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미제성紫微帝星
논어論語에서 이르길.
위정이덕爲政以德 비여북진譬如北辰 거기소居其所 이중성공지而衆星拱之.
라고 하였다.
위정자는 북진처럼 덕으로 세상을 다스려야 하는데, 그리하면 가만히 있어도 뭇별이 둘러싸서 떠받든다는 얘기다.
여기서 북진은 북극성을 말하며, 자미성 혹은 제성으로 추앙받는다.
계절에 따라 밤하늘을 흐르는 다른 별들과 달리 늘 북쪽의 똑같은 위치에 그대로 있는 북극성은, 오지의 탐험가나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자들이 방향을 잃지 않도록 돕는 최고의 길잡이다.
왕중양이 창안한 칠성진은 같은 검법과 심법을 비슷한 경지로 익힌 일곱 무인이 북두칠성을 이룬 다음, 상대를 북극성의 위치로 몰아 강한 일격을 날리는 진법이다.
문제는 왕중양이 남긴 선천기공마저 사라질 정도인데 칠성진이 오롯이 전해질 가능성이 없었다는 거다.
그 탓에 소림의 나한진과 나란히 하는 이름값에 부끄럽게, 종남칠검은 구후영을 압도하지 못했다.
'뭐가 문제지?'
구후영이 만만치 않음을 느끼고 경각심을 끌어올린 순간부터 칠성검진은 막불손이 생각하는 최고의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우위만 가져왔을 뿐 승기는 보이지 않았다.
반면.
'뭔지 알 것 같다.'
귀검동에서 느꼈으나 미처 체화하지 못한 깨달음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며 구후영의 머리를 간질였다.
'역시, 과유불급이구나.'
원철의 여래신장이나 백팔나한진은 지금의 구후영에게도 더없이 벅찬 상대였고, 미처 마음의 준비가 안 됐던 당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천운과 기지로 어찌어찌 잘 해결하긴 했으나, 구후영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진 못했다.
오 년 혹은 십 년 뒤까지 고려하면 별 도움이 안 됐다는 망언을 감히 뱉지 못하겠으나, 목전 상황만 놓고 보면 딱히 틀린 평가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칠성검진은 적절했다.
종남칠검은 개개인의 무력이 백팔나한진을 이룬 어떤 나한보다 강하다. 비록 무공에 관한 이해가 좀 떨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도 상대가 구후영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다.
하지만, 개개인은 강한 무인일지 몰라도 이들은 칠성검진의 핵심을 알지 못했다. 덕분에 적당한 압박으로 구후영이 그간 느꼈으나 미처 깨닫지 못한, 혹은 깨달았으나 미처 정리하지 못한 것들을 현재 수준에 알맞게 체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무작정 높이 올라간다고 좋은 게 아니다. 정학 진인의 가르침처럼 올라가는 길에 주변 풍경을 놓쳐선 안 된다.'
심경의 변화로 구후영은 여유가 생겼고, 덕분에 칠성검진의 문제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북두칠성의 방위에 너무 집착한다.'
칠성은 북두칠성의 움직임을 연구하며 시작한 학문은 맞지만, 오로지 북두칠성에 국한된 건 아니다.
고대엔 천문을 연구하는 학문인 칠성을 왕학王學이라 하였다. 해와 달과 별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해서 언제 파종하고 언제 추수할지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경우, 성난 백성이 왕을 때려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주나라에 이르러 역법歷法이 완성되면서 이 학문은 점차 외면받기 시작했다. 굳이 천문을 몰라도 산수를 아는 자가 역법에 적힌 대로 하면 파종할 시기와 추수할 시기를 정확히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천선과 천추는 늘 북극성과 같은 선에 있다.'
모든 별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지만, 개중 북두칠성만큼 명확한 궤적을 그리며 도는 별은 없다.
'칠성검진이란 이름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핵심은 북극성이다.'
귀검동에서 환각인지 실제인지 모를 귀검진을 상대하지 않았다면 구후영도 이러한 도리를 전혀 깨우치지 못했을 거다.
'이걸 알려줘야 하나?'
소림에서 일지선에 관해 입을 가볍게 놀린 탓에 원철의 자존심을 건드려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었다.
지금은 구경꾼이 수백 명이나 됐던 소림과 다른 양상일지도 모르지만, 종남에 바라는 바가 있어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지.'
구후영은 머리를 어지럽히던 복잡한 생각을 깨끗이 지웠다.
'여긴 강호다.'
강호에선 힘이 최고고.
'힘을 보여 위엄을 세우고, 그다음에 호의를 보이는 게 순서다.'
마음을 정한 구후영은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각답자미脚踏紫微 검지두괴劍指斗魁."
구후영은 자신이 뭘 할지 미리 알려줬다.
그러나 북극성의 방위를 밟고 천추 자리에 있는 막불손을 향해 간결한 찌르기를 펼치는 구후영에게 종남칠검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지괴이허指魁以虛 격표이실擊杓以實."
마찬가지로 막불손을 포함한 국자 머리를 이룬 넷을 공격하는 건 가짜고 실상은 자루를 이룬 셋을 공격함을 미리 알렸지만, 종남칠검은 아무런 대응도 못 했다.
"중성봉월衆星捧月."
마지막으로 구후영은 북극성의 방위를 떠나 종남칠검 사이로 들어가 급조한 초식으로 일곱 무인을 동시에 공격했다.
그에 막불손을 뺀 남은 여섯이 자리를 지키지 못해 칠성검진이 그대로 흩어졌다.
"허탈하군."
구후영이 원철의 여래신장을 상대하고 백팔나한진을 파훼한 사실을 알았다면 이토록 상실감이 크진 않았을 텐데, 아쉽게도 막불손 등은 미처 소문을 전해 듣지 못했다.
"양보해줘서 고맙소."
구후영이 겸양의 말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던 그때.
툭, 툭.
갑자기 던져진 두 물건이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아미타불."
막불손의 발치에 던져진 두 개의 잘린 머리를 본 원경이 저도 모르게 불호를 외쳤다.
'누구지?'
원경 못지않게 놀란 구후영이 고개를 돌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기척이 안 느껴져.'
좀 전까지야 칠성검진을 상대하느라 몰랐다고 여길 수 있지만, 누군지 모를 불청객을 찾기 위해 감각을 곤두세운 지금도 아무런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여러 생각으로 머리와 마음이 복잡한 와중에 의도치 않고도 막불손의 기척을 느꼈던 걸 생각하면 두 개의 수급을 던진 자가 얼마나 대단한 무인인지 유추할 수 있다.
"혹시, 당신들이 기다린 사람이오?"
그나마 옥무영이 침착을 잃지 않고 냉정하게 사태를 분석하려 애썼다.
"아니지. 얼굴을 알았다면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이라고 오해하지 않았을 테지."
옥무영이 자문자답하는 사이, 진한 푸른색 도복을 입은 중년 사내가 고루관의 담장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기척이 안 느껴져.'
구후영은 눈에 보이는데도 기척을 못 느끼는 일에 더없이 당황했다.
"너구나."
막불손이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옥 대협, 원경 대협, 구후 대협. 소도는 종남 장문 막불위요."
불위不爲는 중요한 자리에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를 비난하는 말이다. 다행히 막불손과 마찬가지로 성 덕분에 좋은 의미가 되었다.
"풍옥문 소문주 옥무영이요."
"원경이오."
"구후영이오."
돌아가는 상황이 명확지 않지만, 일행 입장에선 막불손이건 막불위건 적이 아니다.
"거기 머리는 오늘 방문하기로 한 손님의 것이오. 안타깝게도 한 명은 놓쳤소."
"도대체 생각이 있는 것이냐!"
화가 잔뜩 난 막불손이 소리 높여 외쳤다.
"나야말로 묻고 싶구나. 불가근불가원의 원칙은 어디다 버리고 마교랑 손잡으려 했느냐?"
그제야 구후영 등은 현재 사태를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종남 내부도 사정이 복잡한 모양이구나.'
장로인 막불손과 고루관의 노도인 등은 마교랑 손잡으려 했고, 장문인 막불위는 마교의 사자使者를 죽여서라도 막으려 하는 모습이다.
"그럼 비긴 거네? 내가 불가근의 원칙을 어겼다면 넌 불가원의 원칙을 어겼으니까."
막불손의 말에 막불위가 누가 봐도 비웃음이 분명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지, 아니지. 네가 불가근의 원칙을 깬 순간부터 우린 선택을 강요받았다. 난 지금 확실한 선택을 했고. 넌 선택의 여지도 없는 신세고."
백번 맞는 말에 막불손이 빠득 이를 갈았다.
"무슨 얘긴지 같이 알고 싶소."
기회가 생기자 옥무영이 적절히 끼어들었다.
"세 분이 종남을 찾은 목적부터 밝히시오."
막불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미 말했다시피, 우린 천산에 나는 칠 년근 설련을 얻으러 온 거요."
"하하!"
옥무영의 대답에 막불위가 시원하게 웃었다.
"어설프게 똑똑한 자는 되려 자기 꾐에 빠진다더니. 불손아 불손. 참으로 꼴이 가관이구나."
"아니, 본인들만 아는 얘기 말고 나도 알아듣게 설명하시오."
막불손이 화내기 전에 옥무영이 앞질러 말했다.
"현재 천산 마교를 주도하는 세력은 백련교 출신들이오."
막불위가 말했다.
"막 장로와 윤 사숙께선 백련교와 손잡고 거사하려 했소. 그런데 당신들이 찾아와서 천산의 설련을 내놓으라고 하니, 당연히 마교 얘긴 줄 알았을 거요."
구후영은 고개를 돌려 막불손에게 맞는 얘긴지 확인하려 했다.
그에 막불손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련교 전대 교주가 신검 손에 죽었소. 마교가 소림을 두 번이나 불태웠던 것도 사실상 백련교가 주도했던 거고. 거기에 여기 구후 대협은 천마의 제자라는 소문이 무성하오."
하필이면 백련교와 사이가 안 좋을 법한 셋이 찾아온 바람에 노도인도 막불손도 제멋대로 오해했던 거였다.
"세 분은 진짜 약재 얻으러 온 거요?"
"그렇소."
구후영의 대답에 막불손은 허탈한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명명 중에 하늘의 뜻이 있는 게 분명해. 네가 멍청한 오해를 한 덕분에 우리에겐 살길이 생겼다."
신나서 막불손을 비웃던 막불위가 갑자기 정색하며 화제를 돌렸다.
"귀한 손님께 현재 사태를 설명하는 게 우선이겠군. 일단 안으로 드시오."
막불위는 아까 차를 마셨던 작은 객청이 아닌 태상노군을 모신 가장 큰 도관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 마교가 화산을 치려 하오."
"이유가 뭐요?"
옥무영이 의문 가득한 얼굴로 질문했다.
"종남과 손잡고 화산을 지워 혼란을 일으킨 다음, 전력을 다해 장성의 관문을 열어 북원 기병을 안으로 들이려는 속셈이오."
막불위의 말에 옥무영이 고개를 저었다.
"마교가 원하는 건 강소와 절강에 있는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들었소. 이런 식이면 돌아가더라도 자리 잡기 어려울 텐데."
구후영이 거듭 깨달았던 것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데 무력이 다가 아니다. 마교가 북원과 결탁해 중원을 어지럽힌다면, 돌아가서도 백안시를 당할 게 뻔하다.
"국호가 명에서 원으로 바뀐다면 안 될 것도 없지 않소?"
옥무영이 또 고개를 저었다.
"명태조는 이십만 군사로 황제가 됐소. 육십만 병력의 진우량 말고. 원나라는 망하고도 백만이 넘은 기병이 있었소. 싸울 군대가 없어서 패퇴한 게 아니라 세상 민심이 그렇게 된 거요. 토목보 사건 때 북원이 황제를 생포한 적도 있소. 그래서 명나라가 무너졌소?"
"맞는 얘기요. 그러나 북원과 마교는 장강 북쪽만 차지할 생각이오. 예전에 금나라나 요나라가 했던 것처럼 말이오."
살길 하나 열어주면 원을 싫어하는 뜻있는 자들이 남쪽으로 가며 북쪽의 우매한 백성을 다스리기 한결 쉬워진다. 금과 요가 부족한 통치력으로도 국가를 잘 운영했던 것처럼.
"그렇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지겠군."
계속 가로로 움직이던 옥무영의 고개가 처음 상하로 끄덕여졌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마교를 저지하는 건 어떻소?"
막불위가 제안했다.
- 작가의말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북한이 친일파를 청산한 게 과연 순수하게 매국노를 없애자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혹시 자신들의 통치에 방해되어서 없앤 게 아닐까? 더 나은 통치를 위해 친일파를 지배 계급으로 받아들였던 한국과 같은 마음인데 다른 방식이 아니었을까.
답은 알 수 없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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