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월교주拜月敎主
시뻘건 달이 어두운 하늘에 음울하게 걸리고, 붉은 달빛을 받은 별들이 요요하게 빛났다. 밤 구름이 흉측한 달을 가리려 했으나, 너무 얇아 조금 흐릿하게 만든 정도에 그쳤다.
쓱!
비수에 숨통이 잘린 사내는 입만 뻐끔거리다가 고개를 툭 떨궜다.
"샅샅이 수색해라. 한 놈도 살려선 안 된다."
우두머리의 지시에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자들이 벽은 물론이고 천장과 바닥도 꼼꼼하게 확인했다.
"여기!"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은 인영이 벽에서 튀어나왔다.
"쥐새끼!"
어느새 경공으로 다가간 우두머리가 양손의 비수를 빠르게 휘둘렀다. 벽의 암문 뒤에 숨었던 자가 나오며 던진 암기들이 비수에 맞아 사방으로 튀었다.
"감사합니다."
목숨을 구원받은 복면인이 우두머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뭘 발견해도 모른 척 지나면서 신호를 보냈어야지. 지난번에도 혼자 잡히더니, 너 이러다 제 명에 못 죽는다."
"명심하겠습니다."
복면인들은 도주한 자를 무시하고 계속 장원의 방들을 수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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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시고 싶다.'
천공교검을 등에 메고 붉은 달을 등에 인 채 어두운 밤길을 홀로 걷던 구후영은 문득 술 생각이 났다.
자룡을 찾는 일이 우선이지만, 할머니와의 이별이 아쉽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정신 차리자.'
슬픈 상념에 빠졌던 구후영은 이대로는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다음 골목에서 오른쪽.'
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서 서안부까지 간 다음, 서안부에서 위하와 황화를 연이어 타는 게 구후영의 계획이다.
혈총의 걸음으로 나흘이면 도착하는 거리인데 구후영이 길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대완마를 타고 움직이면 소문이 날 게 뻔해 삶은 콩에 푹 빠진 혈총을 홍엽산장에 두고 구후영 혼자서 출발했다.
'자룡만 찾으면 모든 게 원만하다. 내가 비록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바르게 산 건 아니지만, 하늘이 양심이 있으면 우리 형제의 상봉을 허락하겠지.'
금검당과 은도당의 싸움에 휘말려 구후영이 다칠 수도 있고, 구후일의 행방도 찾아야 하기에 대부인이 눈물을 머금고 작별을 허락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구후영은 바로 출발했다. 나루터까지 가는 길은 연무쌍이 자세히 알려준 덕분에 지금까지 잘 가고 있었는데.
"큭!"
짧은 신음이 구후영의 주의를 끌었다.
워낙 귀가 밝은 데다가 고요한 밤이어서 소리가 훨씬 잘 들렸다.
'어떡하지?'
구후영이 고민했다.
별 기척이 없다가 갑자기 신음이 터졌다. 이는 당한 자가 기척을 숨길 정도의 고수란 뜻이고, 그런 자의 입에서 신음이 터지게 한 자도 당연히 무인이다.
홍엽산장이 자칫 철혈방의 내부 싸움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고, 완전히 끊긴 자룡의 종적을 다시 찾는 게 급선무기에 괜한 일에 참견하긴 싫다. 그러나 악인이 선한 자를 죽이려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수수방관하는 것도 별로 내키진 않았다.
다행히 구후영의 고민은 금세 풀렸다.
슉!
굴에서 튀어나온 토끼처럼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검은 옷의 사내가 구후영을 향해 암기를 던졌다.
구후영은 암기를 피하며 이를 살짝 갈았다.
아무리 목숨을 위협받는 긴박한 상황이어도 처음 보는 사람한테 다짜고짜 암기를 던지는 건 경우가 없는 행동이다.
'악인이다.'
상대를 악인으로 규정한 구후영은 갑자기 나타난 사내를 덮쳤다. 사내는 구후영의 일견 엉성해 보이는 경공에 인질로 잡기로 하고 피하지 않았다.
'둘 다 악인이면 어떡하지?'
악인이 악인을 죽이려는 거면 말려야 하나 그냥 무시해야 하나, 아니면 둘 다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구후영은 양손을 쑥 내밀었다.
태극권의 서완舒緩(느린) 동작 중 하나로 느리게 펼칠수록 높은 경지로 평가받는 야마분종野馬分鬃이다. 상대는 별 힘도 없어 보이는 구후영의 공격을 무시하고 비수를 목에 갖다 대려 했다.
"억!"
쉽게 생각하고 비수를 내밀었던 사내는 구후영의 손에 멱살을 잡히고 탄성을 질렀다. 귀신에게 홀렸는지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요해인 목을 내줬고, 상대가 인영혈을 짚자 힘이 풀리며 비수도 바닥에 떨궜다.
그때, 야행의에 얼굴을 가린 일남일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분을 밝히라고 하면 비웃겠지?'
누구냐고 호통치려던 구후영은 쉽게 밝힐 거면 얼굴도 안 가렸을 거란 생각으로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도로 삼켰다.
"구후 대협이시군요. 소인들은 배월교 소속입니다."
여자가 정중히 포권하며 빠르게 말했다.
"그자는 양양 하오문 소속이자 칠살문 소속으로 악인입니다. 이딴 쥐새끼 때문에 대협의 손을 더럽히지 마시고 저희한테 넘기십시오."
"아무리 악인이라고 해도 인명을 쉽게 해쳐서야 되겠소?"
"괜히 생포하려다가 형제자매가 다치는 것보단 죽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자객 노릇을 하는 위험한 자들인데."
여인의 말에 구후영은 작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정학 진인이야 무공이 고강하니 악인에게도 최대한 기회를 줄 수 있는 거지. 저들에게 같은 잣대를 들이미는 건 옳은 일이 아니다.'
"속지 마시오. 자객은 저들이오. 난 그저 하오문 소속이오."
구후영에게 잡힌 사내가 떠듬떠듬 말했다. 인영혈이 눌린 것도 있지만, 등에 칼을 맞아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어 말하는 것조차 힘든 탓이다.
'풍 대협은 천품이 후하다고 좋은 거라고 하셨는데, 이대로는 강호에서 눈먼 칼에 맞아 죽기 딱 좋겠구나. 정신 차리자.'
그제야 구후영은 상대가 배월교 소속이 아닐지도 모르고, 어쩌면 배월교 자체가 자객 조직인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대들이 배월교 소속인지 가릴 방법이 없으니 이자는 내가 데려가겠소."
'무당에 가서 이자를 쇄악곡에 맡긴 다음 오던 길을 따라 돌아가면 되지. 경공을 펼치면 열흘 정도에 도착할 수 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사내로 보이는 자가 복면 밑으로 손을 넣더니 뻐꾹새 소리를 냈다.
"날 빨리 놔주시오. 저자들이 지원군을 부르고 있소."
"생면부지인 나한테 다짜고짜 암기를 날린 걸 보면 그대 심성이 어떤지 알 만하오. 그러니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게 좋겠소."
상대가 혈도를 누르기만 하고 멱살을 잡은 손도 우악스럽지 않아 무른 자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말로 속여서 벗어나려 했는데, 구후영은 심성이 착할 뿐이지 맹탕은 아니었다.
둘이 작은 실랑이를 하는 사이, 십수 명의 사람이 새로 나타났다.
"구후 대협, 야심한 시각에 웬일입니까?"
"그러는 교주야말로 무슨 일입니까?"
구후영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던 배월교주가 손뼉을 쳤다.
"야반도주하는 거군요. 금검당이랑 은도당의 싸움을 피하려고요."
내색은 안 했지만, 구후영은 속으로 크게 놀랐다. 동시에 의심도 무럭무럭 자랐다.
'배월교는 양양 지역의 문파도 아닌데 어떻게 철혈방 내부의 사정을 이리 자세히 알지?'
"잠깐 단둘이 걸을까요?"
"사, 살려 줘. 죽기 싫어."
구후영에게 잡힌 자가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죽음이 두려운 것도 있으나, 피를 많이 흘려 추위가 세게 느껴진 탓이 컸다.
"교주한테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배월교는 원한을 열 배로 갚고 은혜는 백 배로 갚습니다.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이자는 내가 잡은 것이니 죽이지 말고 무당의 쇄악곡으로 보내줄 수 있습니까?"
"어려운 부탁도 아니군요. 그리해드리지요."
말을 마친 배월교주가 경공을 펼쳐 떠났다. 구후영은 사내를 배월교도 손에 넘기고 마찬가지로 경공을 펼쳐 배월교주의 뒤를 따랐다.
배월교주는 뒤도 안 보고 달리다가 강가에 멈췄다.
"배로 모시겠습니다."
말을 마친 배월교주가 경공을 펼쳐 강에서 삼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배에 안착했다. 노를 젓는 사공은 사람이 온 걸 모르는 것처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구후영도 경공을 펼쳐 배를 향해 뛰었다.
'경공 차이가 이 정도라니.'
구후영은 배가 쑥 내려가는 걸 느끼고 속으로 경탄했다. 배월교주가 착지할 때는 미동도 없던 배가 구후영의 경우에는 크게 흔들렸다.
감탄을 마친 구후영은 배월교주의 뒤를 따라 배의 검은 뜸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는 일을 끝내고 혼자 술을 마시려 했는데 우연히도 구후 대협을 만났군요. 여인이랑 겸상하는 게 불쾌하지 않으시다면 같이 잔을 기울여 보시겠습니까?"
"불쾌하다니요."
구후영은 배월교주의 맞은편에 앉았다.
상 위엔 작은 술병 하나에 잔 두 개, 그리고 마른안주가 두 접시 있었다.
"혼자 마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혼자 마실 때도 잔 두 개를 놓는 게 습관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말을 마친 배월교주가 잔에 술을 쪼르르 따랐다.
"이 술은?"
익숙하진 않으나 기억 어딘가에 있는 주향에 구후영이 이마를 찌푸렸다.
"폭탄주를 마신 적 있습니까?"
관동에 백두라는 이름을 쓰는 성스러운 산이 있는데, 거기에 기세가 대단한 폭포가 있다.
현재 술은 백두의 폭포에서 튕겨 나온 물방울을 모아 빚은 술이다.
"폭포에서 튕긴 물을 폭탄주瀑彈珠라 부르고, 그 물로 빚은 술을 폭탄주瀑彈酒라고 합니다. 구하기 정말 힘들어서 이게 마지막 병인데, 함께 폭탄주의 장례를 치를까요?"
그제야 구후영은 황무지에서 청월이 줬던 술이 떠올랐다.
"귀한 술이군요."
"귀할 뿐만 아니라 의미도 좋습니다."
암석은 장구한 세월 동안 폭포를 맞으며 깎여 나간다. 결국, 제일 단단한 놈만 남아 폭포에 저항한다.
폭탄주珠는 바로 암석을 깎는 폭포가 제일 강한 암석과 부딪힌 결과고, 그러한 폭탄주珠로 빚은 폭탄주酒는 기운이 강인하다.
"부드러운 물이 단단한 암석을 깎는 것도 놀라운데, 그것에 저항하는 자가 있다는 게 또 놀랍군요."
"술 소개는 이쯤 하고, 그만 마실까요?"
잔을 부딪친 둘이 동시에 술을 입에 넣었다.
'구음을 아는 걸 보니 술을 여간 좋아하는 게 아니구나.'
구후영과 배월교주는 술을 입에 머금고 한참 버티다가 동시에 숨을 훅 들이쉬었다.
그리움이 첨가되었는지 황무지에서 마신 폭탄주보다 주향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얘기는 술을 다 마시고 하죠."
"그러지요."
구후영과 배월교주는 별다른 대화 없이 한 병 술을 다 마셨다. 고작 반 근 정도의 양이지만, 향이 강하고 기운에 세서 웬만한 술 열 단지 마신 것보다 감회가 깊었다.
"궁금한 게 많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술을 마시느라 올렸던 면사를 내리자 구후영은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고작 입과 턱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웠었다.
'내가 이 정도 술에 취할 리는 없고, 심마인가?'
자신의 실태를 알아차린 구후영이 애꿎은 심마를 탓했다.
"어디부터 물어볼지 막막하겠지요. 그냥 제가 다 말씀드릴게요."
이어지는 말에 정신을 차린 구후영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복장표국의 온 표국주는 조심성이 많은 자입니다. 홍엽산장의 일이 원하는 대로 풀렸지만, 육비나타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그날, 먼저 움직인 배월교주는 마침 밖으로 나온 육비나타를 만났고, 배후를 캘 생각으로 은밀히 뒤를 쫓았다. 그러나 연무장에 가서 증인을 죽이고 대규모 싸움을 일으키려는 육비나타를 부득이하게 죽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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