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망타진一網打盡
순천부는 주요 거리를 밤새 등롱으로 밝히는 바람에 불야성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도 황궁에서 꽤 거리가 되는 유흥가 얘기고, 황궁 근처는 이미 까맣게 물든 지 오래였다.
"맹주,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오?"
평소라면 오히려 앞장서서 돌격을 외쳤을 막불손마저 구후영의 과감한 결정에 난색을 보였다.
"서둘러야 하오. 이대로 칠살문이 황궁을 완전히 장악하게 놔두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오."
감옥의 밀실에서 찾아낸 문서로도 호 선생이 누군지, 호 선생이 남은 네 선생과 같은 사람인지 아니면 모종의 연관이 있는지는 밝히지 못했다.
그러나 동창과 황제 근처의 환관 대부분이 칠살문의 장악 아래 놓였음을 확인했고, 칠살문이 무림수호맹의 정체에 매우 가깝게 접근했음도 발견했다.
"계획은 있는 겁니까?"
막내 궁주가 질문했다. 구후영에 대한 믿음이 누구보다 깊다고 자신하지만, 황궁에 침투해 장인태감인 공현을 납치하려는 결정엔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구후 소협, 오랜만이오."
커다란 덩치의 사내 한 명이 기척도 전조도 없이 일행 근처에 나타났다.
"홍 대협, 오랜만입니다."
인사를 마친 구후영이 일행에게 사내를 소개했다.
"신장 홍기영 대협이오."
깜짝 놀란 일행이 흥분한 얼굴로 홍기영에게 인사했다. 그건 무공에 관심이 없는 귀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홍 대협은 우릴 도와 공현을 납치할 것이오. 그다음 황후한테 칠살문의 잔당이 공 태감을 해친 것 같다고 주상할 것이오. 적의 수괴를 처리할 뿐만 아니라 황궁에 침투한 칠살문의 세력을 일망타진할 계획이오."
"그럼 황궁 침투는 누구누구 하는 겁니까?"
원래는 구후영과 막내 궁주 둘이 침투하기로 했었으나 지금은 사대신협이 있어 자기가 굳이 필요하지 싶었다.
"모두 함께 들어갈 것이오."
막내 궁주의 질문에 대답한 건 홍기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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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연과 막내 궁주는 환관 차림을 하고 위종은 도사 차림을 했다. 구후영과 막불손은 하인 차림을 하고 위종을 태운 가마를 멨다.
"누구시오?"
"나다."
오문을 지키던 자들이 가마를 멈춰 세우자 수십 걸음 뒤에서 따르던 홍기영이 달려갔다.
"홍 장군께서 어찌."
부하도 실권도 거의 없지만, 홍기영은 대장군 직위에 있다. 거기에 직위를 따위라고 불러도 될 만큼 강한 실력을 갖췄기에 오문을 지키는 자들도 공손하기 그지없는 태도를 보였다.
"태자 전하의 손님이다."
그에 수위들이 티 안 나게 한숨을 쉬었다.
태자한테 가려면 북쪽의 현무문이 훨씬 빠른데, 굳이 왜 남쪽으로 왔냐는 원망이었다.
모용건의 시체를 본 후 태자는 장생불로에 푹 빠졌는데, 쩍하면 도인이나 스님 혹은 근본도 없는 좌도방문의 술사들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이러한 일은 황궁의 규칙에 어긋나는 행태이나, 황제를 대신해 국정을 살피는 태자를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다수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일만 아니라면 누구나 눈 감고 모른 척할 용의가 넘치는 탓이었다.
"굳이 홍 장군께서."
"마침 전하의 눈에 띄었지 뭐냐."
"고생하십시오."
유일하게 의심이 가는 부분은 홍기영이 직접 이들을 호송한다는 것인데, 마침 태자의 눈에 띄었다는 핑계가 잘 먹혀 수위들이 순순히 문을 열었다.
'망조가 들었구나.'
시뻘건 대낮이어도 관직이 없는 외부인을 기록도 없이 들여보내는 건 크게 경계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자정이 가까운 이 시각에 홍기영의 말 한마디에 누군지 기록하지도 않고 그냥 들여보내는 건 황궁의 기강이 무너질 대로 무너졌다는 뜻이다.
"서두르지."
안에서 만난 순찰대들도 태자의 이름으로 간단히 물리친 일행은 홍기영의 집무실에 무사히 도착했다.
일행은 재빨리 야행의로 갈아입고 홍기영을 따라 공현의 거처로 움직였다. 다행히 집무실에서 공현의 거처까지 꽤 가까웠다.
[나랑 구후 소협이 먼저 들어가는 게 좋겠소.]
안에 느껴지는 기척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호엔 별의별 기괴한 무공이 다 있기에 혹시나 둘의 감각에도 안 잡히는 누군가가 더 있을 걸 걱정해 홍기영과 구후영이 함께 침입하기로 했다.
[좋습니다.]
동시에 여러 사람한테 전음을 보내는 대단한 경지를 가볍게 선보인 둘이 하나는 창문으로 하나는 문으로 안에 침투했다.
안엔 공현이 손에 턱을 괸 채 반쯤 졸고 있었다.
홍기영과 구후영은 재빨리 방 구석구석을 살폈다. 강호에 별의별 기괴한 재주가 있다지만, 홍기영이나 구후영 정도 되는 무인의 눈과 귀를 동시에 속일 만한 재주는 없다고 여겨도 된다.
방에 다른 존재가 없음을 확인한 후, 홍기영이 턱을 살짝 들며 구후영에 손 쓰라고 신호를 보냈다.
은신술을 펼쳐 기척을 모두 지운 구후영은 근처까지 천천히 다가간 다음 벼락같이 양손을 번갈아 놀려 공현의 혈도 칠십여 개를 단숨에 짚었다.
'대단하군.'
구후영은 검법을 익힌 거로 알려졌다. 그런데 지금 혈도를 짚는 모습을 보니 장법에도 꽤 조예가 깊은 듯해 홍기영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들어오시오.]
혈도를 다 짚은 구후영이 밖으로 전음을 보냈다.
그에 막내 궁주와 귀연이 먼저 뛰어 들어왔고, 위종 역시 흥분한 얼굴로 막불손의 부축을 받아 방에 발을 들였다.
"저기, 저기, 저기."
방에 들어온 귀연은 단번에 기관이 있는 곳들을 짚어냈다.
"저 문서를 챙기시오. 그리고 그 옆에, 그거 말고 하나 더 옆에."
칠살문과 결별한 지 꽤 오래지만, 장남이란 이유로 모든 진실을 알아야 했던 위종 역시 칠살문의 것으로 보이는 문서를 하나하나 집어냈다.
그때.
"반역이다!"
점혈 되어 꼼짝도 못 해야 할 공현이 갑자기 머리를 치켜들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어쩜 하는 짓이 똑같지?'
자금성에선 심심해 미치기 직전인 황자나 황녀들이 장난치는 일이 허다하다. 그렇기에 웬만한 소동엔 사람들이 그러려니 하는 게 대부분이다.
물론, 황자나 황녀를 모시는 자들은 당황한 척하며 최대한 장단을 맞춰야 하지만.
그렇기에 진짜 일이 생겼을 땐 '반역'을 외치는 게 상식처럼 굳어졌다. 아무리 철없는 황자나 황녀여도 반역으로 장난을 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혈도를 어떻게 풀었지?"
구후영은 그저 혈도를 짚은 게 아니라 십이경맥 중 여덟 개를 막아버렸다. 아주 꽉 막은 건 아니어서 생명에 지장이 없지만, 웬만큼 내공이 많고 경지가 높아도 이리도 빨리 풀 수는 없는 법이다.
"진짜 네가 청룡대협이었구나."
구후영의 질문과 상관없이 자기 할 말을 마친 공현이 갑자기 입으로 검은 피를 울컥 토해냈다.
"입안에 독이 없었는데."
"미리 삼키고 있었나 보지."
입안은 살필 수 있으나 뱃속까지 꿰뚫어 볼 순 없었다. 게다가 혈도를 짚었다고 방심한 면도 있었다.
"대협, 역용술을 푸는 그걸 해보시오."
위종의 말에 구후영이 공현의 몸에 침 다섯 개를 꽂은 다음 운기했다. 산 자라면 구후영의 기운으로 작은 자극만 줘도 저절로 역용술이 풀리겠지만, 죽은 자는 구후영이 운기까지 해야 했다.
"허!"
홍기영은 일찍 관에 투신한 바람에 강호와 접점이 적었다. 그렇기에 역용술을 구경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공현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자가 완전히 낯선 얼굴로 변하자 더없이 놀랐다.
"와!"
주변에서 뭘 하건 상관하지 않고 기관 해체에만 집중하던 귀연 역시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자가 호 선생일까?"
구후영의 중얼거림에 위종이 나섰다.
"그건 내가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소."
위종이 나서서 시신의 양손을 잡고 잠깐 운기하곤 곧 손을 뗐다.
"현월궁에서 오신 분도 한 번 확인해보시오."
위종의 말에 막내 궁주가 나서서 똑같이 시신의 양손을 잡고 운기했다.
"약하군요."
확인을 마친 막내 궁주가 말했다.
"꼭 이거다 딱 짚어 말하긴 어렵지만, 입문한 지 오 년 정도밖에 안 되는 놈으로 보입니다."
"호 선생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얘긴가?"
홍기영이 질문에 막내 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예 칠살문의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모를까. 어정쩡하게 오 년 정도만 수련한 거면 호 선생 본인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합시다."
생각에 잠겼던 구후영이 결단을 내렸다.
"시신과 필요한 문서 등을 홍 대협의 집무실로 일단 옮깁시다. 그러고 저랑 홍 대협이 여기 매복해서 진짜를 기다려 납치합니다."
"납치한 다음엔?"
"역시 홍 대협의 집무실에 두고 우린 이대로 나가는 거죠. 그리고 날이 밝는 대로 홍 대협이 공현의 실종과 함께 칠살문의 정체를 알리는 겁니다."
"다음엔?"
"원래 계획대로 황궁에 침투한 놈들을 일망타진한 다음, 강호에 남은 칠살문의 잔당을 토벌해야 한다면서 황궁을 나오는 거죠."
구후영의 말에 홍기영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
"잘하면 황궁을 떠나면서 감투 하나 챙길 수 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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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하다.'
홍수가 터지기 전에 개미들은 미리 높은 곳으로 간다. 지진이 오기 전에 쥐들은 굴을 떠나 땅 위로 올라온다.
이성 없이 본능뿐인 짐승들이 여태까지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은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인간도 가끔 개미나 쥐와 같을 때가 있다.
'연 선생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걸까?'
불길함의 근원을 연 선생 탓으로 돌리면서 호 선생은 공현의 집무실에 발을 들였다.
'응?'
공현의 얼굴을 하고 교대를 기다려야 할 수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에 호 선생은 모든 사고를 멈추고 그저 도망치는 데 집중했다. 칠살문 문주가 되고 나서 단 한 번도 위기를 겪은 적 없는 사람임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놀라운 수준의 경각심과 결단력이라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 과정이 아무리 좋아도 결과가 나쁘면 칭찬받기 어렵다.
호 선생한텐 안타깝게도 처음 겪는 위기가 너무 컸다. 그 상대가 무려 사대신협의 하나인 홍기영과 강호에 알려진 어마어마한 명성보다 실속이 훨씬 알찬 구후영이었으니 말이다.
탁, 타다닥, 탁탁.
구후영이 숨을 참느라 시뻘게진 얼굴로 점혈술과 절맥술을 극한까지 발휘했다.
'알면 알수록 놀랍군.'
아까 칠십 개가 넘은 혈도를 단숨에 짚는 걸 보고 더없이 놀랐던 홍기영이다. 그러나 더 놀랄 일이 없을 거라던 예상과 달리 구후영은 아까의 배가 넘는 혈도를 숨도 안 고르고 한꺼번에 점했다.
'싸우면 지지 않겠지만.'
강호에서 사대신협을 두고 누가 더 강하니 아니니 논쟁이 끊임없지만, 사실상 이들 정도 수준이면 강약을 나누기 힘들다.
병사 만 명을 상대하라고 하면 홍기영이 우위를 차지할 거고, 엄청 강한 무인 한 명을 상대하라고 하면 신검이 우위를 차지할 거다.
사대신협끼리 싸우라고 해도 신검과 신창은 서로를 건드리지도 못할 거고, 신장은 남은 셋 누구도 이기기 힘드나 누구한테 지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홍기영이 지지 않을 걸 염두에 둔다는 건 구후영이 어느덧 사대신협의 수준에 근접했다는 방증이나 다름없다.
"호 선생, 공현의 시신은 어디 버렸소?"
호 선생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구후영은 공현이 호 선생이었던 게 아니라 호 선생이 공현이 되었다는 걸 확신했다.
'이놈이 모든 일의 배후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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