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지지형凌遲之刑
본시동근생本是同根生
같은 뿌리에서 났는데,
상전하태급相煎何太急
왜 그리 급히 삶는 것인가.
다섯 대의 마차가 일각 간격을 두고 순차적으로 요새를 벗어났다. 남쪽, 북쪽, 서쪽으로 한 대씩, 모용세가가 있는 동쪽으론 두 대가 움직였다.
"날 끌어들인 걸 후회하게 해줄 거야."
마차의 행렬을 지켜보던 용 환관이 모용용 곁에 다가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네가 직접? 아니면 제가장의 힘으로?"
모용용의 반격에 잠깐 움찔했으나, 용 환관은 곧 피식 웃어버렸다.
"생각보다 귀가 밝구나. 그러나 네가 안다고 딱히 달라지는 일도 없을 거야."
용 환관의 기대와 달리, 모용용은 속으로 몰래 환호하고 있었다.
'모용연이 내 뜻대로 움직인 모양이구나.'
모용연을 딴 데로 보낸 건 제가장이 꾸미는 일을 훼방 놓아 유근을 실패하게 하려는 목적이 주였지만, 모용연과 소마귀의 만남을 확실히 차단하려는 의도가 컸다.
그날의 모용연은 진심으로 보였지만, 소마귀의 혀는 검은 걸 희게 바꿀 정도다. 모용연이 다시 소마귀의 감언이설에 넘어가면 예상한 결과가 절대 나올 수 없으니, 둘이 서로 안 보는 게 모용용에겐 최선이었다.
'게다가 제가장의 힘이 엄청나다는 것도 확인했고.'
대백산은 유근과 금의위의 천호 그리고 모용용까지 셋만 안다. 그런데 지금 사태를 보니 소마귀의 입에서도 똑같은 이름이 나온 듯했다.
부친의 마지막 행적지가 대백산이 아닌 걸 확실히 아는 모용용으로선 누군가가 정보를 누설했다고 확신할 수 있었고, 십중팔구 금의위의 천호라고 추론했다.
열심히 사태를 분석하는 모용용의 귀에 소마귀의 득의에 찬 말소리가 들렸다.
"일이 끝나면 넌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
"놈들이 움직입니다."
다섯 대의 마차와 함께 요새 주변을 서성이던 수상한 무리가 하나둘 사라질 때, 구후영 일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유근이 단순히 말동무가 필요해 먼 순천부에서 용 환관을 불러온 게 아닐 테니, 첫 출행에 반드시 함께할 거란 판단 덕분이었다.
"요새에 비밀 통로 같은 건 없겠지?"
장선이 중얼거렸다. 그저 유근이 죽으면 된다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장선은 어떻게든 자기 손으로 복수를 마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유달리 조바심을 냈다.
"요새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죠."
자신이 괜한 소리를 했다는 생각에 장선이 멋쩍게 웃었다.
그때, 어둠을 틈타 한 무리 수상한 작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토끼가 굴에서 나왔습니다."
단아가 확신에 차 말했다.
"저들이 사라진 다음 가서 냄새를 맡으면 확실하겠군."
수상한 무리엔 유근으로 보이는 살찐 사람이 있고, 용 환관으로 보이는 소년도 있었다. 풍성한 옷으로도 감추지 못한 칼자루가 보였고, 얼굴까지 가릴 정도로 챙이 큰 모자를 푹 눌러쓰고 몸도 빈틈없이 가린 작자가 셋 있었다.
개중 걸음걸이가 불편한 듯 보이는 사내는 모용용이고, 남은 둘은 흑갑호위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용 환관보다 키가 크나 형편없이 호리호리한 놈은 유근의 수발을 들어줄 새끼 환관이 분명해 보였다.
"총 스물여섯에서 금의위 스물, 흑갑호위 둘."
유근은 무공을 모르는 게 확실하고, 모용용은 손이 뒤로 묶인 것으로 보인다. 그게 아니어도 일행을 방해할 리 없고.
용 환관의 무공은 미지수지만, 몇 년 사이에 대단한 발전을 보이진 않았을 거다. 새끼 환관 역시 나이도 어리고 걸음이 가벼운 게 절대 무공 고수로 보이지 않았다.
"다른 무리가 붙을지도 모릅니다. 정체를 들키지 않는 게 최우선이니 반나절 정도 거리를 두고 움직이겠습니다."
단아의 결정에 만장일치로 동의한 일행은 새벽이 밝고서야 추적향의 냄새를 따라 유근 무리를 천천히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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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사흘이 지나 일행은 유근의 무리가 눈에 보이는 거리까지 접근했다.
"흑갑호위가 문제긴 문제네."
일행 중 흑갑호위의 암기가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다.
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구후영도 눈이나 목 혹은 심장과 가까운 곳에 암기를 맞으면 위험한 건 마찬가지다.
금강인을 이룬 원경 역시 같은 처지다.
외공 고수는 둔기에 강하고 베기에도 꽤 강하다.
그렇다고 창으로 찔러도 살에 안 박히는 건 아니다. 상대 수준이 낮으면 작은 몸짓으로 찌르기도 흘릴 수 있지만, 다른 공격과 달리 찌르기에 유난히 취약한 건 사실이다.
그렇기에 강한 힘으로 쏘아지는 독 바른 암기는 원경도 몸으로 버틸 순 없다. 괜히 살에 조금이라도 박혔다간 독으로 죽을 테니까.
"그래서 말인데, 조급해하지 않고 차근차근 숫자를 줄여나가는 게 어떻습니까."
"찬성하오."
장선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 사람을 하나씩 처리하여 유근의 피를 마르게 하는 것도 좋은 복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우선 저 환관부터 시작하죠."
일각 후.
유근 일행은 새끼 환관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이 은혜도 모르는 짐승의 새끼가."
걷는 내내 수상한 기척은 없었기에 유근은 새끼 환관이 고생하기 싫어서 제 발로 도망쳤다고 섣불리 판단했다.
이러한 오판은 유근이 흑갑호위와 금의위의 실력을 과대평가한 탓이 컸다.
실제로 흑갑호위는 흑갑과 암기 때문에 두려운 거지, 무인으로 치면 겨우 일류의 경지다. 체력이 약해 행렬의 가장 마지막에 처졌던 새끼 환관이 혈도를 짚이고 납치당한 사실을 알아채기엔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
금의위 역시 출세에 눈먼 자들치곤 실력이 별로였고, 유일하게 절정의 경지인 우문 천호는 자주 무리를 떠나 앞길을 탐색해야 했다.
설사 자리를 지켰다고 해도 구후영의 기척을 느낄지는 미지수고.
유근을 죽이고 물러나는 과정에 흑갑호위가 무작정 발사하는 암기가 두렵지 않았다면 일행의 복수는 벌써 열 번도 더 이뤄졌을 것이다.
"잠시 쉬지."
틀린 판단으로 유근은 별걱정 없이 편하게 휴식했었다.
그런데.
"한 명 어디 갔지?"
출발하기 전에 점검해보니 금의위 숫자가 열아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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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잠에서 화들짝 깬 유근은 바로 몸을 일으켜 사람 숫자를 셌다.
'제길.'
총 열셋이었다.
유근, 흑갑호위 둘, 모용용과 용 환관. 거기에 우문강현을 포함한 금의위 여덟.
'또 한 놈 사라졌다.'
유근은 머리를 무릎 사이에 끼우고 소리 없이 흐느꼈다.
너무 무서웠다.
마치 누군가가 자기 가슴살을 한 점 한 점 저미는 듯한 느낌이었다.
'차라리 도망친 거였으면.'
지금까지 사라진 열두 명의 금의위와 환관 한 명이 그저 유근이 싫어서 도망친 거였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뭔가가 잡아갔다는 생각은 너무나 두려웠다.
그때.
우문강현이 벌떡 일어섰다.
"무슨 일이오?"
겁에 질린 유근은 자신의 말투가 바뀐 것조차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우문강현은 여전히 수춘도 자루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제가 살펴보고 올까요?"
그때, 금의위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푸석하고 초췌한 얼굴을 하고도 위험을 무릅쓰는 모습에 유근은 또 눈물이 나려 했다.
"혼자는 위험하다."
"천호의 눈에 띄는 곳에서만 움직이겠습니다."
우문강현은 여전히 죽은 듯이 자는 다른 금의위들을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는 것보다 들리는 것에 집중하고, 최대한 천천히 움직여라."
수춘도를 뽑아 오른손에 든 금의위가 천천히 미약한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긴장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유근이 우문강현에게 말했다.
"너무 멀리 가는 거 아니오?"
우문강현도 비슷한 느낌을 받던 차라 고개를 끄덕이고 소리쳤다.
"그만 돌아와."
그런데 우문강현의 외침을 들은 금의위가 손에 든 수춘도를 팽개치더니 앞으로 정신없이 달렸다.
'저 새끼 저거.'
그제야 충성심이 넘쳐서가 아니라 도주하려고 위험한 일을 자처한 것임을 알아챈 유근이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멍청한 새끼."
앞으로 무작정 달리던 금의위가 갑자기 푹 쓰러지더니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우문강현의 외침에 놀라 잠에서 깬 금의위들이 무슨 일인지 바로 알아챈 듯한 표정이었다. 개중 몇몇은 아마 안 자고 몰래 지켜봤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유근은 두려움으로 솟구치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냈다.
그런 유근의 눈에 태평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는 용 환관이 보였다.
"용 환관. 이리로 오게."
공포에 잠식된 마음을 억지로 추스른 유근이 용 환관을 불렀다.
"무슨 분부가 있으십니까?"
"용 환관은 현재 사태에 관해 아는 게 있나?"
뜻밖의 질문에 용 환관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니. 다들 잠도 제대로 못 자는데 혼자 태연한 것 같아서 말일세."
유근의 말에 용 환관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멍청한 새끼. 이딴 실수를 하다니.'
모용세가에서 모용용이 은근슬쩍 자기 동생이면 뭔가를 알지 모른다는 내색을 비췄고, 유근은 바로 비둘기를 띄워 용 환관을 모용세가로 소환했다.
유근의 집을 자기 집 드나들듯 하면서 땅문서를 훔치는 데 여념이 없던 용 환관은 뜻밖의 부름에 화들짝 놀랐으나 유근의 소환에 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모용세가로 향하던 중에 외할아버지가 보낸 소식을 받았는데, 모용가에 숨긴 물건을 찾지 못했다는 것과 모용용이 유근에게 물건이 대백산에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용 환관은 장계취계하여 유근에게 아버지의 마지막 출행이 대백산이라고 거짓말했다.
사실 죽은 모용건은 초원에 청총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갑자기 출행을 결정했다. 방향이 얼추 대백산과 비슷하긴 하나, 결코 대백산의 고분을 찾아 조상을 기리려 했던 건 아니었다.
"저도 겁이 나긴 하지만, 폐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억지로 참을 뿐입니다."
가짜 책자를 만들어서 대백산의 고분에 흔적 없이 숨기려면 시간이 걸린다.
용 환관은 현재 벌어지는 일이 전부 외할아버지가 시간을 벌려고 꾸민 일이라고 추측했다.
당연히 자신은 안전할 거란 판단에 다른 사람과 달리 불안에 떨지 않았다.
거기에 모용세가에서 사라진 두 권의 책자가 모용연의 손에 들어갔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마저 있었다.
이미 바친 책자도 가짜고, 두 책자 중 불로장생에 관한 책자 역시 제가장이 만든 가짜다.
대신 나머지 하나는 진짜다.
황제가 그 책자만 보면 불로장생의 비법이 진짜라고 철석같이 믿을 거라는 외할아버지의 장담을 생각할 때, 분명히 아주 값지고 어마어마한 물건이다.
용 환관은 황제마저 탐내는 어마어마한 보물을 손에 넣었다는 생각에 늘 들떠 있었다.
직접 내용을 확인하고 자신이 차지하든지, 아니면 황제한테 바쳐서 끝없는 부귀영화를 누리든지.
어떤 선택도 좋기만 하다.
그러한 탓에 나이답지 않은 영악함을 잃고 유근의 눈에 나고 말았다.
"내가 용 환관한테 크게 배웠군. 폐하에 대한 충성심으로 어떤 어려움도 맞서 나가는 게 신하 된 도리지."
유근이 짐짓 상냥한 웃음으로 용 환관을 돌려보냈다.
그러고는 곧 우문강현을 불러 용 환관을 면밀히 지켜보라고 지시했다.
지금 사태를 해결할 실마리를 용 환관이 갖고 있기를 내심 바라며.
하지만.
안락한 동굴을 찾아 오래간만에 숙면을 취하고 깬 이튿날.
용 환관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 작가의말
실제로 유근은 능지의 벌을 받아 죽었습니다. 여기선 다르게 죽을 거기에 이렇게라도 괴롭힐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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