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입태극初入太極
잔잔하던 봄비가 점점 거칠어지며 빗방울이 기와를 때리는 소리가 아우성으로 변했다. 빗줄기만 흔들던 바람이 이젠 파릇파릇한 잎사귀를 틔우기 시작한 가녀린 가지들을 휘둘렀다.
바람에 덧없이 쓸리는 버드나무의 가여운 모습에 구후영이 이를 악물었다.
'내가 사라지는 게 상책이 아닐까.'
구후영과 원경은 옥무영과 종남 일행이 떠나고도 하루 더 장원에 머물렀다. 둘이야 괜찮지만, 아직 찬 기운이 남은 봄비가 취연의 건강을 해칠지도 모르는 탓이었다.
덕분에 생각을 정리할 짬이 생긴 구후영은 잠도 거른 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사부는 일부러 무식한 척 사숙들을 속였다.'
이는 임초현이 낙화문 장문이 되기 전부터 가면을 쓰고 생활했다는 건데, 문파의 중흥이란 확고한 목표를 품은 덕분이었다.
자신의 체면 따위보다 더 중요한 목표가 있기에 타인과 사제들에게 얕보일 것을 각오할 수 있었다.
'사형 역시 돈만 밝히는 척하며 어수룩하게 행동했지.'
옥무영은 임초현과 다르다.
임초현은 사제들이 괜찮은 기회만 생기면 문파를 가차 없이 버리고도 남을 놈들임을 알기에 일부러 무식한 척하면서 사제들의 발언권을 키워줬다.
대신 진짜 중요한 일은 어떻게든 억지를 부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끌었는데, 완급조절이 하도 대단해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멍청한 사숙들은 실질상 자신들이 문파를 이끈다는 착각에 빠져 살았다.
옥무영은 신검이란 뒷배가 있고, 돌아갈 문파도 있었다. 그럼에도 거대 문파인 무당의 장문이 되어 강호에 이름 한 번 떨쳐보겠단 야망으로 어수룩한 척 연기했다. 일부러 무당과 거래가 잦은 거래처에서 공공연히 뇌물을 뜯어내는 모습을 보여주면서까지.
그 깊은 심계에 노련한 현영자마저 감쪽같이 속았다.
'두 분 다 자신을 숨기는 거로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
소림도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꼭꼭 감춘 덕분에 결국엔 세수경과 역근경의 주해본을 얻어냈다.
그 과정에 배후는 천공교검을 얻어냈다. 사부한테 들은 말이 있는 옥무영은 배후가 진정으로 원한 게 구후영의 검이라고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배후의 음모를 방해했다는 건 어쩌면 나의 오만일지도.'
배후는 소림의 일에 이어 화산의 일에서도 구후영을 계획의 일환으로 삼았다. 그 목적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어쩌면 일부러 마교가 실패하길 원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일 큰 문제는 상대가 누군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전혀 모른다는 거지.'
꼬박 하루 걸린 깊은 고민 끝에, 구후영은 어렵게 마음을 정했다.
"이번에 관동에 가서 부친과 조부의 복수를 이뤄내면 강호에서 은퇴할 생각입니다."
구후영이 불쑥 꺼낸 말에 원경은 전혀 놀라지 않고 여상하게 대꾸했다.
"나는 어머니가 건강을 찾으면 대수인을 배워 수련에 몰두할 생각이다. 딱히 미련이 있는 건 아니고, 그저 소림 무공의 끝이 어떤지 보고 싶구나."
원경의 말에 구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백모伯母님을 홍엽산장에 모신 다음 함께 관동에 가서 복수도 하고 약재도 구함이 좋겠습니다."
#
일행의 도래에 홍엽산장은 잔치를 열어 환영했다.
정작 주인공이라고 할 원경과 취연이 술을 마시지 못했지만, 다들 기쁘게 잔치를 즐겼다.
그리고.
"이만 떠나셨으면 하오."
잔치가 끝나기 무섭게 규찰대주를 따로 불러낸 구후영이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이유는?"
구후영은 소림과 화산의 일을 간략히 들려줬다.
"강호의 이목이 홍엽산장에 집중될 거요. 아마 혈포규찰대와 인연이 있다는 소문도 파다하게 퍼지겠지. 소문이 떠도는 것까진 괜찮은데 사실로 확인되는 건 다른 얘기요."
"그뿐인가?"
갑작스러운 축객령에도 규찰대주는 태연했다.
"마교에 큰일이 생길 것 같소. 그대가 무정한 사람이 아니라면 돌아가서 뭔가를 해야지 않겠소?"
"하긴. 피하기만 하면서 천강구절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것도 이젠 지쳤다."
"각자 자기 자리에 어울리는 일을 할 때 비로소 세상이 바르게 돌아가오. 난 이번에 그걸 절실히 느꼈소. 그러니 대주도 자기 자리에 가서 자기 할 일을 하시오."
구후영은 홍엽산장을 강호와 무관한 곳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규찰대주가 마교에서 자기 역할을 하길 바라는 말도 핑계가 아닌 진심이었다.
화산의 일을 통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교의 염원이 얼마나 대단한지 간접적으로 느꼈고, 마교의 사람들한테 측은지심이 조금이나마 생긴 탓이었다.
"작별은 대신해주시오."
말을 마친 규찰대주가 바로 몸을 돌려 떠났다.
규찰대주를 눈으로 배웅한 구후영은 바로 사제들을 소집했다.
"이만 태원부로 돌아간다."
구후영의 말에 사제들이 작게 환호했다. 홍엽산장에서 지내는 게 나쁘진 않았지만, 말투도 다르고 음식도 다른 곳에서 지내는 게 마냥 좋지도 않았다.
"다들 그간 내공이 꽤 쌓였구나. 그러나 산 너머에 산이 있고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명심해라."
"네, 장문."
자세한 건 모르지만, 구후영이 소림에서 원철을 이기고 백팔나한진을 깼다는 소문을 들은 후라 낙화문 제자들은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강호가 혼란하고, 아마 더 혼란해질 것이다. 그게 아니어도 우리 낙화문에 정말 중요한 시기고. 태원부에 가면 수련만 열심히 하고 절대 사고를 치지 말아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나이도 서열도 가장 밑이지만, 어느새 일행 중 최고수가 된 두유손이 대표로 대답했다.
"돌아가서 짐을 싸고 친한 사람들한테 작별 인사를 하거라."
사제들을 떠나보낸 구후영은 동생을 찾아갔다.
"자룡. 이번 일에 넌 빠져라."
"무슨 일?"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복수를 하러 가는 일. 무공을 계속 수련하는 건 말리지 않겠는데, 너만큼은 강호와 무관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구나."
"알았어."
의외로 동생이 순순히 따르자 구후영은 마음이 아련해졌다.
'내가 동생이고 자룡이 형이었다면, 나도 저리 걱정 없는 사람이 되었을까?'
잠깐 상념에 빠졌던 구후영은 바로 마음을 추스르고 길잡이 형제와 최종필을 찾아갔다.
"연 선생인지 뭔지 하는 자의 뒤를 캐지 마시오."
#
모든 안배를 마친 구후영은 장선과 원경과 함께 홍엽산장을 떠났으나, 같은 날 출발한 낙화문 제자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구후영의 목적지는 쇄악곡이었다.
"무당일절께서 여기 기거하신다고?"
나이를 따지면 장선이 무당일절보다 열 살 이상 많다. 그러나 장삼풍의 관문제자라는 명성 때문에 장선의 말투엔 존경심이 잔뜩 묻어났다.
"그렇습니다. 제 의형 중 한 분도 여기 계십니다."
"진짜 중은 환속했는데, 가짜 도사는 진짜가 됐구나."
무당 도사인 척하던 뻔뻔한 자객을 떠올린 원경이 허탈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기척이 전혀 없구나. 청빈을 못 보는 거 아니야?"
원경의 말마따나 쇄악곡엔 사람의 기척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 구후영도 살짝 당황했다.
"제가 길을 잘못 안내한 것인지도."
최대한 기억을 더듬었고 보이는 경관도 눈에 익었지만, 비슷한 다른 골짜기를 잘못 찾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구후영이라면.
"설마."
원경이 생각하는 구후영은 어떤 일에도 당황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어떻게든 해결하는 똑 부러진 동생이다.
그렇기에 지금 보여주는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가서 확인하죠."
구후영은 부끄러움에 살짝 달아오른 얼굴을 돌리며 앞장서서 안으로 달렸다.
'오긴 제대로 왔구나.'
다행히 안의 광경은 구후영이 기억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단지, 쇄악곡은 텅 비었고 사람의 기척도 여전히 느껴지지 않을 뿐이었다.
"협객 청년이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막불위도 그랬지만, 장삼풍의 제자인 늙은 도인도 구후영에게 기척을 들키지 않았다.
"그래. 이번엔 무슨 일로 오셨는가?"
"정학 진인께 가르침을 받으려고 왔습니다."
소림에서 태극혜검에 관해 큰 깨달음을 얻었다. 구후영은 자신이 옳은 길을 걷는 게 맞는지, 그리고 자신이 목적지까지 얼마의 거리를 두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유일하게 구후영의 경지를 가늠할 수 있는 정학을 찾아왔다.
"늦었네."
"네?"
늙은 도인의 말에 구후영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사제는 이미 태극을 이뤘네."
태극을 이룬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구후영이 생각했던 최악의 경우는 아니었다.
"사부도 못 이루고 떠났는데, 사제가 결국엔 이루고 말았네."
말을 하는 도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경하드립니다."
구후영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경하할 일인지."
그러나 도인은 도리어 탄식하며 팔을 들어 벼랑의 한 곳을 가리켰다.
"사제는 저기 있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정학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알몸을 한 채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특별한 수련을 하는 겁니까?"
장선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수련이 아니고, 반조返祖의 과정이라네."
회광반조回光返照는 알아도 반조는 처음 듣는다.
"그게 뭡니까?"
구후영이 질문했다.
"태극을 이룬 후 사제는 조금씩 말을 잃었네."
"말을 잃는다고요?"
"인간이 만든 문자와 언어는 만물을 규정하고 구분했지. 덕분에 세상을 더 잘 인식해서 오늘까지 왔지만, 한편으론 한계를 만들었네."
구후영이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풍불지도 말한 적이 있다. 산에서 흙 한 줌 언덕에 줘도 산은 산이고 언덕은 언덕이다. 그러나 계속 주다 보면 어느 순간 둘이 같아지는데, 산은 계속 산이고 언덕은 계속 언덕인지, 아니면 둘 다 산인지, 아니면 둘 다 언덕인지 누구도 모른다.
이는 인간이 산과 언덕이란 다른 이름으로 사물을 구분했기 때문이다.
"사부는 그래서 일부러 사제한테 글을 가르치지 않았지. 가르침도 최대한 말을 아끼고 몸으로 내렸고."
구후영으로선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무공을 어떻게 몸으로 가르친단 말이지? 어차피 태극권의 투로에 대단한 게 있는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말을 완전히 잃더니 그다음부턴 알몸으로 다니더군. 그리고 이젠 음식 섭취도 멈췄네."
"반조라는 게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옛날 사람도 음식은 섭취했을 거 아닙니까?"
"그러나 나무는 입이 없지 않나?"
도인의 말에 구후영은 문득 깨닫는 바가 있어 입을 다물고 깊은 고민에 잠겼다.
그런 구후영을 대신해 원경이 질문했다.
"저대로면 정학 진인께서 부처님이나 태상노군 같은 존재가 되는 겁니까?"
"땅처럼 단단하고 넓은 청년이군."
도인이 원경을 칭찬했다.
"그러려면 부처가 뭐고 신선이 뭔지 또 구분해야겠지? 그건 태극이 아니네."
"다름은 그저 현상이고, 본질을 파고 파면 결국 같음이군요."
고민을 끝낸 구후영이 중얼거렸다.
"정학 진인께서 다다른 경지는, 무공이란 범주에 가두기엔 너무 거대하군요."
구후영의 말에 도인이 손뼉을 짝 쳤다.
"협객 청년 덕분에 속이 후련하군. 이게 뭔지 몰라 그간 답답해 죽을 뻔했네."
"불쑥 찾아와서 귀찮게 한 주제에 큰 가르침을 받고 가는군요."
구후영의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도인이 말없이 사라졌다.
셋은 허둥거리며 주변을 살피다 절벽에 거꾸로 매달린 정학을 일별한 후, 더없이 감탄한 마음으로 쇄악곡을 떠났다.
- 작가의말
생각보다 복귀가 늦었습니다.
그간 편두통을 앓았습니다. 사실 공지를 올릴 때만 해도 편두통인 줄 몰랐습니다. 하루에 두세 번 잠깐 아프다 말았거든요.
그런데 공지를 올리고 며칠 지난 뒤, 누군가 종일 내 머리 안에서 망치질하더군요.
다행히 약 열흘의 치료로 호전했고, 보름 정도 쉬고 다시 약을 먹고 있습니다. 항생제가 기운이 너무 세서 연속으로 먹으면 안 된다고 해서요.
요즘은 머리가 크게 아프진 않은데, 편두통인 줄 모르고 가만히 있다고 호되게 당했던 기억 때문에 치료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엔 하루 한 편씩 올릴 예정입니다. 한꺼번에 3부 마무리까지 올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새로 글 올린 거 모르고 지나치는 분이 많을 것 같군요.
그리고 하나 말씀드릴 것은, 편두통이 어느 정도 나은 다음 다시 글을 읽어보니 그렇게 마음에 들 수가 없더군요. ‘내글구려병’ 따위가 아니라 그저 편두통 때문에 제 컨디션이 별로였던 거였습니다.
끝으로 선작을 취소하지 않고 기다려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강호의 여정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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