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강어검舌强於劍
문파는 같거나 비슷한 무공을 익힌 자들이 모여 사승으로 이어지는 무림 특유의 집단이다. 처음엔 주로 혈연으로 뭉쳤으나 다른 문파와의 다툼에서 이기기 위해 재능이 뛰어난 자를 제자로 받기 시작했고, 명에 이르러서는 세가 형태의 문파가 몇 개 남지 않았다.
대략 송나라 때부터 문파가 우후죽순처럼 생겼는데, 원나라와 명나라를 걸치면서 강호엔 불문율이 몇 개 생겼다.
남자의 고환을 노리지 않기. 여자의 유방을 때리지 않기. 나이보단 배분을 따지기. 타인의 무공 수련을 훔쳐보지 않기. 다른 문파의 무공을 훔치지 않기. 자파의 무공을 밖으로 유출하지 않기.
문파를 임의로 떠나려는 제자는 무공을 폐하기.
낙화문을 떠나 표국을 세우기로 한 이들이 장문검을 탐낸 이유다. 호비가 장문검을 얻어 장문이 되고 임초현과 쓸모없는 제자들을 문파에서 축출하는 게 그림이 좋다.
"그럼 문파는 어찌해야 하는 거요? 장문이 어린 제자를 구하다가 다쳐서 무공을 잃으면 헌신짝처럼 버리는 게 문파요?"
불타는 기둥을 막은 건 팔이지만, 심하게 다친 건 얼굴과 손이었다. 얼굴은 화상으로 살이 뒤집혔고 손은 어떻게 다친 건지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알고 보면 다 네 탓이다. 네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네 사부도 함께 표행에 나갔고, 그러면 다치는 일도 없었겠지."
"대신 열 명의 어린 제자는 불에 타서 죽어도 괜찮고?"
밥만 축낸다고 모질게 버리긴 했지만, 죽었으면 싶게 미운 건 아니었다. 구후영의 추궁에 호비도 말문이 막혔다.
"담 표두. 그만 망아지를 내주시오. 그간 사부랑 사제들이 신세 진 것과 망아지가 먹은 여물 값은 넉넉히 치르겠소."
"은자 백 냥이오."
구후영은 품에서 은자 백 냥짜리 전표를 꺼내 담청산에게 건넸다. 상대가 감당하기 힘든 액수를 불러서 어떻게든 망아지를 차지하려 했던 담청산 입장에선 진퇴양난이었다.
안 받자니 자기 입으로 한 말이 있고, 받자니 이대로는 용호표국의 명성이 진창에 떨어진다. 어려움에 빠진 자를 돕고 은자 백 냥이나 받았다는 소문이 강호에 퍼지는 순간, 표국 깃발을 접어야 한다.
궁지에 몰린 담청산은 뒤로 슬쩍 물러나며 장인호한테 눈치를 줬다.
아버지를 제치고 차기 표국주로 낙점받은 자다운 대처였다.
"여기가 어디라고 그깟 은자로 유세를 떠는 거냐?"
담청산의 속셈을 이해한 장인호가 버럭 호통을 치며 구후영과 담청산 사이에 끼어들었다.
구후영은 품에서 백 냥짜리 전표 하나를 더 꺼냈다.
"내가 용호표국을 얕잡아 본 건 아니고, 담 표두께서 은자 백 냥이라고 하니 백 냥만 꺼냈던 거요. 일부러 용호표국을 무시하려고 했던 건 아니니 노여움을 푸시오."
말을 마친 구후영이 앞을 막은 장인호를 툭 밀치고 담청산에게 다가갔다. 힘도 내공도 구후영보다 세기에 검 없으면 자신이 이긴다고 생각했던 장인호는 형편없이 밀려난 일이 믿기지 않아 그대로 굳어버렸다.
'똥 밟았다.'
구후영이 처음에 꺼낸 백 냥이 용호표국을 진창으로 미는 거라면 추가로 꺼낸 백 냥은 아예 진창에 못 박아버리는 일격이었다.
열 살도 되기 전부터 할아버지를 따라 표행에 나가며 화살이 얼굴을 스쳐도 눈 한 번 안 깜짝했던 담청산이거만, 구후영이 내미는 전표 두 장 앞에선 손발이 후들거렸다.
"여봐라. 마구간에서 털 붉은 망아지 풀어서 이분께 돌려드려라."
말을 마친 담청산이 소매를 떨쳐 객당을 떠났다.
"참. 똑똑한 줄 알았는데 그깟 망아지 때문에 용호표국의 심기를 건드리다니."
용호표국의 담 표국주는 태원부뿐이 아니라 산서 무림에서도 명망이 매우 높다. 실력도 산서 경내에선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다.
"난 당신들이 안 똑똑한 건 알았는데 이토록 멍청할 줄은 몰랐소."
구후영은 호비가 뭐라 하기 전에 품에서 낙화검법의 비급을 꺼냈다.
"본파의 낙화검법 비급이오. 약 천칠백 년 전에 작성한 건데 문파의 사조들이 보살폈는지 우연히 찾아냈소."
호비는 물론 장인호도 입을 딱 벌리고 아무 말도 못 했다.
"이 비급으로 수련했더니 실력이 일취월장했소. 솔직히 당신 같은 수준은 열 명이 덤벼도 이길 수 있소."
검술만 따지면 임초현 다음으로 대단했던 구후영이다. 내공 사용을 금하는 대련에선 사숙들도 구후영을 피했다.
그런데 문파의 비급까지 찾아냈다고 하니 호비는 구후영의 도발에 응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솔직히 일류가 간당간당한 경지기에 운기가 조금만 마음대로 안 돼도 구후영의 검에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
"참 안타깝소. 이 비급에 낙화검법의 정수가 다 들었는데."
화를 못 내고 꾹 참는 호비를 구후영이 연신 도발하던 중에 몸집이 단단한 사내가 나타났다.
"당신이 말한 망아지를 데려왔소."
"고맙소. 그런데 혹시 관아로 가는 길을 아는 사람 한 명 빌려줄 수 없소? 내가 길치라서 그러오."
"관아는 무슨 일이오?"
담청산에게 구후영이 만만한 자가 아님을 전해 들은 사내는 관아라는 소리에 걱정이 치밀었다.
"어떤 좀도둑이 내 백 냥짜리 전표를 훔쳐서 전장에서 은자로 환전했다고 하오. 거기에 담 표두 이름이 나와서 이렇게 찾아왔는데, 은자 이백 냥도 마다하는 모습에 내가 잘못 알았나 싶어서 관아에 고발하려고 그러오. 그러니 담 표두한테 내 사과를 꼭 전해주시오. 한쪽 말만 듣고 따지려고 찾아왔던 무례를 용서해 달라고 말이오."
"자, 잠시만 기다리시오."
사내가 허둥지둥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구후영이 탄식했다.
"왜 저러지. 마치 담 표두가 내 전표를 훔치는 일을 도운 것 같잖아. 인호야, 안 그래?"
구후영의 질문에 장인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관아가 제일 골치 아프게 여기는 게 강호인이라면, 강호인이 제일 두려운 것도 관아다.
강호인은 죄를 지어 잡힌 순간부터 지옥이라고 보면 된다. 관아에서 강호인을 잡으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피파골을 뚫어 사슬로 꿰는 거다. 아무리 내공이 대단해도 피파골을 뚫리면 양팔을 마음껏 움직일 수 없기에 저항력을 거의 잃어버린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강호인은 하루에 물 한 접시에 만두 하나만 먹인다. 게다가 다른 강호인이 구하러 올까 봐 반역자의 도당이나 그에 준하는 죄를 지은 자들만 가둔다는 섬이나 황무지의 감옥으로 보낸다.
강호에 악명을 떨친 흑도의 흉악범들도 협객한테 잡히면 관아로 끌려갈까 봐 바로 벽에 머리를 박거나 제발 죽여달라고 애걸한다.
"유저야, 아니, 대사형. 그게 그러니까. 내 말 좀 들어봐."
"그럴 시간 없어. 은자 백 냥이 적은 돈도 아니고. 빨리 관아에 말해 찾아야지. 인호 이야기는 일 끝나고 천천히 들을게."
"유저야. 내가 이렇게 빌마. 제발, 제발 일 크게 만들지 마라."
호비가 무릎을 꿇었다.
현재 임초현을 버린 사형제들의 유일한 희망이 장인호다. 내공이 깊어 고수가 될 가능성이 크고 담 표국주의 애손녀와 혼인하여 표국 일에 큰 목소리를 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들이 세운 표국이 북방 표국 연맹의 일원이 되는 건 문제도 아니고, 알짜배기 의뢰만 골라 받아 금세 규모를 키울 수 있다.
그런데 장인호가 은자 훔친 죄로 관에 잡혀간다면?
빠른 출세와 영달을 꿈꾸던 이들에게 구후영의 말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그때 담청산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허겁지겁 나타났다.
"유 소협. 전표라니 무슨 말이오?"
"내 전표를 분실해 전장에 찾아갔는데 누군가가 환전했다고 들었소. 도둑이 본명은 안 썼을 게 분명하니 신분 보장인을 물었는데 용호표국의 담청산이라고 했소."
담청산의 꽉 쥔 주먹에 푸른 핏줄이 돋보였다.
"백 냥이라고 했소? 용호표국의 청명淸名과 연관된 일이니 일단 내가 은자 백 냥을 드리리라. 어떻게 된 일인지는 내가 직접 자초지종을 알아내서 처리하겠소."
"그건 안 될 말이오. 담 표두도 피해자인데 그리하면 내가 미안하오."
담청산은 구후영의 뺨을 마구 때리며 제발 은자 백 냥을 받아달라고 협박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대 사부와 사제들을 한동안 돌봤던 걸 생각해서라도 여기서 멈춰주시오."
구후영은 담청산을 무시하고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일어서지 않는 호비에게 말했다.
"호 선생. 내가 작년에 안문도에서 명검 세 자루와 야장이 만든 검 열 자루, 도제가 만든 검 두 자루를 사 온 게 있소. 사부께 물으니 용호표국을 급히 나오느라 미처 못 챙겼다고 들었는데, 호 선생이 어디 있는지 행방을 아신다면 가르쳐 주시오."
"기다려. 내가 금방 다 찾아올게."
채 반 각도 안 되어 구후영이 작년에 등에 메고 왔던 검들이 앞에 곱게 쌓였다.
구후영은 서른 냥과 마흔 냥짜리 명검을 뽑아 양손에 잡았다.
"명인의 검이 맞는지 확인이나 해볼까?"
검 두 자루를 허공에 던진 구후영은 등에 멘 천공교검을 뽑아 가로 휘둘렀다.
챙그랑.
동강 난 두 자루 검이 바닥에 떨어진 건 구후영의 검이 검집 안으로 모습을 감춘 뒤였다.
"겉은 명인의 검이 맞는데 속은 썩었어."
호비와 장인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때. 어떤 사내가 객청으로 달려 들어왔다.
"왕 공자께서 왕림하셨습니다."
"어서 호연당으로 모시거라. 넌 빨리 은자 백 냥을 찾아서 이분께 내드려라."
시퍼런 얼굴로 몸집이 단단한 사내에게 분부한 담청산은 구후영에게 눈길 한번 안 주고 사라졌다.
'적당히 할 걸 그랬나?'
용호표국이 산서 무림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하면 담청산과 척을 지는 게 낙화문에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호비와 장인호를 생각하면 어차피 척을 진 거나 마찬가지기에 이미 엎지른 바에 후회하지 말자는 생각이 치밀었다.
잠시 후. 몸집이 단단한 사내가 오십 냥짜리 은원보 두 개를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구후영에게 은자 백 냥을 받아 전장의 전표 일은 더는 추궁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아냈다.
구후영도 더는 트집 잡을 명분이 없어 내용을 확인하고 곱게 지장을 찍었다.
그때.
영영 안 볼 것 같은 얼굴로 떠났던 담청산이 다시 등장했다.
"동생. 정말 여기 있었군. 어제 부탁한 장원 찾았으니 지금 당장 가보세."
용호표국을 찾은 왕 공자는 다름 아닌 왕제상이었다. 구후영은 그저 여자 밝히는 한량 정도로 알았지만, 매형 중 형부시랑이 있고 안문도 절도사도 있는 대단한 집안의 자식이다.
"그냥 객잔에서 기다리시지 다리 아프게 여기까진 왜 행차했습니까."
"매물로 나온 장원이 근처라서 그래. 객잔 침대 그거 딱딱해서 자기도 불편하겠던데. 어서 장원으로 들어가야지."
"대형께 폐만 끼치네요."
"무슨 소리야. 내 목숨 구해준 건 잊었어? 구명지은은 삼생에 걸쳐 갚는다고 하는데 난 이번 생에 다 갚아버리고 싶구나."
둘의 대화가 진행될수록 담청산의 얼굴이 점점 딱딱해졌다.
왕제상은 딱히 용호표국의 사업에 도움이 되는 자가 아니다. 그러나 심기를 건드리면 용호표국의 일에 흙탕물이 아니라 똥을 뿌릴 정도는 되는 인물이다.
"두 분 편히 움직이시게 가마나 마차를 준비하거라."
"바로 근처라고 하니 굳이 신세 지지 않겠소."
담청산의 호의를 거절한 구후영은 부러진 명검 두 자루를 버려두고 떠났다.
- 작가의말
설강어검 - 혀가 검보다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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