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백냥黃金百兩
드물게 타고난 심계로 모든 일이 생각한 대로 술술 풀리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천재의 모습을 산무유책算無遺策이라고 칭송한다.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여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흑철이 그랬다.
어릴 적 타고난 근골 덕분에 곤륜파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곤륜의 무공이 자신과 맞지 않음을 깨닫고 대소궁에 가서 대수인에 도전했다.
시험을 통과한 덕분에 대수인에 입문했으나, 몇 년 안 지나 한계에 부딪혔다.
그에 흑철은 대수인의 대성에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명교에 가서 흑 장로의 제자가 되었고, 흑 장로의 독문절기인 흑사장과 대수인을 결합하여 강호의 일절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무공을 얻었다.
그때 흑철의 나이가 고작 열아홉이었다.
순풍에 돛을 단 흑철의 인생에 천강구절이란 천재지변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명교 교주의 성이 아마 흑씨였을 것이다.
고작 열아홉에 명교 제일의 고수가 되며 호기가 하늘을 찔렀던 흑철은 갑자기 나타나 교주가 되겠다고 선포한 천강구절과 꼬박 사흘을 내리 싸웠다.
천강구절이 걸어온 행보를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문제는 천강구절이 내공을 봉인하고 장법만 썼다는 것이다.
곤륜파의 내공에 대소궁의 외공, 대성은 포기했으나 소성을 넘은 대수인에 흑 장로의 흑사장을 결합한 독문장법을 유감없이 펼쳤음에도 천마의 옷깃 한 번 제대로 건드리지 못했다.
흑철 인생에서 유일한 실패였다.
그러나 괜찮았다. 그 후 천마로 불린 그자는 인간의 형상을 했으나 홍수나 가뭄 같은 무언가였으니까.
무공으로 최고가 될 수 없으면 다른 거로 해보자.
흑철은 낙심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문제는 천강구절이란 별호답게 천마는 뛰어나지 않은 게 없었다.
몇 년을 방황하던 흑철은 결국 청부사가 되기로 했다.
철저히 돈만 좇는 인간이 되자.
천마라면 절대 못 할 일을 찾아낸 흑철은 우선 재물을 풀어 수하를 모았고, 수하들이 물어온 정보를 통해 직접 발품을 팔아 의뢰를 받아냈다.
그렇게 몇 년 고생하고 나니 사람들이 알아서 흑철을 찾기 시작했고, 언젠가부터 황금백냥으로 불렸다.
황금 백 냥 이하의 의뢰는 받지 않는다는 소문에서 비롯한 별호였다.
그런 흑철에게 이번 의뢰는 특별했다.
구후영을 죽이면 황금 삼천 냥. 원경을 죽이면 황금 삼천 냥. 둘 다 죽이면 황금 일만 냥.
선금으로 이미 황금 삼천 냥을 받았다.
'하나만 죽이는 건 어렵지만 가능하지.'
기습으로 한 명만 죽이는 건 어찌어찌 가능하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둘 다 죽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했다.
황금 만 냥이 탐났던 흑철은 구후영 일행을 지켜만 보다가 유근과 모용용을 납치해 대백산의 이름 모를 골짜기로 유인했다.
'놈들의 목표는 이자다.'
흑철은 구후영 등의 목표가 모용용을 구출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게 아니면 유근의 무리가 고작 다섯 남은 상황에 변죽만 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저기 생각지도 않은 미끼 하나 있고.'
모용용을 묶어둔 곳에서 약 십 장 거리의 나무 위에 숨은 모용연을 떠올리며 흑철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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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후영 일행이 골짜기에 도착해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유근이었다.
아혈을 짚인 유근은 구후영 일행을 보자마자 손뼉을 힘껏 치며 버둥거렸다.
그에 구후영이 유근에게 다가갔다.
"태감. 내가 누군지 아시겠소?"
유근이 고개를 저었다.
"맞다. 나랑 태감은 만난 적이 없었지. 내가 폐하를 치료한 의원 구후영이오."
그에 유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구해주길 바라오?"
흑철이 상자를 앗아가려 하자 유근이 저항했고, 짜증이 치민 흑철이 유근을 힘껏 던졌다.
그 결과 유근은 다리가 부러졌고 머리 가죽이 째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대백산 같은 궁벽한 곳에 혼자인 것만 해도 무서워 죽을 지경인데, 다리가 성치 않고 피도 흐르고 있으니 우연히 만난 누군가가 자신을 구해주길 바라는 게 당연한 일이다.
"잘 들어보시오."
구후영은 그간 육합전성으로 읊었던 유근의 죄명을 반복했다.
그에 유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 단아가 작은 돌멩이를 던져 유근의 아혈을 풀어줬다.
"컥."
아혈이 풀리자 잠깐 캑캑거린 유근이 억울함 가득한 얼굴로 질문했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요?"
그 말에 화가 잔뜩 치민 장선이 나서려 했으나 구후영이 제지했다.
"태감은 잘못이 없소."
구후영의 말에 모두 놀랐다. 복수하러 온 사람들은 물론이고, 삶 자체가 잘못인 유근 역시 구후영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나도 내켜서 이러는 거 아니오. 그러나 신하 된 도리로 어찌 폐하의 명을 어기겠소."
"거짓말."
유근의 눈이 순식간에 빨갛게 충혈됐다.
"그게 아니면 한낱 의원인 내가 어찌 태감의 치부를 이리도 자세히 알겠소."
구후영의 말에 유근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고, 처음엔 맑던 눈물이 어느새 붉어졌다.
"폐하께서 신선이 되길 원하는데 신하 된 자로서 어찌 그리도 참담한 짓을 벌였단 말이오. 폐하께선 태감이 최대한 자신과 멀어진 곳에서 생을 마감하길 바랐소."
천천히 전후 사정을 훑었으면 황제가 자신을 버릴 리 없음을 깨달았을 테지만, 유근은 그간 겪은 고난과 부러진 다리에서 오는 통증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이 홍엽산장에 저지른 짓을 까맣게 잊고 있던 탓에 생판 남인 구후영이 자신을 적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폐하. 소신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끝끝내 무너진 유근이 양손으로 자기 목을 졸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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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찝찝했다.
그러나 곧 개운해졌고, 이어서 커다란 희열이 덮쳤다.
희열 뒤엔 당연하다는 듯이 슬픔과 유감이 몰려왔다.
복잡한 감정을 수습한 장선이 서쪽으로 무릎을 꿇고 홍엽산장이 있음 직한 곳을 향해 절을 올렸다.
"사부. 이제 구천 아래서 눈을 감으십시오. 동생도 이제 편히 떠나시게. 홍엽산장과 구후가의 핏줄은 이 장선이 목숨 바쳐 지킬 테니."
절을 마치고 일어선 장선이 죽은 유근의 얼굴에 가래침을 퉤 뱉고 돌아섰다. 허리띠를 풀고 저 피둥피둥한 얼굴에 오줌을 갈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단아 때문에 억지로 참았다.
"지금은 흑면수가 왜 나타났는지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복수의 여운에 빠진 사람들을 끄집어 올린 건 단아였다.
"우리 복수를 방해하려는 건 아닙니다."
일행이 노리는 게 유근의 목숨임을 알았다면 골짜기 입구에 이렇게 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놈은 돈으로 움직입니다. 그게 배후라면 공자의 생각대로 강호를 은퇴하고 잠적하면 그만이지만, 마교나 다른 세력이라면 홍엽산장이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흑철이 의뢰로 움직인 건지, 맞는다면 누가 의뢰했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놈은 경공과 장법 모두 뛰어나오. 다들 긴장을 늦추지 말고,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간단히 결의를 다진 일행이 골짜기 안으로 조심스럽게 진입했다.
"아니, 뭐가 이리 오래 걸린 거요?"
골짜기는 꽤 깊었다. 일행이 느릿하게 움직인 것도 있어 일각 넘게 걷고서야 나무에 묶인 모용용과 약 십 장의 거리를 둔 흑철의 모습을 확인했다.
"왜 보자고 한 건지 얘기해줄 수 있소?"
구후영이 나섰다.
"의뢰 때문이오."
"어떤 의뢰고 누가 의뢰했는지 얘기해주면."
단아가 품에서 전표를 꺼냈다.
"천 냥 드리지요."
은자 천 냥이면 황금으론 최소 이백 냥이다. 마음이 동한 흑철은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거짓말만 안 하면 되지.'
말 몇 마디로 은자 천 냥 벌 기회다. 자신뿐이 아니라 천하의 누가 와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합리화를 마친 흑철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에 단아가 전표를 던졌다.
종이는 마치 꽃을 본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흑철의 손에 정확히 내려앉았다.
"암기술의 경지가 대단하군."
진짜인지 꼼꼼히 확인한 흑철이 전표를 차곡차곡 개여 나무 상자에 넣었다.
제가장이 만든 가짜 책자를 담은 바로 그 상자였다.
'아주 헛짚진 않았군.'
일행의 시선이 상자에 집중된 걸 확인한 흑철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들은 나타난 이래 모용용에게 눈길을 두 번 주지 않았다. 일행의 목적이 모용용이란 판단이 틀렸다는 건데, 상자에 관심을 주는 모습을 보니 여전히 승산이 남은 것 같았다.
"얘기하시죠."
"연 선생이라는 작자였소. 역용술을 쓴 걸 보면 진짜 이름이 아닐 가능성이 크지만."
"의뢰 내용은?"
흑철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구후영의 목숨. 황금 삼천 냥."
일부나마 진실을 말한 건 흑철의 자존심이었다.
화산에서 종남의 돈을 받고 백련교의 의뢰금을 돌려준 것도 의뢰에 있어서 만큼은 진실하자는 흑철의 원칙 탓이었다.
그 와중에 강석을 공격한 건, 사실상 마교를 지탱하는 기둥이 혈포규찰대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천마의 아들인 배산보다 혈포규찰대를 더 믿었다. 어쩌면 혈포규찰대에서 새로운 천마가 나타나길 바란다고 흑철은 추측했다.
흑철의 추측이 맞았는지 틀렸는지와 상관없이 혈포규찰대와 가장 큰 세력인 백련교의 사이가 틀어지면 마교는 더 엉망이 될 거고, 어쩌면 흑철에게 교주가 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천마한테 교주 자리를 뺏기고 몇 년 방황했던 젊은 흑철에게 자그마한 마음의 보상이 될 것이다.
"의뢰를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까?"
단아가 말했다.
"선수금을 받아서 그건 좀."
"화산에서도 종남의 돈을 받고 백련교의 의뢰를 포기했다고 들었습니다. 의뢰를 포기하는 대가로 황금 삼천 냥을 드리고, 추가로 황금 삼천 냥짜리 의뢰를 드리죠."
단아의 회유의 흑철은 마음이 동했다.
'구후영이라는 자. 천마의 제자란 소문이 무성하던데.'
흑철은 천마가 무섭다.
무공 따위가 아니라 자신의 속내를 낱낱이 안다는 듯한 그 무심한 눈이 무서웠다.
마교의 최고수, 천마 이후엔 마교의 이인자로 불리는 흑철을 늘 불쌍히 여기는 눈으로 내려다보는 천마가 너무 무서웠다.
'천마는 모르는 무공이 없으니 검 쓰는 제자를 받을지도 모르지.'
황금 만 냥을 포기하고 육천 냥을 선택할지 말지 흑철이 망설일 때, 단아는 오히려 확신을 얻었다.
'저놈, 숨기는 게 있다.'
사실 단아는 황금 육천 냥이 없다. 그저 육천 냥을 불러 흑철의 반응을 보려 했던 거다.
'아무래도 의뢰금이 육천 냥보다 많은 거겠지.'
그렇게 흑철이 치열하게 고민하고 단아는 오히려 흑철을 죽일 결심을 굳히던 그때.
모용연이 움직였다.
미리 대백산에 왔으나 정작 가짜 책자를 찾지 못한 모용연은 모용용이라도 구하자는 생각에 겁 없이 근처까지 접근해서 기회를 노렸다.
그러다 흑철과 구후영 일행이 손잡으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다급한 마음에 움직이고 말았다.
흑철은 처음부터 모용연의 존재를 알고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상대가 움직이자마자 바로 반응했고, 모용용을 묶은 밧줄을 풀려는 모용연을 향해 대수인을 펼쳤다.
쿵!
흑철의 대수인이 높은 곳에서 떨군 바위가 땅에 박히는 것 같은, 혹은 단단한 박달나무로 가죽 북을 때리는 듯한 묵직한 소리를 냈다.
- 작가의말
흑철의 불우한(?) 유년 시절을 그려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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