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북두泰山北斗
고찰천년古刹千年 악중웅거岳中雄居
천 년의 절이 중악 숭산에 웅거하여,
고금인물풍류古今人物風流
고금에 수많은 풍류와 인물을 남겼구나.
"고민을 끝냈소?"
소실산 자락에 도착하고 원각이 질문했다.
"고민은 끝나지 않았지만, 마음은 이미 정했소."
"좋은 선택이길 바라오."
말을 마친 원각이 앞장서고, 네 제자는 구후영의 뒤에 섰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비림碑林인가?'
소림사로 들어가는 길은 용도甬道라고 불린다.
용도의 양측은 소나무와 백양으로 사시장철 푸른데, 숲에 십수 개의 커다란 비석이 있었다. 비림은 천 년 동안 소림에 발생한 기념할 만한 일을 새겨서 기록했는데, 굴곡진 소림 역사에서 좋은 면만 담았다고 여기면 된다.
비림 다음은 비랑碑廊이다. 여긴 백 개에 가까운 명패를 양쪽에 진열했는데, 소림을 빛낸 인물들이 새겨 있다.
비림과 비랑으로 구성된 용도를 지나면 천왕전天王殿이 나타난다.
천왕전은 풍風·조調·우雨·순順의 사대천왕을 모시는 절간이다. 문 앞엔 밀적금강密迹金剛 둘이 있고, 안엔 사대천왕의 조각이 있었다.
일행은 천왕전을 지나 훨씬 큰 건물 앞에 도착했다.
"여기가 대웅보전大雄寶殿이오."
대웅보전은 석가여래불과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모시는 절간이다. 세 부처의 뒤엔 세 명의 보살이 등지고 있고, 양측은 십팔나한의 동상이 있었다.
"여기서 쉬고 있으면 접객화상接客和尙이 와서 거처까지 안내할 거요. 그럼 소승은 이만."
원각이 제자들을 데리고 사라지기 무섭게 회색 승포를 입고 푸른 가사를 걸친 스님이 나타났다.
"날 따르시오."
구후영은 말없이 스님의 뒤를 따라 소림사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장원에 들어갔다.
"여기가 시주께서 당분간 지낼 곳이오. 해우소는 저기 있소. 물과 음식은 매일 세 번씩 갖다 드릴 테니, 담장 밖을 나가지 마시오."
말을 마친 접객화상이 작별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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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더냐?"
방장이 원각에게 질문했다.
"모르겠소."
원각의 대답에 방장이 눈을 크게 떴다.
"얘기해 보아라."
원각은 옳고 그름을 확실히 가리는 곧은 사람이다. 좋게 말하면 정직하고 나쁘게 말하면 말을 가리지 않는 꼬장꼬장한 성격으로, 모른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작년에 해검지에서 보검을 분실한 후 찾으려는 노력을 거의 안 했소. 게다가 작년 십이월에 보검이 항주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사부라는 자가 제자한테 비밀로 했다고 하오. 이런 면에서 볼 때 의심스럽기 그지없소."
"그런데 왜 모르겠느냐?"
"너무 당당했소. 오는 내내 사건에 관해 하나도 캐묻지 않았소. 마치 일이 어떻게 흐르고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아는 사람처럼 말이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단 말이구나. 오히려 적극 가담자일 가능성이 크지 않겠느냐?"
원각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아는 단서만 갖고 일을 판단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소."
원각의 태도를 본 방장이 이마를 찌푸렸다.
"심마냐?"
"아니오. 심결心結(마음의 매듭)이오."
주화입마는 기운이 꼬이고 정신과 마음마저 불안한 상태다. 심마는 머리와 마음이 따로 노는데 그 이유를 미처 파악하지 못했을 때 생긴다.
심결은 이미 확신하던 것과 새롭게 깨달은 게 서로 위배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충돌은 명상과 공부를 통해 해결할 수 있고,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큰 해가 되진 않는다.
"그래서 말인데, 당분간 면벽하여 마음공부에 힘쓰고 싶소."
"고작 심결인데 그렇게까지 해야겠느냐?"
"꼭 하고 싶소. 허락해 주시오."
잠깐 고민한 방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처는 멀리 있지 않다. 마음의 매듭을 풀려면 주변부터 살피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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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후영이 소림에 도착한 지 열흘 되던 날.
삐걱 소리가 구후영의 명상을 방해했다.
'밥때가 아닌데?'
지난 열흘 동안 하루에 세 번 밥과 물을 가져다주는 동자승 빼곤 아무도 구후영을 찾지 않았다.
"여기가 바로 흉수를 가둔 곳인가?"
'좋은 뜻으로 온 손님은 아니군.'
판별을 마친 구후영이 느긋한 얼굴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불청객은 네 명의 미공자였다. 나이는 구후영보다 몇 살 많아 보이는데, 머리에 두른 영웅건마저 비단으로 만든 걸 보면 꽤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이 틀림없었다.
"누구시오?"
넷은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문 채 구후영을 위아래로 자세히 훑기만 했다.
그에 구후영도 더 질문할 생각을 멈추고 넷을 관찰했다.
'붉은 두건은 권법을 익혔구나.'
손에 부채를 들긴 했으나, 손가락 마디가 불거진 게 외공 계열의 권법을 익힌 게 확실해 보였다.
'푸른 두건 둘은 검법을 익혔고.'
푸른 두건 둘은 얼굴과 체형이 비슷하여 형제 혹은 친척으로 보였다. 비록 패검하진 않았으나, 서 있는 자세나 오른손을 편하게 늘어뜨린 모습이나 손가락에 박힌 굳은살 등을 보면 검을 익힌 게 분명했다.
'검은 두건은 잘 모르겠고.'
넷 중에 균형이 가장 잘 잡힌 걸 보면 장법을 익혔을 가능성이 크긴 하나, 창이나 곤법을 익혔을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순 없었다.
"아닌 거 같은데?"
푸른 두건 중 키가 조금 큰 자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나도 아닌 거 같아."
붉은 두건도 입을 열었다.
"산서검룡이 신검과 검을 논하고 현현 진인과 내공 대결을 벌였다고 해서 삼두육비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역시 강호의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 것 같아."
푸른 두건 중 키 작은 자도 입을 열었다.
"그대는 어찌 생각하시오?"
구후영이 입을 열어 검은 두건한테 질문했다.
"모르겠소."
검은 두건이 대답했다. 그에 붉은 두건이 검은 두건에게 질문했다.
"호 형은 뭘 모르겠다는 거요? 그냥 봐도 공유대사를 해칠 만큼 강한 자가 아닌데 말이오."
'공유대사?'
붉은 두건의 말에 구후영은 몸이 흠칫 떨렸다.
소림은 무림의 태산북두로 불린 지 어언 사백 년 가까이 된다. 덕분에 강호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갔지만, 스님들 사이에선 비판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걸 끊은 사람이 바로 공유대사였다.
공유대사는 원래 글공부를 한 선비였고, 과거에 급제하여 현령을 지낸 적도 있었다.
그러다 친우인 공효 스님의 권유로 마흔에 가까운 나이에 출가했는데, 고작 삼 년 만에 부처의 재림이라고 천하에 자자한 명성을 떨쳤다.
덕분에 한때는 불법佛法 하면 공유空儒, 공유 하면 불법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공유대사의 설법說法을 들으려고 향화객들이 소림을 붐볐다.
문제는 공유 스님의 재주가 불경을 깨우치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혹이 넘어 무공에 입문한 공유 스님은 고작 십 년 사이에 소림의 칠십이절기 중 열세 개를 익혀냈다.
이는 서너 살부터 나한공 수련을 시작하여 여든까지 무공에만 매진한 노스님들도 해내지 못한 일로, 덕분에 무승武僧들이 불경 공부에 더 많은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형의 스승이신데.'
물론, 구후영이 놀란 건 공유 스님이 원경의 사부이기 때문이었다.
"내 사부보단 강해 보이오."
검은 두건의 대답에 남은 세 사람 모두 놀란 기색을 보였다.
"진짜요?"
"그렇소. 그래서 말인데, 난 방장 사조의 부탁을 거절할 생각이오."
말을 마친 검은 두건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남은 세 사람은 서로 쳐다보다가 구후영을 일별한 후 고민 가득한 얼굴로 함께 떠났다.
'도대체 무슨 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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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항주부의 포두 최종필이 육모방망이를 건들거리며 양손을 뒤로 묶인 사내를 추궁했다.
"이대로 관아에 끌려가서 궁둥이 터질래? 아니면 내 질문에 대답하고 곱게 풀려날래?"
그에 양손을 묶인 사내가 억울함 가득한 얼굴로 하소연했다.
"정말 모릅니다. 알면 벌써 말씀드렸죠."
화가 잔뜩 난 최종필이 육모방망이를 휘둘러 사내의 종아리를 때렸다. 무공을 익힌 최종필이 작심하고 때린 거라 사내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한참이나 바닥을 뒹굴었다.
"화씨 형제의 행방을 알 만한 사람은?"
"제가 모르면 하오문에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화가 치민 최종필이 다시 방망이를 들었다.
"잠, 잠깐."
"그래. 이제야 말할 마음이 들었느냐?"
"차라리 사대문의 거지들한테 묻는 건 어떻습니까?"
사대문은 항주부의 동서남북에 난 성문을 말한다. 사대문의 거지는 성문 밖에서 구걸하는 자들인데, 그냥 거지가 아니다.
이들 대부분은 흑도 방파가 뒤를 봐주고 있다. 사기당하기 좋은 어수룩한 자가 보이거나 귀한 재물을 지닌 자가 보이면 바로바로 알리는 거로 먹고사는 자들인데, 길잡이 형제가 밤에 성벽을 넘은 게 아니라면 이들 눈을 피할 수 없다.
"그 많은 놈을 일일이 찾아 물으라고?"
최종필은 작년에 길잡이 형제를 도와 죽개방 방주의 보검을 확인했다. 검을 뽑아 날까지 확인한 건 아니지만, 형제는 충분하다고 했다.
그 뒤로 언제 폭풍권 장선을 만나게 해주냐고 계속 재촉했는데, 기다리란 말만 들었다.
겨울은 나다니는 자가 적어 서신의 전달이 느리다. 최종필도 그 정도 상식은 있기에 꾹 참고 기다렸는데, 길잡이 형제가 갑자기 사라졌다.
"아닙니다. 제가 알아내겠습니다."
"지금! 당장!"
최종필의 호통에 사내는 한숨을 푹 쉰 다음, 밖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애들 풀어서 사대문의 거지들한테 탐문해라. 두 분 장로가 항부주를 떠나는 걸 본 자가 있는지."
사내의 외침에 밖이 소란스럽게 변한 가운데.
"이 도자기들 귀한 거야?"
최종필이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질문했다.
"전혀 안 귀합니다."
사내의 대답에 최종필이 주저 없이 방망이를 휘둘러 도자기 하나를 부쉈다. 그에 사내는 눈을 꼭 감고 눈물을 속으로 삼켰다.
"일각에 하나다."
"서둘러!"
천만다행으로, 항주부는 순천부처럼 크지 않았다. 만약 사내가 있는 곳이 순천부였다면 애꿎은 도자기뿐이 아니라 사내의 머리까지 깨졌을 게 분명했다.
'비싼 놈들은 멀쩡하다.'
최종필은 부자다. 당연히 도자기를 보는 안목이 있어 값나가는 놈들은 뒤로 미뤄뒀다. 덕분에 사내의 수하가 소식을 들고 달려왔을 때 비싼 도자기는 모두 멀쩡했다.
"찾았습니다."
"어서 말해."
사내의 재촉에 수하가 고개를 돌려 최종필한테 말했다.
"며칠 전에 두 분 장로께서 스님 몇 분과 함께 동쪽 성문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돌아오는 걸 본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빨리, 빨리 결론을 말씀드려."
최종필이 방망이를 건들거리자 사내가 기겁해서 외쳤다.
"확실한 건 아닌데, 그 스님들이 소림에서 나왔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하하."
최종필이 헛웃음을 지었다.
"소림이라고 하면 이 최종필이 겁먹을 줄 알았느냐?"
"진짜, 진짜입니다. 소림에서 온 스님들이 먼저 죽개방을 찾아 방주를 죽인 다음 두 분 장로님을 찾았다고 합니다."
'뭔가 있다.'
무림의 태산북두로 불리며 실력은 물론이고 덕망도 높은 소림이 죽개방 같은 하류 중에서도 하류의 인생들과 접점이 생길 리 없으니.
'보검에 소림이 얽혔구나.'
결론은 간단했다.
'제길. 장 대협의 제자가 되려면 망할 놈의 화씨 형제가 꼭 필요한데.'
한참 고민한 최종필이 결심했다.
'소림이 강호의 태산북두지 내 태산북두는 아니잖아. 사나이 최종필, 간다!'
- 작가의말
"차라리 사대문의 기자들한테 묻는 건 어떻습니까?"
사대문은 서울의 네 성문을 말한다. 사대문의 기자는 광고를 구걸하는 자들인데, 그냥 기자가 아니다.이들 대부분은 정·재계의 유력인사가 뒤를 봐주고 있다. 확실치 않은 소문으로 상대의 명성을 더럽히거나 모시는 분이 구설에 올랐을 때 다른 사건을 터뜨리는 거로 시선을 돌리는 등으로 떡고물을 받아먹고 사는 자들인데, 대중을 개돼지라 여기며 업신여기기를 서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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