도 있고, 뒤의 말들이 고분고분 따라오는 게 아니어서 사람 둘씩 태운 앞의 말들보다 훨씬 느렸다.
족장과 양달은 일행이 사라질 때까지 눈으로 배웅했다.
"양 대협, 저쪽으로 이틀 정도 가면 강이 나옵니다. 거기서 배를 얻어 타면 우리 부족에 바로 도착할 겁니다."
"족장만 믿겠소."
다리를 다친 양달 때문에 둘은 말을 천천히 걷게 했다.
그렇게 남쪽으로 움직이던 중.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족장이 말머리를 돌렸다.
'뭐 하는 거지?'
양달에게 기다리라 하고 떠난 족장은 투멘의 주검이 있는 곳으로 가서 장대에 걸린 깃발 몇 개를 풀어서 챙겼다.
그리고 개중 하나로 투멘의 머리를 꽁꽁 싸서 말 안장에 매단 다음 양달에게 돌아갔다.
"왜 그러는 거요?"
양달이 질문했다.
"관동엔 헛소문이 참 많습니다."
족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어떤 부족이 있는데, 족장이 죽고 이 년 뒤에 족장 부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족장 아들이랍니다. 부인이 이 년 동안 임신하고 있다가 어렵게 출산했다는 겁니다."
"바람피웠군."
아내와 마근을 떠올린 양달이 헛웃음을 지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걸 믿었다는 겁니다."
"믿는다고?"
"당시에는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커서 족장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자 또 대부분 사람이 안 믿기로 했습니다. 누구 씨인지도 모르는 놈을 덜컥 족장 자리에 앉힐 수는 없으니까요."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오?"
"결국 사람은 믿고 싶은 걸 믿고 믿기 싫은 건 안 믿습니다. 똑같은 일도 믿고 싶을 땐 믿고 믿기 싫을 때는 안 믿잖습니까. 이번 일도 그렇습니다. 놈들의 박해를 받아온 부족들은 믿으려 할 거고, 무관한 자들도 믿으려 할 겁니다. 그러나 안 믿는 게 자신들께 유리한 상황이 되면 그땐 아무도 안 믿으려 할 겁니다."
'생각보다 똑똑한 자구나.'
"그래서 증거를 챙기는 겁니다. 투멘의 머리와 투멘의 깃발을 증거로 제가 들고 있으면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안 믿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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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아, 서두르지 말아라."
출발할 때 일행은 총 열 필의 말이 있었다. 그러나 엿새가 지난 지금 고작 여섯 필이 남았다.
낮엔 말을 타고 움직였고, 밤엔 말을 끌고 움직였다. 아예 안 쉰 건 아니지만, 오직 구후영만 버틸 수 있을 정도의 강행군이었다.
그 탓에 말 네 필이 발목을 접질려 버려졌다. 원래는 구덩이에 빠지더라도 발목 힘으로 버텼던 건데, 제대로 먹고 쉬지 못한 탓에 그러지 못했다.
"열이 너무 심합니다."
원경은 똑같았다. 그러나 단아는 고열로 손발까지 뜨거웠다.
쉬는 도중은 물론 말을 달리면서도 구후영이 내공을 주입했으나, 내공이 만능은 아니었다.
잠깐 열을 내리는 효과는 있어도 단아의 병세를 전혀 호전하지 못했다.
'태극혜검 생각하는 시간에 의서 하나라도 더 봤으면.'
구후영이 무공에만 빠져서 살았던 과거를 더없이 후회하던 그때.
풀을 뜯던 말 세 필이 동시에 입에 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뭘 잘못 먹었는지 아니면 못 먹어서인지 알 바가 없지만, 이유가 뭐가 됐건 좋은 소식이 절대 아니었다.
"나는 경공을 펼쳐 달릴 테니, 세 분이 말을 타고 움직이시오."
구후영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 작가의말
불검장소 : 검을 쓰다듬으며 긴 소리를 내다.
서두의 시는 이태백이 썼습니다. 의천검은 하늘에 닿는 검이고, 이태백은 의천검으로 바다의 고래를 베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참으로 낭만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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