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강호非情江湖
쇠란송객함양도衰蘭送客咸陽道
함양으로 가는 길 곁에 시든 난초가 손님을 바래네.
천약유정천역로天若有情天亦老
하늘이 정을 알면 아마 하늘도 늙을 것이네.
서두른 덕분에 일행은 마교보다 먼저 화산에 도착했다.
종남 제자들은 막불위의 지시에 따라 약초꾼이나 사냥꾼으로 위장해 화산 곳곳을 누볐고, 구후영 일행은 인적이 닿지 않는 곳에 몸을 숨기고 조용히 지냈다.
구후영이 마교에 얼굴이 알려진 것도 있지만, 셋 모두 말투만 들어도 섬서 사람이 아닌 게 티가 나는 이유가 컸다.
그 탓에 셋은 강호나 무공에 관한 얘기로 심심함을 달랬다.
"천마라는 자는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경지인 걸까? 사대신협을 각자 자신 있어 하는 무공으로 상대했으니."
원경의 말에 구후영은 고개를 돌려 옥무영에게 답을 구했다.
"글쎄다. 사부 말로는 그때 천마가 자신들을 봐준 것 같다고 하던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마를 떠올리면 그저 어마어마하게 강한 무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꽤 높은 경지에 이른 지금, 구후영은 천마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갑갑했다.
어디에 있는지 감조차 안 잡히던 예전과 달리 이젠 얼마나 멀리 있는지 슬슬 느껴지는데, 다가갈 방법을 몰라 기분이 막막한 탓이었다.
그때.
"마교가 움직였습니다."
종남 제자가 달려와 소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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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녀봉 초입을 지키던 화산 제자 두 명을 마교 고수들이 난도질로 죽였다. 그 모습을 보며 구후영은 마음이 슬펐다.
'강호여서 비정한 걸까. 아니면 인간이 원래 이리도 악한 걸까.'
칼 들고 강호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언젠간 칼 맞고 죽을 각오를 품어야 한다. 구후영을 제자로 받으면서 임초현이 거듭 강조한 부분이었고, 동생을 더 잘 키우기 위해 구후영은 그러한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구후영은 강호의 비정함에 마음이 아팠다.
"아무리 뿌리가 달라도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맞대는 사이였을 텐데.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무림대회의 참석을 끝낸 화산을 비롯한 섬서의 문파들은 이제 겨우 낙양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천 리나 되는 거리가 가까운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보름도 더 지난 지금 겨우 낙양에 도착한 건 고의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는 기종이 제발 검종을 치라고 마교에 자리를 깔아준 거나 진배없다.
"뱀 같은 자들이니까. 상대 덩치가 커도 삼킬 수 있다고 서로 자신했겠지."
그나마 검종에 마음이 더 가는 구후영과 달리, 막불위와 막불손은 기종이나 검종이나 똑같은 놈으로 판단했다.
"이대로 지켜볼 거요?"
거침없이 옥녀봉을 오르는 마교 무리를 보며 옥무영이 말했다.
"옥녀봉은 가파르기로 유명한 화산에서도 험난하기로 세 손가락에 드는 산이오."
막불위가 말했다.
"올라가는 길은 딱 둘인데, 하나는 마교처럼 계단을 밟고 정면으로 오르는 방법이고, 하나는 짐승도 안 기웃거린다는 후면의 벼랑을 타는 거요."
"제길."
옥무영이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무슨 얘기냐?"
둘이 대화를 멈추자 궁금을 참지 못한 원경이 구후영에게 속삭여 물었다.
"우리 목적은 마교를 전멸하는 게 아닙니다. 어려움을 알고 자진自進하여 물러나길 바라는 것이지요."
"그건 나도 알지."
"그래서 우린 마교 뒤를 따를 수 없습니다. 상대 퇴로를 막는 것으로 보이니깐요. 게다가 화산이 종남과 마교가 손잡았다고 오해할지도 모릅니다."
원경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벼랑으로 오르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마교가 저렇게 대놓고 정면으로 오르면 당연히 뒤로 고수가 침투할 수 있다고 여겨 화산이 단단히 지킬 테니까요."
거의 수직에 가까운 벼랑을 오르는 것 자체가 절정의 고수한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위에서 화산의 고수가 필살의 의지를 품고 방해한다면.
상상만으로도 식은땀이 날 지경이다.
"그럼 언제 움직여야 하는데?"
"화산이 벼랑을 지키는 게 소용없음을 깨달을 즈음에요."
일행이 기다리던 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검종은 비록 기종보다 사람도 많고 절정의 숫자도 많지만, 화산 같은 대문파를 대표할 만한 수준의 진짜 고수는 모두 기종에 있었다.
절정은 많으나 출중한 고수가 부족한 검종은 고수는 물론 숫자로도 압도하는 마교에 형편없이 밀렸다.
"부탁한다."
막불손에게 말한 막불위가 경공을 펼쳐 옥녀봉으로 달렸다. 구후영 등도 서로 눈빛으로 마음을 다진 후 거침없이 막불위를 따라 옥녀봉으로 향했다.
"자, 우린 벼랑으로 가자."
남은 종남 제자들은 막불손을 위수로 한 종남칠검을 따라 옥녀봉 후면의 벼랑으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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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했는데."
벌써 수십 명의 검종 제자가 죽었고, 크고 작게 다친 자도 백이 넘는다.
그에 결사 항전하던 검종의 기세가 한풀 크게 꺾였다.
"기종이 마교랑 손잡을 줄이야."
검종의 장로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한탄했다.
"우리여도 똑같이 했을 겁니다."
장로의 말에 대꾸한 청년은 입은 화산 무복이 피에 절어 하얀색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찢긴 흔적이 없는 걸 봐선, 본인보단 마교 무인의 피가 대부분인 듯했다.
"몇이나 살릴 수 있을 것 같으냐?"
청년 덕분에 평정심을 어느 정도 회복한 장로가 말했다.
"그건 마교에 달렸죠. 저들이 독하게 마음먹었다면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그에 장로가 한 번 더 탄식했다.
"우리가 어쩌다 도마 위에 오른 물고기 신세가 됐느냐."
그에 청년은 평소 마음에 품었던 불만을 토로했다.
"낙화문을 버릴 때부터?"
평소라면 허튼소리 하지 말라고 강하게 호통쳤겠지만, 죽음을 앞둔 상황에 장로도 청년의 말에 동의하는 마음이 생겼다.
'하긴. 그냥 나온 것도 아니고 비급 비슷한 것은 물론 재물까지 모조리 챙겨 나왔다고 했지.'
화산이 낙화문의 검술을 탐냈던 것처럼, 낙화문 역시 화산의 자하공이 탐났다. 당시 무인 숫자는 낙화문이 훨씬 많았기에 화산 밑으로 들어가더라도 문파를 장악할 자신이 있다고 여겼고, 당연히 낙화문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낙화문을 소림에 버금가는 문파로 키워 조상의 이름을 빛내고 후세를 복되게 하는 옳은 일이라고 자부했다.
비급과 재물을 모조리 챙긴 것도 화산에 지지 않기 위함이었는데, 재물 덕분에 규모는 늘 기종의 두 배 이상으로 유지했다.
문제는 내공과 초식을 결합하는 과정이었다. 기종은 진짜 중요한 운기 방법을 감출 수 있지만, 검종은 낙화검법의 초식을 전혀 감출 수 없었다.
그 탓에 검종은 훨씬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시종 기종을 압도하지 못했고, 합친 지 백 년이 되는 지금도 자하공의 모든 구결을 알지 못했다.
"억울한 건, 선대의 죄를 왜 소손이 갚아야 하냐는 겁니다."
청년은 죽음을 앞둔 사람답지 않게 태연한 얼굴이었다.
"다 쉬었으면 나가 싸워라."
평소 아끼던 막내 손자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장로는 마음이 아팠지만, 입으론 모진 말을 내뱉었다.
그에 청년이 코를 한 번 찡그리곤 경공을 펼쳐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달렸다.
그때.
"낙화문 장문 구후영이 화산에 방문을 고하오."
가을바람처럼 시원한 목소리가 화산과 마교 무인들의 귀에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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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나, 물러나."
검을 잡고 전투에 뛰어들었던 청년이 사형제들에게 연신 외쳤다. 그러면서 정작 본인은 되려 앞으로 나갔다.
덕분에 위태롭게 버티던 화산의 젊은 제자들이 제때 뒤로 물러났다.
"감히 명교의 행사를 방해하려는 건가?"
수련이면 몰라도 목숨 걸고 싸우는 건 상대 수준에 상관없이 힘든 일이다. 화산만큼은 아니지만, 꽤 지친 마교 무인들은 물러나는 화산 제자들을 뒤쫓지 않았다.
"화산의 땅에서 화산의 주인을 찾는 게 왜 마교의 행사를 방해하는 것이오?"
구후영보다 한발 늦게 도착한 옥무영이 말했다. 올라오는 길에 잠깐 충돌이 있었는지 왼쪽 소매가 찢긴 모습이었다.
"그대는 또 누구요?"
"풍옥문 소문주 옥무영이오."
다들 별 반응이 없자 옥무영이 설명을 보탰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신검의 제자요."
그제야 마교 무리가 술렁였다.
그때 새로 등장한 원경이 둘 곁에 조용히 섰다. 그런 원경에게 옥무영이 질문했다.
"막 장문은?"
범도 자기 소릴 하면 나타난다더니, 옥무영의 소곤거림이 끝나기 바쁘게 막불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받으시오."
막불위는 기절한 듯 축 늘어진 무인 두 명을 화산 제자들이 뭉친 곳으로 던졌다.
"당신은?"
눈이 커다래진 화산 장로가 뭐에 그리 놀랐는지 말을 맺지 못했다.
"종남 장문 막불위요. 마교의 행사를 방해하러 왔소."
그때, 얼굴에 천을 칭칭 감은 마교 무인이 막불위를 손가락질했다.
"저놈입니다."
그에 마교의 무리를 헤치고 구후영의 눈에 익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련당 당주 용전향이오."
예전엔 육엽당 당주라고 했었는데, 그새 바꿨는지 백련당이라고 소개했다.
"종남과 명교는 그간 사이가 꽤 좋았던 것 같은데. 마음이 바뀐 확실한 이유라도 있는 거요?"
말하는 용전향의 눈빛이 구후영을 순식간에 스치고 지나갔다.
"천강구절을 걱정하는 거라면, 아니라고 대답하겠소."
중원은 아니지만, 마교엔 소림과 종남 모두 천강구절과 친분이 깊은 문파로 알려졌다. 용전향은 막불위와 구후영이 함께 등장하자 당연히 천마가 떠올랐고, 어떻게든 확인하고 싶었다.
'호가호위하기 싫은 건가?'
막불위는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이, 그저 이번 일에 천마의 입김이 들었다는 낌새만 풍겨도 된다.
'아니지. 이대로는 마교가 포기하지 않을 테니, 이번에 끝을 보는 게 옳을지도.'
구후영이 막불위가 솔직히 대답한 이유를 고민하던 중에, 용전향의 대답이 들렸다.
"화산은 이미 늦가을의 낙엽이오. 굳이 겨울이 오지 않아도 떨어질 게 분명한데, 뭘 기대하는 것이오?"
"마교는 소식이 늦군. 종남은 두 달 전에 이미 동창과 화해했소."
막불위의 대답에 용전향이 이를 살짝 갈았다.
"조정의 개노릇이 질리지도 않나 보오."
"그래도 받아줘서 얼마나 다행이오. 늑대로 취급받아 쫓겨나진 않았으니."
둘이 설전을 벌이는 사이, 옥무영은 마교 무리를 빠르게 훑었다.
그러나 곧 소용없는 일임을 깨달았다.
어느새 전투를 마친 마교 무인들이 속속 모이며 분석 따위를 무의미하게 만든 탓이었다.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소?"
옥무영이 용전향을 향해 소리쳤다.
일행이 화산에 온 목표는 첫째로 설련이다. 둘째는 마교의 행사를 방해하는 것이고, 셋째는 화산을 구하는 거다. 여기서 마교가 물러나면 세 목적 모두 달성할 수 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을 담아 질문한 거였다.
하지만.
"미안하게 됐군. 검종을 남김없이 도륙한다고 기종과 이미 약속했소."
용전향은 기종과 결탁했음을 밝히며 입 하나 안 살려둘 결심을 대놓고 드러냈다.
"명교의 전사들은 들어라."
용전향이 내공을 잔뜩 실은 외침으로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려는 옥무영의 노력을 물거품이 되게 했다.
"오늘 화산에서 숨 쉬며 떠나는 건 우리 명교밖에 없다."
"성화의 가호가 임하소서."
달뜬 외침과 함께 마교의 무리가 밀물처럼 몰려왔다.
- 작가의말
역시 주인공. 전혀 의도치 않았는데도(?) 중요한 사건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었습니다.
이제 경천동지할 활약으로 화산을 구하고 마교를 도살한 다음 무림을 통일하고 황제가 되는 길만 남았겠네요. 철혈의 무림황제 구후영이 걷는 피와 죽음으로 점철된 잔혹한 행보,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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