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견탈롱破繭脫籠
좌중취객연성객座中醉客延醒客
연회에 취한 객들이 안 취한 날 잡고 술을 자꾸 권하는데,
강상청운잡운우江上靑雲雜雨雲.
강 위의 맑은 구름에 비구름이 섞인 줄도 모르누나.
추석을 맞이해 황궁에 큰 제사가 열렸다.
황제가 건강한 모습으로 제사에 나타난 덕분에 분위기는 더없이 좋았고, 제사가 끝난 후 봉천전에서 문무백관이 참석하는 큰 연회가 열렸다.
구후영은 조용히 구석에 처박혀 평소 구경조차 힘들었던 명주들을 편하게 즐길 생각이었지만.
"자자. 여기 이분은 형부시랑 목근영이오. 여긴 폐하를 치료한 구후 태의네. 인사 나누시게."
처음 보는 홍권이란 정이품의 예부상서가 나타나 구후영의 소매를 끌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인사를 시켰다.
그 바람에 구후영은 연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과 안면을 익혔고, 술도 삼백 잔 넘게 마셨다.
'입은 옷과 마시는 술이 다를 뿐이지, 철혈방이나 낙화문과 똑같구나.'
장소는 황궁이고 걸친 건 비단이다. 명주가 아닌 술이 없고 안주도 최고의 재료를 솜씨 좋은 숙수가 정성스레 요리했다.
연회에 참석한 자들 역시 글공부를 열심히 하여 학식이 가득한 자들인데, 나누는 대화나 하는 짓거리는 강호의 무리인 낙화문이나 철혈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차라리 강호의 무리는 싫으면 싫은 티를 내기라도 하지. 여긴 모두 소리장도笑裏藏刀에 표리부동表裏不同이니.'
임초현이나 옥무영처럼 본모습을 감추고 사는 사람도 간혹 있으나, 강호의 무리는 대체로 솔직한 편이다.
황궁의 연회에서 만난 자들은 대부분이 웃는 가면 하나씩 쓰고 다녔다.
"태의. 그대 덕분에 마마와 태자 전하의 눈에 들었으니 따로 천거한 공을 내세우진 않겠소."
홍권이 잘 다듬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구후영 덕분에 벼슬길이 평탄해져서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그래도 서로 도운 정이 있으니, 이후 내가 청을 하면 매정하게 뿌리치진 마시오."
"소생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다 상서대인 덕분이었군요. 감사의 의미로 한잔 올리겠습니다."
구후영이 처음 안 사람처럼 짐짓 놀라는 척하며 술을 권하자 홍권이 즐거운 얼굴로 넙죽넙죽 받아 마셨다.
"소생이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어 결례를 무릅쓰고 묻겠습니다. 상서대인은 유명한 의원도 아닌 소생을 어찌 믿고 천거한 겁니까?"
홍권은 이미 황후와 황태자한테 눈도장을 제대로 찍었고, 방금 구후영을 끌고 다니면서 위세도 톡톡히 부렸다. 이젠 진실이 알려져도 기탄없기에, 구후영의 질문에 솔직히 대답했다.
"누구더라? 태원부에서 표국을 크게 여는 친구였는데."
홍권이 머리를 흔들며 담진웅을 떠올리려 애썼다.
"혹시 용호표국입니까?"
"맞아. 그런 이름이었던 거 같네. 거기 친구가 은자 천 냥을 들고 태의를 천거해달라고 부탁하더군. 구후 태의가 덕이 깊어 좋은 친구를 뒀소."
그제야 구후영도 사건의 발단을 알게 되었다.
'홍권이 이름도 모르는 걸 보면 알던 사이는 아니고, 일부러 자리를 만들어 날 언급했다는 건데. 담진웅이 그쪽 세력하고 연관이 있는 건가? 장인호와 척져서 이러는 거라기엔, 천 냥이 적은 돈도 아니고.'
구후영이 고민하는 사이 홍권이 비틀거리며 떠났고, 눈치를 살피던 공현이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걸었다.
"조용히 할 얘기가 있소."
구후영은 술병 두 개를 소매에 넣고 공현을 따라 연회장을 떠났다.
"문제가 생겼소."
인적이 없는 곳에 이른 공현이 우심충충한 얼굴로 말했다.
"폐하께서 변심하신 거요?"
삼백 잔 넘게 마시고도 멀쩡하던 구후영의 얼굴이 격동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일 황궁에서 내보내기로 했던 일을 황제가 번복한 줄 알고 놀란 탓이었다.
"그게 아니고, 유근의 출행이 미뤄졌소."
다행히 공현이 말한 문제는 구후영의 문제가 아니었다. 세차게 뛰던 구후영의 심장이 안정을 회복했다.
"취소된 게 아니고 미뤄진 거면, 여전히 기회가 있는 거 아니오?"
복수가 미뤄진 게 조금 아쉽긴 하나, 기회는 여전히 남았다. 게다가 홍기영의 도움을 받아 황궁에 침투해 유근을 죽이는 최후의 방법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닌데."
황후와 태자는 하루빨리 유근을 죽이고 서창을 없앤 다음, 동창을 이용해 자신들한테 불리한 증거를 인멸하고 싶어 마음이 급했다.
그렇기에 구후영에게 별문제가 아닌 일이 공현한테는 큰 문제였다.
"이유가 뭐요?"
"북원의 동향이 심상치 않소."
유근은 이미 자금성을 떠나는 일로 태후와 황제를 설득했다. 그런데 북원이 대규모 움직임을 보인 바람에 일정이 미뤄졌다.
"그게 유근이랑 무슨 상관이오?"
"복잡한 사정이 있소."
태후와 유근의 권력은 사실상 옥새에서 나온다.
장인태감이 된 유근은 태후를 따르고 태후가 시킨 대로 하는 대신의 상주서는 옥새를 쉽게 찍어주고, 아닌 자는 차일피일 미루면서 잘 찍어주지 않았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며 태후를 따르는 무리가 형성되었고, 이들이 알아서 태후의 권력과 이익을 지켰다.
"태의한테 알려줄 수 있는 건."
유근이 자금성을 떠나면 옥새는 태자가 맡게 된다. 병필태감이나 수당태감과 달리 장인태감은 한 명뿐이기에 따로 맡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태후도 원래는 태자가 옥새를 잠시 맡는 것에 동의했는데, 북원의 동태가 심상치 않음을 전해 듣고 입장을 번복해 유근의 출궁을 반대했다.
"유근의 출궁이 내년으로 미뤄졌다는 거요."
평화로운 시기라면 유근이 잠깐 자리를 비우고 태자가 옥새를 맡는다고 큰일이 생기진 않는다. 그러나 북원의 동향이 심상치 않은 지금 옥새는 그저 대신들의 상주서를 찍는 데만 쓰이지 않고 온갖 인사 임명을 결정하는 일에도 쓰인다.
태자가 옥새로 자신을 따르는 사람을 요직에 올리는 동시에 태후의 사람을 쳐내는 게 가능하단 뜻이다.
'이 작은 황궁에서 벌어지는 일이 중원 천지 어디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듯하구나.'
구후영은 내일이면 이 아수라장을 벗어날 수 있단 생각에 속이 후련했다.
"태의의 거취가 애매하오. 홍엽산장은 거리가 멀어 소식을 주고받기 불편하고, 그렇다고 순천부에 머물면 괜한 의심을 살지도 모르오."
'어떻게든 이번 기회를 잡아야 한다.'
자금성에 침입하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유근을 죽이고 싶지만, 덜 위험한 방법이 있는데 굳이 모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잠깐 고민한 구후영이 대답했다.
"당분간 태원부에서 지낼 생각이오."
그에 공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달려 이틀이면 도착할 거리니 괜찮은 것 같소."
용무를 마친 공현이 작별하고 떠나자 구후영은 보름달을 벗 삼아 소매에서 꺼낸 술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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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협, 나요."
낯선 기척에 벌떡 일어났던 구후영은 홍기영의 목소리에 안도했다.
"홍 대협께서 무슨 일입니까?"
"내일 궁을 나간다고 해서 작별도 할 겸, 부탁할 게 있어서 왔소."
"분부하십시오."
"혹시 소협도 산서 무림 연합을 아시오?"
"압니다."
구후영은 장문 승계식 날 일지봉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히 얘기했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
고개를 끄덕인 홍기영이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서창이 곧 사라질 거란 소협의 말을 듣고 나름대로 알아봤는데, 진짜 그렇게 될 듯하오. 그래서 주의력을 동창에 돌렸더니, 동창이 새로운 무림말살지계를 세웠음을 확인했소."
뜻밖의 소식에 구후영은 이가 절로 갈렸다.
"무림인도 늑대일 텐데, 다 없애서 어쩌자는 건지."
구후영의 탄식에 홍기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토끼가 적으면 늑대가 소와 양을 먹고, 늑대가 적으면 토끼가 늘어 풀을 먹고. 중요한 건 균형인데, 환관이란 자들은 그걸 모르는 것 같소."
"근데, 산서 연합이 동창의 무림말살지계와 무슨 상관입니까?"
"동창의 무림말살지계에선 강호인에 등급을 매겼는데, 표국과 무관은 위험등급 최하로 분류되어 제거가 아닌 포섭의 대상이오."
'담진웅은 이 기회에 세력을 확장하려는 거구나.'
표국과 무관 모두 관의 허가가 필요하다. 해마다 관에 바치는 돈이 적지 않기에 가난한 문파는 표국을 열 엄두를 못 낸다.
'연합을 이뤄 품을 자와 버릴 자를 구분한 다음, 무림말살지계를 구실로 표국에 흡수하려고 한 거구나.'
표국연합의 의뢰 대부분은 용호표국을 통하기에, 시기에 맞춰 연합을 해체하고 용호표국 혼자서 다 해 먹으면 수많은 문파를 합병하면서 커진 덩치를 넉넉히 감당한다.
"대협의 분부가 뭡니까?"
"산서 연합이 동창과 연계가 있는지 확인해 주시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구후영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떠나려던 홍기영이 다시 몸을 돌렸다.
"참, 여협이 그대에게 자금성을 나간 다음 오른쪽으로 쭉 걸으라고 했소. 곧게 걸어서 서쪽 성문을 나가면 거기서 기다린다고 했소."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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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구후영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황제와 황후와 황태자와 신한천에게 작별을 고한 후, 공현과 함 소기의 배웅을 받아 자금성을 떠났다.
"구후 장주. 멀리 나가지 않겠소."
"공 태감은 만사여의萬事如意하시고, 함 소기는 전정사금前程似錦(앞에 비단길이 깔리다)하시오."
둘과 작별한 구후영은 시원한 마음으로 오문을 통해 자금성 밖으로 나갔다.
'홀가분하니, 더없이 좋구나.'
단지 문 하나 지났을 뿐인데, 숨이 상쾌하고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사제들은 홍엽산장에서 잘 지내겠지?'
무당과 철혈방이 한층 긴밀한 관계가 될 것을 선포한 그날, 구후영은 연회가 끝나기 바쁘게 긴 편지를 작성해 날이 밝자마자 태원부로 부쳤다.
구후영은 부득이한 상황 때문에 사부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에 대한 사죄와 더불어, 낙화문 제자들을 데리고 홍엽산장에 왔으면 하는 바람을 편지에 담았다.
이대로 북원의 침공이 이뤄질 시 열세 살이 된 몇몇 사제는 징병 대상이 될 거고, 전황이 불리하거나 하면 한두 살 어린 사제들은 물론, 자칫 두전과 임초현마저 징집될 수 있다.
거기에 낙화문 제자들에게 육양공을 가르치고 아수라진에 끼워준다는 규찰대주의 유혹도 있어, 구후영은 낙화문이 양양에 오는 일이 백익무해하다고 판단했다.
사실 구후영은 철혈대회에서 북원이 침공할 가능성이 몹시 크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낙화문의 이전을 염두에 뒀으나, 그간 철혈방과 홍엽산장의 상황도 그다지 명랑하지 않아 주저하다가 드디어 행동에 옮긴 것이었다.
그런 구후영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덕분인지 임초현은 흔쾌히 동의했고, 두전과 경 총관이 어린 제자들을 데리고 바로 출발했다.
임초현도 원래는 낙화문의 장원을 왕가장에 맡기고 바로 뒤따르기로 했으나, 구후영과 현현자의 내공 대결 사실이 산서까지 전해진 바람에 일지봉을 찾는 손님이 끊이지 않아 결국엔 타의로 태원부에 남게 됐다.
'철혈방 문제는 이미 해결됐고, 홍엽산장 역시 안전하다. 장문검이 사라진 사실을 알리고 화산 검종과 관계를 청산하면 낙화문도 걱정이 없다.'
마교가 남긴 했으나, 거긴 다시 엮일 일이 없으니 괜찮다.
'유근을 죽여 구천에 계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넋을 달래드리면 이만 강호를 떠나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도 되겠구나.'
- 작가의말
파견탈롱 - 고치를 찢고 우리를 벗어나다.
이번 편에 설문 하나 하겠습니다.
황궁 파트에서 저는 일부러 단절되고 고립된 느낌을 살리려고 했습니다. 단아가 우호법을 구출하는 부분이나 신장과 만나는 부분 빼면 길게 쭉 이어지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여기서 여러분께 황궁 파트를 읽으실 때 제가 의도한 느낌을 받으셨는지, 받으셨다면 몰입에 도움이 됐는지 방해가 됐는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느낌을 못 받으셨다면 허공에 삽질한 셈이고, 느낌을 받았는데 오히려 몰입을 방해했다면 엉뚱한 데 삽질한 셈이죠. 저는 제가 의도한 바를 알기에 당연히 그런 느낌을 받는데, 이게 잘한 건지 아닌지 전혀 모르겠네요.
댓글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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