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검종華山劍宗
도덕경은 가장 긴 것도 천 글자가 안 된다. 그러나 왕왕 수천 자에서 만 자가 넘는 주해가 붙는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 같은 구절에 다르게 주해를 다는 일이 드물지 않다.
그만큼 도덕경은 내용이 난해하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무공 비급의 존재는 불가사의하다. 도덕경이야 잘못 해석한다고 크게 문제 될 게 없지만, 무공을 잘못 수련하면 자칫 경을 친다.
초식을 잘못 수련하는 건 얼핏 안 위험한 듯 보이지만, 잘못 익힌 초식 때문에 목숨을 건 대결에서 낭패를 볼 수 있다.
심법은 굳이 입 아프게 말할 필요가 없다. 내상으로 멀쩡하던 사람이 폐인이 되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주화입마에 들어 미치광이가 될 수 있고, 최악의 경우엔 목숨을 잃는다.
곤륜의 운룡대구식이 실전된 이유고, 소림이 비급을 보여주는 대신 사부가 직접 이끌며 무공을 가르치는 이유다.
아무리 천고의 기재여도 비급만 보고 해당 무공을 완벽히 익혀내는 건 불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로 구후영은 낙화검법의 오의에 너무 큰 기대를 품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참을 수 없는 호기심과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 때문에 문을 안 열 수 없었다.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 돌아서면 그만이다.'
찰칵. 툭.
찰칵은 구후영이 열쇠 구멍에 장문검을 꽂으며 난 소리고, 툭은 열쇠 구멍이 장문검을 도로 뱉어낸 소리다.
'뭐지? 열쇠가 따로 있는 건가?'
구후영이 뜻밖의 전개에 어안이 벙벙하던 그때.
그르릉 소리와 함께 커다란 석문이 천천히 상승했다. 너무나도 어마어마한 광경에 구후영은 모든 생각을 멈추고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석문은 약 일 장 정도 올라가고 멈췄다. 석문이 멈추며 정신을 차린 구후영은 앞으로 걸으려다가 황급히 멈추며 손으로 코를 막았다.
구후영의 옷도 온갖 독충의 독과 체액으로 범벅이 되어 냄새가 심한데, 열린 석문을 통해 나오는 악취와 비교하면 청량한 박하 향이라고 해도 딱히 과장은 아니다.
'급할 거 없다.'
구후영은 조용히 뒤로 물러나서 대기했다. 오랜 기간 밀폐되었던 공간에 숨이 차길 기다리는 동시에, 혹시 모를 독을 걱정해서였다.
그렇게 약 이 각 정도 시간이 흘렀다.
'독은 아닌 것 같고.'
구후영은 고심 끝에 코를 괴롭히는 악취가 독과 무관하다고 판단했다. 어쩌면 독일 수도 있지만, 어차피 구후영에게 전혀 해를 못 끼치고 있으니 독이어도 아닌 셈이다.
'그만 들어가자.'
공동이 그리 크지 않고, 석문도 꽤 크게 열렸기에 지금쯤은 숨이 찼을 거란 판단으로 구후영은 과감히 안으로 발을 들였다.
'사람 해골인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한쪽 구석에 수북이 쌓인 해골이었다. 세월을 견디지 못해 원래 형체를 보존한 뼈가 없어서 짐승의 것인지 인간 것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뭔가 단서가 있을지도.'
지름이 이십 장 정도 되는 공동엔 한참 살펴도 딱히 다른 인상적인 곳이 없었다. 구후영은 바닥을 자세히 살피며 뼈 무덤으로 천천히 걸었다.
'이게 뭐지?'
뼈 무덤 앞엔 먼지로 형체를 숨긴 수십 개 물건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궁금증이 인 구후영은 소매로 먼지를 쓸어냈다.
"허럴!"
물건의 정체를 확인한 구후영이 기가 찬 나머지 의미 모를 감탄을 뱉어냈다.
'이게 무슨 조화지?'
바닥에 가지런히 놓인 수십 개 물건은 다름 아닌 낙화문의 장문검이었다.
'열쇠가 하나가 아니었네?'
바닥의 열쇠를 들어 일일이 낙화문의 장문검과 비교하니, 색이 조금씩 다르긴 하나 모양은 일치했다.
'그럼 이 모든 사람이 낙화검의 오의를 찾아 여길 온 건가?'
생각이 여기에 미친 구후영은 황급히 경공을 펼쳐 문을 향해 달렸다. 딱히 위험을 감지하진 못했으나, 주검이 이리도 쌓인 데는 뭔가 이유가 있다는 판단에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때.
십수 개 암기가 구후영을 향해 쏘아졌다. 당황한 구후영은 급히 멈추며 천공교검을 뽑아 휘둘렀다. 다행히 암기술을 익힌 적 없는 자의 소행인지, 십수 개 암기를 쳐내는 일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
"누군데 다짜고짜 암기를 날린 거요?"
암기를 쳐낸 구후영이 귀에 감각을 집중하며 호통쳤다.
"혹시 네가 낙화문의 장문인가?"
반은 희고 반은 검은 턱수염을 기른 노인이 모습을 드러내며 약간 잠긴 목소리로 질문했다.
"화산 검종?"
비록 거친 천으로 만든 회색 옷을 걸쳐 신분을 숨기려 했지만, 손에 든 자루가 특이한 청안검 덕분에 구후영은 상대의 신분을 어렵지 않게 확인했다.
"그래. 잘 됐구나. 검법도 얻고 낙화문도 지울 수 있어서."
구후영을 독 안에 든 쥐로 여기는지 화산 검종의 노인은 속을 전혀 감추지 않았다.
"다들 내상이나 부상으로 몸이 말이 아니라던데."
"그렇다고 너 혼자서 열 손을 당할까?"
노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십수 명의 무인이 검을 꼬나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미리 소리로 사람이 더 있음을 확인한 구후영이었기에 별로 놀라진 않았다.
"둘이 문을 지키고 둘이 비급을 찾고, 남은 사람은 저자를 죽인다."
노인의 명에 무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어느 둘이 문을 지키고 어느 둘이 비급을 찾는다는 말이 없었는데, 미리 정하기라도 한 듯이 전혀 버벅거리지 않았다.
"꼭 이렇게 천인공노할 기사멸조의 죄를 지어야겠소?"
"배분을 따지면 우리가 너보다 위일 텐데. 누가 기사멸조일까?"
"장문 앞에서 배분 따지는 거 보니 다들 노망이 났나 보군."
"그래. 죽기 전에 욕이라도 실컷 해라."
구후영은 이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신을 살려줄 거란 기대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로 흔들어서 상대가 출수할 때 조금이라도 마음에 거리낌이 있길 바랐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태연한 기색과 확고한 눈빛을 보고 전혀 효과가 없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현현자와 동수를 이룬 실력으로 직접 기사멸조의 죄를 물을 수밖에 없구나."
양심에 호소하는 길이 막히자 구후영은 압박으로 태세를 전환했다. 다행히 이번엔 효과가 있는지 몇몇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흔들리지 마라. 어차피 검법이 서로 익숙하니 초식의 우위가 없는 건 마찬가지다. 저자가 현현자와 내공 대결을 벌일 정도라곤 하나, 우리가 합친 것보다 강하진 않을 거다."
'생각보다 단순해.'
우두머리로 보이는 노인은 일행의 사기를 고취하려고 한 말이지만, 사실상 구후영을 인정한 거나 마찬가지다.
힘을 합치면 구후영보다 강하다고 말한 건, 일대일로는 구후영에게 밀린다고 시인해버린 셈이다. 누군가는 노인의 말에 힘을 얻겠지만, 누군가는 위축될 수 있다.
'거기에 이것까지 더하면.'
구후영은 자신이 생각하는 난화검법의 가장 자신 있는 초식을 펼쳤다. 비록 공동을 수색하는 두 사람만 횃불을 밝힌 탓에 여전히 어둡지만, 화산 검종의 무인들은 구후영의 난화검법을 똑똑히 눈에 담았다.
"놈! 이미 오의를 얻었구나."
처음 보는 초식이어서 어떤 위력인지 모르지만, 수준 높은 검법임을 알아볼 안목은 누구나 있었다. 그에 성격이 조급한 누군가는 구후영이 자신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낙화검법의 오의를 얻었다고 여겼다.
"모든 횃불을 밝히고 수색에 두 명 더 투입한다. 남은 사람은 저자의 목숨을 취한다. 머리와 목만 노리는 걸 명심하고."
만에 하나 비급이 구후영의 몸에 있을 가능성에 대비해 노인은 머리와 목만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섣불리 살초를 펼치면 안 된다.'
몹시 위험한 상황이지만, 구후영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
'최소 한꺼번에 반은 처리해야 한다.'
어설프게 한둘을 해치우면 저들의 경각심과 분노를 자극해 오히려 위험하다. 확실한 우위를 보여도 비급에 눈이 먼 저들이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고, 오히려 비겁한 수단을 서슴없이 쓸 거기에 일단 실력을 숨기고 수비에 치중하며 기회를 엿봐야 한다.
마음을 정한 구후영은 난화검법을 펼쳤다. 체력이 뛰어나고 내공이 많고 경지도 절정에 이른 구후영은 잠시도 쉬지 않고 초식을 면면부절하게 펼쳐낼 수 있었다.
덕분에 열 명이 넘은 절정의 고수를 상대하면서도 수세에 처했을 뿐 위기에 몰리지 않았다.
"빨리 비급을 찾아 약점을 확인해야 한다."
화산 검종의 무인은 부상 혹은 내상으로 하나같이 몸이 정상이 아니다. 이들 중 반만 멀쩡했어도 구후영이 위험했겠지만, 모든 상황이 구후영에게 유리하게 흘러 쌍방은 팽팽하게 대치했다.
그 탓에 마음이 급해진 누군가가 수색하는 네 명의 무인을 재촉했다.
"여기 열쇠가 수십 개 있습니다."
구후영을 상대하는 무인들의 사기를 돋우려는 건지, 수색하던 무인 중 한 명이 크게 외쳤다. 구후영은 짐짓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상대의 주의력을 흩뜨리려 했다.
그러나 상대는 전혀 동요 없이 구후영을 똑같이 상대했다.
'이들은 무인이다. 검을 잡은 지금은 날 죽이는 것밖에 염두에 두지 않았으니 괜한 심계는 부리지 말자.'
상대는 무리여서 한둘이 흔들려도 곧 회복했다. 구후영은 괜히 머리를 굴리지 않고 대결에 집중하기로 했다.
덕분에 원래부터 물샐틈없던 구후영의 수비가 더 단단해졌다.
"차륜전을 한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우두머리 노인이 지시를 내렸다. 그에 여섯 명의 무인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기회다.'
싸움에서 빠진 여섯도 수시로 공격에 가담할 수 있지만, 어쨌든 구후영과 거리가 멀어졌다. 구후영은 괜찮은 기회가 오면 공격으로 전환하기로 마음을 먹으며 집중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그때.
"여기 글귀를 찾았습니다!"
"비급이냐?"
"비급을 얻는 방법입니다. 구멍에 열쇠를 넣으면 비급이 나타난답니다."
"넣어!"
노인의 말과 동시에 구후영이 갑자기 낙화검법으로 전환하며 문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막아!"
대기하던 자 중 둘이 구후영의 길을 차단했고, 문을 지키던 둘도 달려왔다. 대신 구후영의 뒤에 있던 넷이 경공을 펼쳐 석문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넣지 마!"
"넣어!"
"저기 해골 안 보여? 넣지 마!"
"넣어!"
강한 위기감을 느낀 구후영은 실력을 숨기려던 것도 잊고 전력을 다해 낙화검법의 초식을 연달아 펼쳤다. 그에 화산의 무인들은 연이어 검이 잘리거나 몸을 베이었다.
하지만.
그르릉 소리와 함께 석문이 빠르게 내려왔다. 올라갈 땐 한세월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전광석화란 말이 어울려 보일 속도였다.
"너흰 이놈을 맡아라. 나랑 정 사제가 가서 비급을 확인하지."
석문이 닫히자 우두머리 노인은 구후영을 팽개치고 비급을 확인하러 달려갔다.
그런데.
"어!","뭐야!","사숙, 계십니까?"
경악에 찬 외침들이 공동을 가득 채웠다.
'무슨 귀신 놀음이지?'
구후영 역시 자신을 포위했던 자들이 순식간에 사라진 데 대해 경악했다. 다행히 뭔가 사달이 날지도 모른다는 마음의 준비가 있었기에 화산의 무인들처럼 소리를 지르진 않았다.
'설마. 비급은 거짓이고 다들 이렇게 갇혀 죽은 건가?'
비관적인 생각에 잇몸에 힘이 들어갔던 구후영이지만, 이내 침착을 되찾았다.
'그렇다면 소리만 들리고 다른 사람이 안 보이는 상황은 어떻게 해석하지?'
고민하던 구후영의 머리에 언뜻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진법. 이건 진법이다.'
- 작가의말
맞춤법 검사기가 또 먹통입니다. 오타나 오류 보이시면 지적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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