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일격會心一擊
예상을 벗어나는 일엔 누구나 놀란다.
그러나 놀라움으로 받는 영향은 각자 다를 수밖에 없다.
홍기영이 갑자기 소림의 것으로 보이는 무공을 펼치자 구후영 역시 놀랐지만, 다행히 그게 연대구품인 걸 몰라 별로 당황하진 않았다.
그저 홍기영이 펼친 장법이 어느 정도의 공간을 점유했는지 확인하고 자신의 초식을 펼쳤을 뿐이다.
백화영상百花迎霜.
아화일개백화살我花一開百花殺.
가을에 피는 국화를 찬양한 문구다. 국화가 피는 때에 다른 꽃이 모두 지는 걸 두고 국화가 백화를 죽였다고 강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한 국화도 서리를 맞으면 시든다.
구후영은 백화총총에서 다양한 검의의 공존을 강조했고, 일지매화에선 힘에 힘으로 맞서는 단순함을 강조했다.
이 둘을 섞어 다양한 검의로 강한 힘에 맞서도록 한 게 백화영상인데, 빠르면 여름, 늦어도 초가을에 져야 할 꽃들이 당당히 서리에 맞서는 모습을 그린 초식이었다.
쾌검·중검·환검·변검 등 무수한 검법의 검의가 병립하며 천마에 비견하는 고수로 평가받은 연 선생을 궁지로 몰았다.
거기에 신검의 단순하면서도 시기적절한 끼어듦에 연 선생은 끝내 궁지에 몰렸고, 시종 눈을 빛내던 악불형이 드디어 묵룡을 움직였다.
"흥!"
일행은 성공했었다. 분명히 연 선생 주변의 공간을 모두 차지해 옴짝달싹 못 하게 잡아뒀고, 악불형 역시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세상 누구도 막지 못할 것을 자신하는 자신의 초식을 정확히 펼쳤다.
문제는 홍기영의 연대구품과 구후영의 백화영상이 모두의 예상을 벗어난 것처럼, 연 선생 역시 상상하지조차 못한 모습을 보였다.
운룡대구식.
곤륜에서도 필사한 비급만 전해지는 천하제일의 경공을 연 선생이 펼쳐냈다.
"젠장."
물론, 연 선생도 편하게 빠져나간 건 아니었다. 연 선생의 왼손에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고, 주인 잃은 반절도가 바닥에서 윙윙 울고 있었다.
피하기엔 늦었다는 생각에 연 선생이 반절도로 악불형의 일점공격술을 막은 것인데, 위력이 예상보다 훨씬 강해 그만 반절도를 잡은 손가락 세 개가 터진 것이었다.
"두고 보자."
백성을 괴롭히다 문득 나타난 협객한테 혼난 악당이나 던질 법한 말을 끝으로 연 선생이 도주를 선택했다.
그에 옥무영이 나서서 막으려 했으나, 연 선생의 미꾸라지처럼 매끄러운 몸놀림에 허망하게 뚫리고 말았다.
"어딜!"
연 선생이 반절도 두 개를 들었다면 청빈도 감히 막을 엄두를 못 냈을 것이다. 그러나 반절도 하나만 막으면 된다는 생각에 청빈은 없던 용기를 다 끌어내 연 선생 앞에 섰다.
"흥!"
아까 놀라긴 했으나 경지나 내공과 비교해 대단해 보이는 모습 때문이지 청빈에게 두려움을 느낀 건 아니었다.
연 선생은 옥무영을 상대할 때처럼 피하는 대신 그저 귀찮은 파리 쫓는 듯한 손놀림으로 반절도를 휘둘렀다.
그에 청빈의 양손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촌간태극.
비록 깨달음을 얻어 이룬 게 아니라 특수한 환경 덕분에 뒤로 걷다 쥐 잡은 격으로 얻은 거지만, 그렇다고 촌각태극의 가치나 효용이 낮아지는 건 아니다.
연 선생도 그렇고 천마도 그렇고. 이룬 경지는 높지 않으나 세상 누구보다 강하듯이, 청빈 역시 깨달음은 없으나 촌간태극의 위력은 극한으로 끌어냈다.
팡!
태극권은 힘으로 힘을 이기는 게 아니다. 자신의 작은 힘으로 상대의 큰 힘을 비틀어 이용하는 방식으로, 힘의 격차가 홍수와 지푸라기 정도로 차이 나지만 않으면 언제든 일말의 승산은 있었고.
지금이 바로 그랬다.
비록 청빈이 내상을 입고 피를 잔뜩 토했으나 연 선생 오른손의 반절도 역시 허공을 날았다.
그러나 때마침 풍옥장을 펼쳐 등을 공격하는 옥무영 때문에 연 선생은 손가락 하나로도 죽일 수 있는 청빈을 놔두고 용연협을 가린 진법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진법 안에서 나뭇가지 하나가 불쑥 나왔다.
아무 산에 가도 눈에 쉽게 뜨일 것 같은 평범한 나뭇가지는 사람 손을 조금 탔는지 끝이 뾰족하게 다듬어졌다.
그 흔한 나뭇가지가 사대신협의 셋에 구후영까지 협공하고도 손가락 세 개만 손해 보게 한 연 선생의 가슴 중앙에 여실히 박혔다.
"너, 너는!"
뒤로 비칠거리며 물러나는 연 선생을 핍박하며 모습을 드러낸 건 놀랍게도 위종이었다.
"내가 죽은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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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들어야 할 말이 있는 것 같소."
옥무영이 위종한테 말했다.
그에 위종이 숨을 헐떡이며 손을 저었다.
"내상을 입었소. 조금만 쉬게 해주시오."
그러는 사이 귀연이 원경을 데리고 연못 곁에 있는 초가집으로 향했다. 진법이나 기관을 해체하는 과정에 위험한 일이 생기면 원경을 방패로 쓸 생각이었다.
옥무영은 슬며시 눈치를 보다가 바닥에 떨어진 반절도 두 개를 주어서 몇 번 휘둘러 보고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악불형은 자신의 일점공격술이 실패한 것에 충격을 받았는지 굳은 얼굴로 아까의 공격을 복기하고 있었다.
풍불지 역시 멍한 얼굴로 하늘을 쳐다보며 연 선생이 펼친 운룡대구식을 되새기고 있었고 홍기영은 연대구품으로 일거에 비워버린 단전을 채우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구후영은 청빈에게 침을 놓고 내상약을 먹여 안정을 취하게 도왔다.
그렇게 각자 할 일을 끝낸 다음, 드디어 모여앉아 위종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약 십오 년 전의 일이었소."
십오 년 전 위종은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작은 가문의 가주였다. 그런 그에게 정말 친한 벗들이 생겼는데, 바로 연 선생과 한 선생과 초 선생과 제 선생이었다.
"저놈이 제가장의 제 선생이었소. 당시 제가장은 강호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상계에선 꽤 유명했고 관에도 꽤 굵은 끈이 있는 거로 알려졌소."
한 선생은 지략이 뛰어났고 초 선생은 무공이 뛰어났다. 연 선생은 측은지심이 강해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돕기 좋아했다.
제 선생은 그런 그들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병법서나 옛 전투 기록을 구하면 한 선생한테 줬고, 무공 비급을 얻으면 초 선생에게 줬고, 연 선생이 하는 선행에 자금을 지원했다.
딱히 바라는 게 없는 위종과도 말이 제일 잘 통해 어느새 안 하는 말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 선생의 제안으로 산에 갔던 일행은 들어갔던 동굴이 무너지는 바람에 갇히게 됐고, 위종을 뺀 셋은 거기서 죽고 말았다.
"그냥 목을 베면 간단한 일 아니오?"
묵묵히 듣던 옥무영이 의문을 제기했다.
"그건 잘 모르겠소. 워낙 정이 깊이 들었던 사이라 직접 손 쓰지 못했는지, 아니면 초 선생의 무공이 두려웠던 건지."
덩치가 작았던 위종은 동굴이 무너지며 생긴 작은 틈으로 빠져나왔다. 그 과정에 낙석에 맞아 머리가 깨지고 다리도 부러졌지만, 어쨌든 목숨만은 부지했다.
밖으로 나온 위종은 감히 가문으로 돌아갈 엄두를 못 내고 산속에 숨어 지냈다.
그러나 십 년이 넘고도 다리를 고치지 못하자 결국 포기하고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위종의 가문은 이미 산적의 손에 멸문당했고, 장원은 불에 타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위종은 칠살문을 찾아갔다.
그런데 칠살문은 이미 진씨가 아닌 호씨가 차지했고, 호 선생은 위종의 입에서 암호문을 알아내려 했다.
그간 연 선생과 협력하는 과정에 암호문들을 대가로 받았는데 유독 위씨 가문의 것만 없었던 탓이었다.
"방금은 무슨 무공이오?"
"십보살. 익히기만 했지 펼치는 건 오늘이 처음이오."
옥무영은 뭔가 계속 미심쩍었으나 딱히 꼬투리 잡을 만한 부분이 없어 속이 갑갑했다.
그러나 초가집을 뒤지던 귀연과 원경이 뭔가를 들고나오자 주의력은 그쪽으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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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게 위씨 가문의 암호문이오?"
구후영이 건넨 책자를 받아 확인한 위종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소. 내가 아는 건 위씨 가문의 암호문이 총 세 개로 모든 가문 중 가장 적다는 것뿐이오."
다행히 해당 암호문이 위씨 가문의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연 선생이 기거하던 초가집엔 칠살문의 고대 문서를 해석하는 데 필요한 모든 암호문이 있어 굳이 누구 건지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곧 대부분 사람은 진시황 시절보다 더 전의 글자로 적힌 문서를 해석하는 데 매달렸고, 악불형 등은 따로 모여 대화했다.
"당연한 건데 당연하지 않아."
신검은 아니지만, 신창과 신장은 연 선생의 십보살을 직접 눈으로 봤다.
상대가 좋지 않아 빼어난 모습을 보이진 못했지만, 옥무영은 뛰어난 무인이다.
그런 옥무영이 눈으로 빤히 보면서도 십보살을 피해내지 못했다.
위종은 진법으로 모습과 기척을 완전히 가리고 있다가 뛰어드는 연 선생을 죽였다.
위종의 부족한 부분을 진법이 대신해줬기에 십보살로 연 선생을 죽인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연 선생의 강함을 생각하면 또 당연하지 않다.
아무리 손가락 세 개를 잃고 무기도 잃어 당황했다고 쳐도 다리 하나를 제대로 못 쓰는 무인의 단순한 찌르기에 반항도 못 하고 죽을 정도는 아니다.
"양심의 가책 때문이 아닐까?"
아무리 심장을 찔렸어도 충분히 상대를 죽일 기회와 힘이 있었다. 풍불지는 연 선생이 양심의 가책으로 위종을 죽이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자기 신분인 제 선생보다 연 선생으로 불리기 좋아했다잖아. 들어보니까 죽은 사람 중에 연 선생이 제일 착한 것 같더니만. 내심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딴 거 말고. 다리 하나 못 쓰고 내공도 별로 없는 평범한 무인이 십보살을 쓴다고 저런 고수를 죽일 수 있느냐는 거가 문제지."
악불형이 말했다.
풍불지가 강하긴 하나 나이가 어리고 사람도 경박하여 사대신협의 남은 셋 모두 풍불지와 대화할 때 굳이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너라면?"
위아래가 없는 풍옥문에서 자란 풍불지가 편한 말투로 질문했다.
"당연히 죽일 수 있지."
악불형이 웃긴 얘기를 들었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근데 저자가 나만큼 높은 경지를 이루고 나만큼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창은 일반 병사들도 쓰는 가장 싸움에 적합한 무기다.
오랜 기간 수많은 사람이 사용하면서 어떻게 쓰는 게 옳고 어떻게 쓰는 게 효율적인지 어떠한 병기보다 잘 알려졌다.
악불형은 수많은 창을 쓰는 자 중에서 유일하게 신창으로 불리는 자다.
내공이 없고 힘이 약하다고 쳐도 자신을 향해 뛰어드는 자를 단순한 찌르기로 해치우는 일이 그리 어렵진 않다.
"평범한 무인이 완벽한 회심의 일격을 펼쳐낼 가능성은?"
"멸문에 친우의 죽음까지 생각하면 높은 집중력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사실 위종이 연 선생을 죽인 건 말이 안 되기도 하고 되기도 했다.
둘의 실력 차이를 생각하면 절대 말이 안 되지만, 방금의 상황 또한 기묘하기 짝이 없다.
지금 셋이 이렇게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모으는 것은 일견 합리적인 일이 너무나 찝찝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쩌지 못한 자가 허무하게 죽어서 기분이 이상한 걸까?"
홍기영이 말을 멈추고 음울한 얼굴로 앉아 깊은 생각에 빠진 위종을 일별했다.
"아니면 저자가 뭔가 숨기고 있는 걸까?"
- 작가의말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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