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화소의紅花素衣
화수풍래번강염火樹風來飜絳焰
바람이 부니 불의 나무에 진홍의 불덩이 번지고,
경지일출쇄홍사瓊枝日出曬紅紗
햇빛을 받으니 가지에 붉은 비단 걸치네.
회간도이도무색回看桃李都無色
돌아보니 배꽃도 자두꽃도 창백하기만 하고,
영득부용불시화映得芙蓉不是花
함께 보니 연꽃은 꽃으로 보이지도 않누나.
봄철에 산을 붉게 물들이는 영산홍映山紅(진달래)은 모든 꽃을 무색게 하며 요염한 자태를 마음껏 뽐냈다.
덕분에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벌써 여름이 온 기분인데.
모용세가가 있는 궤룡氿龍만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기라도 한 듯 한겨울처럼 냉랭했다.
"저게 뭐 하는 짓이지?"
묘용세가의 장원에선 정예 군사로 보이는 삼천 병력이 금의위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문제는 그 움직임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거다.
병사로 보이는 자들이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아래로 던지면 다른 병사들이 깨진 기와를 작은 수레에 실어 밖으로 버렸다.
그렇게 지붕을 헐고 나면 평민으로 보이는 자들이 나무망치를 들고 벽과 기둥 그리고 바닥을 계속 두드렸고, 한참 두드리고 난 뒤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벽을 허물었고, 허문 벽의 잔해는 비단옷을 입은 금의위가 먼지도 아랑곳하지 않고 뒤졌다.
"뭘 찾는 것 같군요."
단아의 말에 일행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삼천 명이나 되는 병사를 동원했는데, 약 천 명은 장원을 빙 둘러싸 구경꾼의 접근을 막았다. 일부는 나무 삽을 들고 땅을 헤쳤고, 일부는 평민으로 보이는 자들의 도움을 받아 장원의 담벼락을 무너뜨렸다.
뭔가 귀한 물건을 찾는 게 틀림없었다.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죠."
일행이 보인 관심은 여기까지였다. 유근을 죽이기만 하면 되는 이들에겐 상대의 목적 따위는 별로 중요치 않았다.
지금까지 그저 지켜본 것도 야효와 양달이 합류하길 기다리느라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근의 행방은?"
갓 합류한 야효에게 단아가 다짜고짜 질문했다.
"저기 있을 겁니다."
야효가 손가락으로 장원 한쪽에 늘어선 마차들을 가리켰다.
"유근이 저 다섯 마차 중 하나에 있단 말이지?"
"그리고 흑갑호위 두 명씩 나눠 탔습니다. 사흘 전 암살 시도가 있고부터."
"잠깐. 유근의 곁에 신기영의 흑갑호위들이 있다고? 확실한 거야?"
단아가 야효의 말을 끊고 질문했다.
"여기 양 호위도 봤습니다."
야효의 말에 양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단아는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선뜻 믿지 못했다.
"흑갑호위가 그렇게 강하오?"
단아의 과한 반응에 구후영이 의문이 담긴 말투로 질문했다.
"흑갑호위 자체는 일류 정도의 고수가 대부분입니다. 문제는 이들의 흑갑에 달린 십수 개 기관입니다. 기관으로 발사한 암기는 절정의 고수가 전력으로 던진 것과 위력이 비등한데, 심지어 전조조차 없습니다."
암기술은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커다란 벽을 마주한다.
모든 무공이 그렇지만, 상대를 맞추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여타 무기와 비교하면 한없이 가벼운 암기에 강한 힘을 실으려면 동작이 커야 하는데, 그러면 상대에게 피할 틈을 준다.
반대로 은밀함이 장점인 탄지신통은 상대가 눈치 못 채게 하려고 작고 가벼운 암기를 쓰는데, 아무리 내공을 실어 위력을 강화한다고 해도 한계가 명확하다.
탄지신통의 이러한 약점은 암기에 독을 바르는 거로 해결하는데, 암기가 작아 바를 수 있는 양이 적다. 적은 양에도 강한 독성을 발휘하는 독은 비쌀 뿐만 아니라 구하기도 힘들다.
그런 면에서, 강력한 기관으로 발사하는 암기는 탄지신통의 은밀함을 그대로 답습하면서도 위력마저 강하다. 크기나 무게에 제한이 있는 탄지신통과 달리, 기관으로 발사하는 암기는 크고 무겁게 만들 수 있고 강한 독도 마음껏 바를 수 있다.
"흑갑호위 한 명이 탄지신통을 익힌 절정 고수 두 명과 맞먹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단아의 말에 양달이 맞장구쳤다.
"모용세가의 장로와 가신 수십 명이 몇 합 사이에 전부 죽었다고 합니다."
암기에 발린 강한 독 탓에 스쳐 맞은 자도 몇 호흡 버티지 못하고 절명했다.
"게다가 흑갑은 화포도 한 발 견딜 정도로 단단합니다. 격층隔層 구조여서 내가장법도 제대로 먹히지 않으니, 호위로선 최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단아의 말에 구후영은 한숨이 나올 뻔했다.
쉽게 말하면 무쇠처럼 단단한 등껍질을 감싼 자라가 치명적인 독을 품은 전갈의 꼬리까지 갖춘 셈이다.
무공을 모르는 나쁜 환관을 죽이면 되는 간단한 복수라고 여겼는데, 흑갑호위라는 생각지도 못한 존재가 구후영을 방해하려 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흑갑호위의 강함만이 아닙니다."
단아가 구후영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황제나 태자를 지켜야 할 흑갑호위가 유근의 곁에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심지어 열 명이나 말입니다."
흑갑호위는 황제와 황태자만 지킨다.
현재 조정을 쥐락펴락하는 황태후도, 그런 황태후에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는 황후도, 고귀한 황실 핏줄이라고 하나 황태자가 되지 못한 어떤 황자도 흑갑호위의 경호 대상이 아니다.
그런 자들이 장인태감이라곤 하나 고작 환관인 유근한테 열 명이나 들러붙었다.
'유근의 이번 출행이 매우 중요하단 뜻이겠지.'
구후영은 단아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 깨달았다.
'모용가에 뭐가 있어 황제가 마음이 동한 거지?'
구후영이 아는 황제는 신선이 되는 일 빼곤 거의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다.
"유근을 죽이면 황제가 분노할지도 모릅니다."
황태후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정도의 권력을 부리더라도 흑갑호위는 어찌할 수 없다. 이는 황제가 흑갑호위를 붙여줄 정도로 유근이 하는 일을 중요히 여긴단 뜻이다.
"유근을 죽이는 과정에 정체를 숨겨야 합니다."
"젠장."
단아의 말에 장선이 한숨을 푹 쉬었다.
무공조차 모르는 환관 하나를 죽여 오랜 기간 가슴에 맺힌 한을 풀 좋은 기회라고 여겼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대체 어떤 새끼들이 타초경사 한 거야."
장선은 잔뜩 치민 화를 섣불리 암살을 시도하고 처참하게 실패한 얼굴도 모르는 멍청한 무리한테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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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단아의 말에 일행은 평민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때.
"저기 보셔야 합니다."
장원을 주시하던 야효와 양달이 동시에 외쳤다.
그에 일행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야효가 가리키는 방향을 주시했다.
"잡아!"
집을 허물던 중, 벽에서 흰옷을 입은 자가 갑자기 뛰쳐나왔다.
그에 깜짝 놀란 기술자들이 엉덩방아를 찧었고, 고된 훈련을 이겨낸 정예 병사라고 다를 바 없었다.
덕분에 흰옷은 아무런 방해도 안 받고 밖으로 나왔고, 바로 경공을 펼쳐 장원 밖으로 도주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금의위가 도주하는 자를 잡으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지만, 작정하고 도주하는 절정의 고수를 일반 병사들이 막아낼 리가 없었다.
"유근이 움직일지도 모르오."
유근이 마차에서 내려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구후영은 바닥의 흙을 한 움큼 잡아 얼굴에 문지른 다음 바로 경공을 펼쳐 장원 쪽으로 달렸다.
"활을 쏴라."
금의위 중에 일류는 물론 절정의 고수도 있지만, 경공이 대단한 자는 없었다. 이대로는 흰옷을 놓칠 게 뻔하기에 이들을 이끄는 강창휘가 재빨리 조치했다.
수슈슝.
먼저 십수 발의 화살이 날아갔고, 다음엔 수십 발. 세 번째엔 이백 발 넘게 날아갔다.
"계속, 멈추지 말고 계속 쏴. 이 병신들아!"
강창휘의 호통에 다 끝난 일이라는 섣부른 판단에 활을 내렸던 병사들이 다시 시위에 깍지를 걸었다.
슈슝.
급가속으로 첫 번째 화살 공격을 겨우 피한 흰옷이 낭패한 얼굴로 돌아서서 검을 휘둘렀다.
수백 발의 화살 모두 정확히 조준된 게 아니기에, 괜히 피하다가 눈먼 살을 맞는 것보단 제자리에서 쳐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생각은 훌륭했으나 대처는 그렇지 못했다.
첫 번째 화살 공격을 피하려고 무리했던 탓에 내공이 잠깐 끊겼다. 그렇게 끊긴 내공으로 검에 힘이 실리지 않았고, 손목이 버티지 못하면서 화살을 제대로 쳐내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할까.
안타깝게 놓친 유일한 화살이 다리가 아닌 팔에 박혔다. 그게 하필이면 검을 잡는 오른팔이라는 건 전혀 다행스럽지 않았지만.
"우리 조만 날 따른다. 너희는 장원에 숨은 자가 더 없는지 수색하고 나머지는 태감을 지켜라."
유근이 찾는 물건이 흰옷을 입은 자에게 있을 가능성이 엄청나게 크다. 그게 아니어도 흰옷이 그 행방을 알 가능성이 아주 크고.
어마어마한 공을 세워 사품인 이복형을 밑으로 뭉갤 절호의 기회란 생각에 강창휘는 자신의 심복들만 거느리고 비칠거리며 도주하는 흰옷을 쫓기로 했다.
'저 천한 기녀의 자식새끼가.'
고작 소기 주제에 총지휘가 된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공을 세울 기회가 생기자마자 자신들을 철저히 배제하는 모습에 모두 이가 갈렸다.
그러나 나온 배는 천해도 씨는 순천부에서 세 손가락에 드는 강씨 가문의 것이다. 금의위들은 속으로 화를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뭐해. 일 잠깐 멈추고 수색 다시 한다."
그나마 머리가 잘 돌아가는 자들은 흰옷이 나왔던 방으로 냉큼 달려갔다.
그러는 사이.
강창휘 등이 흰옷을 거의 따라잡았다.
흰옷은 다리가 아닌 팔을 다쳐 다행이라고 여겼지만, 난생처음 느낀 고통은 눈앞을 노랗게 물들였고 머리도 어지럽혔다.
'자결할까?'
지금까지 자신이 꽤 심지가 곧은 사람이라고 여겼지만, 고통 앞엔 장사 없었다. 이대로 잡혀 고문당하면 자신이 모르는 것까지 다 불어버릴 것만 같다는 생각에 흰옷은 왼손을 품에 넣어 비수를 더듬었다.
그때.
"여기까지다."
시원한 소녀의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동시에 누군가가 흰옷의 덜미를 잡고 경공을 펼쳐 달렸다. 자신이 전력으로 달리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에 깜짝 놀라 버둥거리던 흰옷은 바로 정신을 차리고 얌전히 있었다.
'유근은 저기 없는 건가?'
숲을 따라 움직이는 내내 다섯 마차를 주시했지만,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태세를 봐선 엄청나게 중요한 물건을 찾는 듯한데 미동도 없다는 건 저 다섯 마차 모두가 가짜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아니면 찾는 물건이 사람이 들고 움직일 수 있는 작은 물건이 아닌 건가?'
구후영이 온갖 고민에 빠졌을 때, 흰옷 역시 머리가 복잡했다.
'누구지? 왜지? 날 지원하라고 따로 보낸 사람인가?'
흰옷이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이, 구후영이 신형을 멈추고 흰옷을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그때.
"응? 이자는."
갑자기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흰옷이 고개를 홱 돌렸다.
"넌!"
야효의 얼굴을 알아본 흰옷이 왼손으로 비수를 꺼내는 동시에 통증도 잊은 채 몸을 날렸다.
그에 원경이 바로 반응해 야효의 앞을 가로막으며 손바닥을 앞으로 쭉 내밀었으나.
물컹.
갑자기 느껴진 이질적인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양손을 거둬들였다.
"어딜 만지는 겁니까!"
바닥에 주저앉은 흰옷이 뾰족한 목소리로 외쳤다.
- 작가의말
피의자 원경은 어딜 어떻게 만졌고 감촉이 어땠는지 5천 자로 최대한 자세하고 생생하게 기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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