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계금의訓戒錦衣
금의위는 명태조 주원장이 대신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구성한 조직으로, 손에 쥔 막강한 권력만큼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명성조 때에 이르러 금의위의 독주를 막으려고 동창을 세워 권력을 분산했는데, 급히 만드느라 환관을 우두머리로 하고 실무자는 금의위에서 차출했다.
그때부터 동창의 권위가 금의위를 능가했고, 동창에 차출된 금의위와 그렇지 않은 금의위의 위상이 점점 벌어졌다.
그러다 서창이 생기며 또 금의위에서 무사를 차출했는데, 서창에 차출된 금의위의 위세가 금세 동창 금의위를 추월했다.
그리하여 같은 금의위 출신인데도 서창 금의위와 동창 금의위와 그저 금의위로 급이 나뉘었다.
물론, 위세만 다를 뿐이지 실력까지 월등한 건 아니어서, 쉭 하는 소리 한 번에 열여섯 명의 서창 소속 금의위가 한꺼번에 쓰러졌다.
동시에 허공에 높이 솟았던 야행인이 착지했다. 야행인은 암기술에 자신이 넘치는지 쓰러진 자들의 생사를 확인하지 않고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안엔 피로 칠갑을 한 사내가 축 늘어져 있었다.
"못난 놈."
사내의 몰골을 본 야행인이 잇새로 한 마디 뱉었다.
"오셨군요."
사내가 힘겹게 눈을 뜨며 말했다.
"널 구하러 온 게 아니야. 마침 황궁에 일이 있었어."
퉁명스럽게 쏘아붙인 야행인이 소매에서 비수를 꺼냈다.
"이거 무슨 한철이라던데, 무립니다."
야행인은 사내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비수로 족쇄와 사슬을 잘랐다. 정련한 한철이 썩은 동아줄처럼 쉽게 잘리자 사내가 퉁퉁 부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업혀라."
쇠사슬을 끊은 야행인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감히 제가 어찌 공주께 업히겠습니까."
"이 상황에 무슨 예의냐."
공주로 불린 여인의 나무람에도 사내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불충을 저지를 바엔 여기서 죽겠습니다."
차라리 말이 안 통하는 소의 고집을 꺾는 게 훨씬 쉽겠다는 생각에 여인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공이 안 움직여서 그렇지, 걸을 순 있습니다."
말을 마친 사내가 밖으로 나가 금의위의 옷을 벗겨 몸에 걸쳤다. 머리를 대충 묶어 오모烏帽 안에 넣고 수춘도繡春刀를 허리에 차니 꽤 그럴듯한 모습이었다.
"무슨 속셈이냐?"
사내가 아무 생각 없이 고집을 부릴 놈은 아니란 생각에 여인이 질문했다.
"어차피 이 무거운 짐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건 애초에 무리 아닙니까. 분명히 어딘가 숨어 지낼 곳이 있어 들어왔을 테니, 금의위로 변장하고 느긋하게 다니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내가 업고 움직이는 게 훨씬 안전하지 않겠어?"
"공주께서 은신술에 능한 건 아는데, 그건 혼자 움직일 때 얘기죠."
잠깐 고민한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곤 키가 작은 수위의 옷을 벗겨 야행의 겉에 걸친 다음, 오모를 푹 눌러 썼다.
"어때?"
"멀리서 보면 모를 것 같습니다."
"혹시 우리가 흩어질지도 모르니 목적지를 알려주마. 무영전이 어딘지 알지?"
"서화문 쪽에 있는 궁전이잖습니까."
"무영전 서남쪽에 남훈전南薰殿이라고 있다. 거기에 황궁서고로 향하는 비밀 문이 있는데, 기둥 밑에서 찾으라고 하더라. 혹시라도 흩어지면 어떻게든 거기에 가서 문을 찾아 서고에 숨어라."
"알겠습니다."
"잠깐. 누가 오는 것 같구나."
여인의 말에 사내가 다리를 탁 쳤다.
"교대 시간인 것 같습니다."
여인이 들은 건 죽은 자들과 교대하러 오는 무리가 떠드는 소리였다.
"닥쳐."
짧게 외친 여인이 사내의 멱살을 잡고 영창 동쪽 담을 넘었다. 자신보다 덩치 두 개는 큰 사내를 한 손으로 들고도 여인의 움직임은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네?"
"날 두고 가라느니 그딴 개소리 하지 말라고."
방금 담을 넘은 건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는 듯이, 둘은 태연하게 대화하며 남쪽으로 걸었다.
"살고 싶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절 버리지 마십시오."
위기의 순간에도 사내의 말투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농 들으면 힘 빠지니까 알아서 자제하자."
"근데, 어딜 갑니까?"
"문화전 쪽에 가서 물길을 따르면 협화문協和門이 나온다. 거기서 물밑으로 해서 내금수하內金水河를 따라 서쪽으로 가서 희화문熙和門을 지나면 무영전이 나온다."
"숨을 그리 오래 참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리가 총 열 개 있으니 숨 돌릴 기회는 충분하다."
"준비를 참으로 철저히도 하셨습니다."
걷는 중에 성곽 내벽 순찰대가 나타났다. 여인은 사내를 이용해 순찰대의 시야가 자신에게 못 미치게 숨었다.
"뭘 봐!"
사내가 순찰대를 향해 눈알을 부라렸다. 순찰대는 퉁퉁 부은 사내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린 채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금의위도 자주 얻어터지나 봐?"
순찰대를 무사히 지나자 여인이 말했다.
"개노릇이 원래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잘하면 뼈다귀를 먹고, 못하면 채찍을 맞아야죠."
그때, 조금 먼 곳에서 호통이 들렸다.
"놈들이 따라온 거 같습니다."
"문화전이 비었다고 하니, 일단 거기 숨자."
문화전 동쪽의 숲에 이르자 여인은 바로 사내의 멱살을 잡고 경공을 펼쳤다.
"그냥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멱살을 잡힌 사내가 목소리를 짜냈다.
"여차하면 성곽을 넘어 밖으로 나가려고. 넌 문화전에 숨었다가 잠잠해지면 서고로 가라. 혹시 들키면 기절한 척하고."
여인은 여차하면 혼자 탈출하며 시선을 끌 생각이었다.
"공주의 잔머리는 늘 감탄스럽습니다."
대화하는 사이 문화전 동쪽 담장에 도착했다. 추격자들이 내는 부스럭 소리가 가깝게 들리자 여인은 고민할 겨를도 없이 사내를 훌쩍 던진 다음, 바로 경공을 펼쳐 담을 넘어 바닥에 떨어지는 사내를 받았다.
그런데 몇 장 밖에 등 돌린 채로 서 있는 금의위의 모습이 보였다.
'빈 곳이라며?'
정보 제공자와 급하다고 기척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자신을 함께 원망하며 여인은 열린 창문으로 사내를 던지고 자신도 곧장 따랐는데.
'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인이 안에 들어갔을 때 사내가 정체 모를 자에게 잡혀 있었다.
'고수다. 기척이 안 느껴져.'
방 안에서 호흡이 얕고 빠른 노인의 기척만 느꼈던 여인은 사람 한 명이 더 보이자 순간 당황했으나.
'왜 소리를 질러 밖의 금의위를 안 부르지? 저쪽도 무슨 사연이 있는 건가?'
금세 침착함을 회복하여 협상을 시도했다.
"대화로 풉시다."
그에 사내 뒤에 숨었던 고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 소저?"
그에 여인도 깜짝 놀랐다.
"구후 공자?"
"그래서 전음이 안 통했군요."
단아는 특별한 내공심법을 익힌 바람에 경지가 높아지며 전음을 보내지도 받지도 못하는 상태가 됐다.
그때, 밖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잠깐 이목을 끌어주실 수 있습니까?"
"어쩌려고요?"
"다른 데 숨든지 자금성 밖으로 도주하든지, 상황을 봐가며 결정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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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수상한 작자를 보지 못했어?"
서창 금의위가 구후영을 호위하는 금의위 무사들에게 질문했다.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소."
구후영을 호위하는 함 소기가 말했다.
"진짜? 개미 한 마리라도 나오면 어쩔 건데?"
함 소기는 화가 잔뜩 났으나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똑같이 종칠품의 소기지만, 상대는 서창 소속이어서 끗발이 두 개 높다.
"진짜 아무도 오지 않았소."
함 소기의 대답에 안달이 난 서창 금의위의 무사가 소기에게 속삭였다.
"이제라도 경종을 울려 침입자가 있음을 알려야지 않겠습니까?"
금의위 열다섯에 종칠품의 소기 한 명이 죽었다. 그것도 자금성 안에서.
"놈들이 근처에서 사라졌잖아. 일단 문화전을 수색한 다음, 못 찾으면 그때 경종을 울리자."
강 소기는 출세욕이 매우 강해 관직도 없는 어린 환관을 태감으로 부르며 굽신거리길 마다하지 않았다. 당연히 큰 공을 세울 기회를 이대로 날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다 사고라도 생기면 어떡합니까."
"내궁 순찰을 세 배로 늘렸는데 무슨 걱정이냐."
그에 수하가 소리를 살짝 높여 말했다.
"열여섯 명이 죽었습니다. 상대는 강합니다."
"괜찮아. 저놈들을 방패로 쓰면 되지."
강 소기가 출세욕만 강했다면 괜찮았을 텐데, 설상가상으로 멍청하기까지 했다.
그때, 구후영이 밖으로 나왔다.
"무슨 소란이오?"
"아무도 없다면서? 저자는 누구야?"
구후영이 태의로 임명받은 건 황제를 치료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어디 유명한 의원이 아니기에 태의로 임명해야 그나마 구색이 맞기 때문이다.
당연히 관복과 관모를 지급받지 못해 여전히 평상복 차림이었다.
"폐하의 치료를 담당한 구후 태의요. 공 태감이 무당까지 가서 직접 모신 분이지."
함 소기가 친절히 설명했다.
'거짓말.'
이제 약관 정도로 보이는 구후영의 얼굴에 강창휘는 뭔가 구린 구석이 있다고 확신했다.
"수상한 자가 문화전에 들어가는 걸 봤다. 당장 수색해야겠다."
구후영은 기척으로 단아와 사내가 아직 문화전에 있음을 알았다.
'서쪽에 순찰대가 있구나.'
좌익문左翼門과 협화문 사이를 왕복하는 순찰 병력이 마침 문화전 근처에 있었다. 둘이 비록 금의위의 복식을 했지만, 그렇다고 순찰대를 무시하고 담을 넘어도 되는 건 아니었다.
"그대는 종칠품의 소기가 맞는가?"
"그래."
"난 종오품의 태의다. 어디서 종칠품이 큰소리를 치는 것인가."
구후영의 말에 강 소기를 위수로 한 서창 금의위가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올해 들은 중에 제일 재밌는 개소리였다."
말을 마친 강 소기가 구후영을 밀치며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놈!"
강 소기가 몸에 손을 대자 구후영이 버럭 고함을 쳤다. 그에 순찰대가 속도를 높여 문화전 쪽으로 왔다.
동시에 단아와 사내가 담을 넘었다.
'어!'
강 소기는 구후영이 전혀 밀리지 않자 당황했으나, 체면 때문에 세게 안 민 척했다.
"말로 할 때 안 들으면 크게 경칠 줄 알아."
단아와 사내가 서쪽으로 움직이는 기척을 느낀 구후영은 금의위가 수색하게 비켜주려 했다.
그런데.
"어이쿠. 물건을 흘렸네."
신한천의 외침이 들렸다.
'뭐지?'
다행히 구후영은 신한천의 말이 무슨 뜻인지 금세 이해했다.
'금의위의 패도佩刀.'
구후영이 사내를 제압할 때 허리에 찬 수춘도를 끌러 탁자 위에 놨는데, 단아와 사내가 떠날 때 깜빡하고 안 가져간 듯했다.
"지금 종오품의 관리를 위협한 건가?"
"이 새끼 어디 모자란 거 아냐?"
은근히 힘을 줘 밀었으나 구후영이 꿈쩍도 안 하자 강 소기가 칼을 뽑았다.
찰싹.
눈도 잘 안 보이는 신한천이 수춘도를 숨기거나 문화전 밖으로 갖다 버리는 건 무리다. 다급한 마음에 구후영은 길게 생각지 않고 강 소기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감히."
뺨을 맞은 강 소기가 바닥에 철퍼덕 쓰러지자 서창 금의위 무사들이 분분히 수춘도를 뽑았다.
'이판사판이다.'
현재 가장 중요한 건 수춘도를 안 들키는 일이다.
찰싹, 찰싹.
찰진 소리가 열다섯 번 연속 울린 뒤, 문화전을 찾아와서 큰소리치던 서창 금의위가 전부 뺨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진 채 꿈틀거렸다.
"허."
너무나 의외의 상황에 함 소기를 비롯한 금의위는 물론, 달려왔던 순찰대 역시 입을 헤벌리고 굳어버렸다.
그때.
품에서 폭죽과 화섭자를 꺼낸 강 소기가 심지에 불을 달았다.
- 작가의말
금의는 비단옷을 말합니다. 주원장 때 금의위가 만 명이 넘었는데, 이들 모두에게 비단으로 만든 투우포를 입혔고, 급이 높은 자들에겐 비어포를 입혔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공무원 만 명에게 최고급 양복을 맞춰준 셈이죠. 어마어마한 돈이 드는 일입니다. 주원장이 서민 출신이어서 대신들의 반란에 너무 민감한 탓이 아니었나 추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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